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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4강 나의 열매는 누구인가?(1:13-17)

제4강 나의 열매는 누구인가?(1:13-17)  

우리가 지난 주일에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하면서 그 모습을 본받기를 원했습니다. 첫째는, 감사하자. 두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을 살자. 세번째는, 겸손한 삶을 살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에 과연 얼마나 감사하며,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또 얼마나 겸손한 삶을 사셨습니까? 여러분께서 이 시간에 한번 반성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나의 열매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잠시 말씀을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내가 맺어야 할 열매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서도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롬 1:1에서 밝힌 그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다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일평생 동안 그는 결혼하지 아니했습니다. 독신으로 지내면서 때로는 해로를 통해서, 때로는 육로를 통해서 마게도냐, 소아시아의 여러 지방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잠시도 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복음의 열매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 15:16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여 세워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려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까? “그 사람은 틀림없는 나의 열매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열매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아주 충격적인 일을 하나 겪었습니다. 몇 주 전이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사찰 집사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친구분 가운데 아무개라고 하는데요.” 교회에서 전화가 오면 “교인 가운데 누구”라는 말을 해야 예사인데 뜻밖에도 “목사님 친구분 가운데 아무개라고 하는데요”라고 해서 제가 되물었습니다. 틀림없이 그 이름은 제 친구의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학교 근처에서 1년 동안 하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와 한 방을 쓰면서 1년을 같이 지냈습니다. 그 친구의 부모는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습니다. 이 친구는 인품이 아주 좋았습니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았습니다. 서로의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저와 그 친구 사이에 종교적인 토론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제가 한번은 그 친구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무조건 기독교를 비판하지 말고 교회에 한 번이라도 출석을 해라. 출석을 하고 난 뒤에 이렇게저렇게 비판하면 좋지만,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함부로 비판을 하느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때마침 제가 다니던 교회에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훌륭한 목사님이 오셨으니까 부흥회 첫날 한 번 참석해봐라. 그럼 내가 너한테 맛있는 것으로 한 턱 낼게.” 이런 조건으로 친구를 부흥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놀랍지요?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 친구가 첫날 저녁에 한 번 참석하겠다고 했는데 둘째날, 셋째날, 끝날 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흥회가 끝나고 나서 그 다음 주일날도 제가 교회에 가니까 따라나섰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는 동안 계속해서 교회에 출석을 잘했습니다. 나중에는 저보다도 훨씬 더 믿음이 깊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친구의 전공은 법학이었는데 나중에 열심히 공부해서 행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보사부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첫 부임지가 소록도였습니다. 불쌍한 나병환자들을 자기가 믿음으로 돌보아주겠다고 하면서 지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자켓이라든지, 청바지를 만들어서 해외로 수출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소록도에서 얼마나 고생을 할까 하여 좋은 샘플이 있으면 그 친구에게 소포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면 답장이 옵니다. “내가 지금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친구가 서울에 올라오면 불러서 같이 식사하면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신학을 하면서 미국 유학길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오래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 친구가 공무원의 신분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한 7~8년 정도 연락을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날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이 친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삼성의료원 영안실에 있다는 연락이 온 것입니다. 얼마나 제가 놀랐겠습니까? 부랴부랴 뛰어갔습니다. 그의 부인을 붙들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과로로 순직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그 친구가 복지부의 과장이니까 최근에 한의사와 약사들의 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과로가 겹쳐서 심장마비로 그만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더욱 놀라게 한 일은 바로 그뒤에 있었습니다. 제가 잠시 애도의 뜻을 표한 뒤에 부인에게 앞으로 장례 절차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그 친구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모든 것을 다 주관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인이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아버님의 뜻에 따라서 원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아니, 그 친구 요즘 교회에 안 다녔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교회 안 다닌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야 말로 확실한 나의 열매라고 생각을 했는데, 순식간에 그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만일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면 틀림없이 열매를 요구하실 텐데 나의 열매가 누구일까 생각을 해보니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스스로 이렇게 자문자답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승동교회의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의 열매라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도무지 그럴 자신이 생기지 아니했습니다. 물론 제가 한 2년 동안 교회에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더 솔직한 대답은 내가 성도들을 위해서 내 생명을 다 바쳐서 진정으로 저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저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짧더라도 굵게 살리라. 짧더라도 굵게 일하리라.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 할지라도 승동교회의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나의 열매라고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도록 짧더라도 굵게 목회하리라.” 그리고 또 제가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사람을 쳐다보지 아니하리라.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리라.” 왜 그렇겠습니까? 사람들을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의 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제가 굳게굳게 다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열매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매는 과연 누구입니까?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해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야만 하는가? 두번째로,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 세번째로, 복음은 왜 전해야만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을 차례대로 간단간단하게 생각하면서 과연 내가 맺어야 할 열매가 누구인지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져야만 합니까?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져야 합니까? 답변은 간단합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구별 없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복음은 변함없이 날마나 새롭게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다 같이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헬라 사람이나, 또 어리석다고 야만인 취급을 받는 사람에게나 구분 없이 복음은 다 전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저들 모두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없이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전도지를 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전도지 앞면에 이런 질문이 적혀 있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 정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뒷면에 정답이 적혀 있습니다. 정답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 믿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죄 사함 받지 않고,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면 그대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말할 것도 없이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나같이 못난 사람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지만 나보다 잘난 사람, 더 똑똑한 사람, 더 부유한 사람, 더 건강한 사람에게도 복음은 똑같이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에 있는 너희가 누구이겠습니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롬 1:8에 있는 말씀처럼 저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정도로 믿음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너희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왜 그럴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초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교회에 오래 출석한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까? 초신자라구요? 천만에요. 초신자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누가 영적으로 교만합니까? 초신자들이 교만한 것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오히려 순수합니다.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찌하든지 복음대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예수를 믿은지 오래된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영적으로 교만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감동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만 저들의 마음속에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오래된 사람일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주의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매너리즘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번 철저하게 깨져야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자아가 완전히 깨지고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는 체험을 해야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에 지금의 사도 바울이 이 자리에 서서 외친다면 그는 지금도 이와 같이 외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승동의 가족 여러분!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승동교회 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도 날마다 새롭게 들려야 하고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두번째로, 복음은 어떻게 전해져야 합니까?
그 첫번째가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절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복음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이 어떠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가 잘 아는 고전 9:16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복음을 전할지라도 뭐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까?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늘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뿐이지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전도부에서 전도상을 시상합니다. 그러나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빚진 사람은 당연히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하나님께서 그 빚을 탕감해주었어. 저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밖에 안돼. 나는 저 사람보다 더 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어떻게 하든지 도와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진 자의 심정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정죄하기를 잘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바리새인처럼 교만합니다. 그래서 칼로 무 자르듯이 남을 잘라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빚진 자의 심정은 어떠한 것입니까?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빚을 갚지 않으면 책임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빚을 갚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 화가 미친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역시 화가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받은 복음을 우리도 받았습니다. 바울이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지금 받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우리도 역시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에게 화가 있다면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할 때도 역시 화가 우리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복음은 또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주머니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주머니