제2강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1:2-7)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맡기신 삶에 만족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살고 계십니까? 만일 이 질문에 쉽게 아멘으로 대답을 하실 수 없으시다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최근에 어느 대학병원에서 불쌍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한 여전도사님의 눈물어린 간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간증은 중풍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중풍환자들은 팔과 다리가 달려 있지만 저들 마음대로 팔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들처럼 마음대로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병원에는 이런 중풍환자들을 오히려 부러워하는 또 한 부류의 환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환자들입니다. 두 다리가 잘려서 의족을 한 어떤 젊은 청년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다리가 좀 못생겼으면 어떻습니까? 소아마비에 걸려서 한쪽 다리가 좀 짧으면 어떻습니까? 휘어졌으면 어떻습니까? 비록 힘없는 다리지만 제 다리를 가지고 제 힘으로 일어서볼 수만 있다면 저는 아무런 소원이 없겠습니다.” 사고로 인해서 오른 팔을 잃어버린 어떤 젊은 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나에게 다시 오른 팔이 주어진다면 나는 절대로 빨래를 세탁기로 빨지 않을 것입니다. 빨래를 직접 내 손으로 비벼 빨면서 손끝으로 느끼는 감촉을 매일매일 맛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아무리 많은 일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는 오히려 이와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는 또 한 부류의 환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이 부러졌거나 척추에 이상이 있어서 완전히 사지가 마비된 채 병상에 누워서 지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대소변에 대한 감각은 살아 있지 않습니까? 휠체어를 타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대소변에 대한 감각조차 잃어버린 채 병상에 누워서 죽은 듯이 지내야 하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저들은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로 밟아서 소변을 짜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는 이런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중환자실에 가면 완전히 의식을 잃은 채 산소호흡기를 끼고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의 보호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의식이 살아 있어서 자기의 불편을 호소할 수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언제 우리를 알아보고 우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4년째 의식을 잃어버린 남편을 둔 어떤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일평생 동안 식모로 살아도 좋습니다. 내 남편이 일어서서 걷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내 남편에게 의식이 돌아와서 나를 알아보고 내게 여보라는 말 한 마디만 해주어도 나는 일평생 동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만족합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사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좁아서 그렇습니까?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너무 낡아서 그렇습니까? 마땅히 입고 나갈 옷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내 자녀들이 공부를 잘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가 너무 사치스럽고 허영에 가득 차서 하는 불평은 아닙니까?
만일 병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고 가정을 해보십시다. “당신은 팔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고 음식을 먹고 자연스럽게 소화시킬 수 있었던 그때에는 감사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마도 저들은 얼굴에 씁스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처지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병원에서 일 년 동안 누워 있는 어떤 아주머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헌금드리는 일에 너무나도 인색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간병비만 매달 150만원씩 일 년째 지불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하나님께 헌금드리는 일에나 인색하지 말 것을.”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물질 주셨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 된 우리들이 특별히 감사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복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 문제 아닙니까?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나로 하여금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영원한 저 본향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뜻 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두번째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허락해주셨는가? 세번째로, 복음을 받은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의 질문과 답을 간단간단하게 생각하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세례 문답을 받기 위해서 목사님 앞에 섰습니다.
“형제여, 그대는 무엇을 믿습니까?”
청년이 얼떨결에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예, 저는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
목사님이 또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 우리 교회는 제가 믿는 것을 믿습니다.”
목사님이 기가 막혀서 또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 교회와 당신, 둘 다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청년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을 것 같습니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회와 저는 둘 다 똑같은 것을 믿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믿으니까 믿는다는 사실만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복음은”이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복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누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누구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그의 아들에 관하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빼버린다면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즉흥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 전에 다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이 약속을 우리들에게 전달해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미리 다 예언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경대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성경대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성경대로 그 아들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경대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성경대로 그 아들은 반드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3~4절에서 복음의 핵심이 되는 그 아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4절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의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나 어머니 마리아나 다 같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그것을 설명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것을 간단하게 압축해서 우리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3절은 예수님의 육에 대해서, 4절은 예수님의 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냥 영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성결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보면 “죽은 가운데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며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반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복음의 반쪽이 있습니다.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을 해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뜻밖에 기쁜 소식이 들렸습니다. 사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방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나와보니까 세상을 살아갈 길이 막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시 죄를 짓고 감옥에 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가 종종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그와 같은 자리에 내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시면서 우리의 삶의 안내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붙드시고 영원한 본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십니다. 내게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고, 새로운 생명의 감격을 맛보게 해주시고, 새로운 생명의 환희를 느낄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본문 4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물론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여러분께서 4절에 있는 말씀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분은 곧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의 로마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자기들의 주라고 여겼습니다. 또 이러한 고백을 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때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분명하고도 감격스러운 고백을 했습니다. 이 고백 때문에 저들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감격스러운 고백을 하면서 저들은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놀라운 고백과 감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까?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5절 말씀을 우리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엇을 받았다고 했습니까?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받을 자격이 없지만, 나는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바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나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광스런 천국의 기업을 이을 수 있게 해주시니 이것이 바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이런저런 귀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목사의 직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장로의 직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권사의 직분을 허락해주시고, 집사의 직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성가대원이라고 하는 귀한 직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 한번 답변해보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먼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직분이 먼저라고 생각하십니까? 은혜가 먼저이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인지를 바로 깨닫는 사람만이 주어진 직분에 충성을 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집사라고 하는 귀한 직분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두 차례 할까말까한 헌금위원, 안내위원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감격스러운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집사가 되느냐, 권사가 되느냐, 장로가 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까? 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까? 왜 우리들에게 귀한 직분을 주셨습니까? 나 혼자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5절을 보면 무엇을 위하여 주셨다고 했습니까? “그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은혜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또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믿어 순종케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참 믿음은 무엇이 수반된 믿음입니까? 믿음에는 무엇이 수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지식으로 아는 것, 머리로만 아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을 전해서 저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구원에 이르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남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불행하게도 그만 위암에 걸렸습니다.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 부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나 혼자 살겠다고 이 기도원, 저 기도원을 찾아다니면서 안수기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오. 내 생명이 얼마가 남았든지 이제부터는 내 죽는 그 시간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려고 하오.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면 이것도 순교가 아니겠소?”
그 이야기를 듣고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 몸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십니까? 당신의 몸이 완쾌되고 난 뒤에라면 얼마든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도 되지만 일어서기도 힘든 그 몸을 가지고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를 믿고 싶어하던 사람도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당신의 모습을 본다면 다 달아나버리지 않겠어요? 당신 몸이 완쾌될 때까지는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너무나도 확고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 힘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오?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대로 반드시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하오.”
그러면서 자기를 가까운 병원에 옮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결심이 너무나도 확고한 것을 보고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집사님을 가까운 병원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는 병실에 들어가서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고통스러운 몸으로 병상 한 귀퉁이를 쥐고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근처 교회에 다니는 집사입니다. 여러분, 보시다시피 저는 암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저귀를 차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이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저는 병원에 가보았자 아무 소망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 고통 속에서도 아픔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힘들 때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내가 믿는 예수를 여러분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통 속에서 아픔을 참아가면서 더듬더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환자 모두가 침상에 누워서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에 또 그 병실을 찾아갔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있는 정성 다해서 고통스런 몸을 부여잡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병실에 입원해 있던 한 환자가 일어나 앉아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눈물이 글썽하면서 그에게 외쳤습니다.
“집사님이라고 하셨지요? 이제 그만하세요, 힘들 텐데요. 내가 예수 믿을게요. 나는 지금까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처럼 정직하게 나는 예수를 믿지만 암으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하면서 진실되게 전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전하는 예수라면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그 소리에 거기에 있는 모든 환자가 다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비록 내가 가진 것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때 비록 가진 것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서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보십시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보십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연약한 것을 반드시 강한 것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나 혼자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입을 열어서 전파하라고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세번째로, 복음을 받은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6∼7절에서 복음 받은 자의 특권을 우리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해왔습니다. 이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라는 말은 “너희가 이방인들 가운데 있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 로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복음을 받아 누린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일부 몇 사람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름심을 받은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1천2백만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1천2백만의 기독교인을 보기에 앞서서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3천만이나 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택해주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의 신분이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6∼7절에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6∼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우리의 신분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발걸음을 예비해주시고, 예수님께서 내 모든 삶을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7절에 보니까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은 폭포수와 같이 우리를 향하여 쏟아져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사도 바울은 롬 8:38∼39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감히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해주고 계십니다.
세번째로,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로마서 1장 하반부는 그 당시의 로마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때에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을 성자로, 거룩한 사람의 높은 신분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자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놀라운 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지금도 우리에게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좇아 넘치는 은혜와 평강이 지금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아직도 버림받은 사람처럼 낙심 가운데 살아가십니까? 복음을 받은 사람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어떠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첫째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주셨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손을 굳게 붙들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이라는 것은 나 혼자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입을 열어서 담대하게 전하라고 복음을 주셨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복음을 받은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폭포수와 같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자라고 하는 높은 자리에 올려주셨습니다.
뜻 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임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우리들을 깨우쳐주시기 위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맥추감사주일을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서 영영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내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해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시며, 아울러 영광스러운 천국을 기업으로 이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요, 하나님이 나를 성도로 귀하게 보아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우리도 우리의 남은 생애를 그 이름을 위하여 이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복된 모습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맥추감사주일 예배를 정성껏 드리면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오는 은혜와 평강을 넘치도록 맛볼 수 있는 귀한 성일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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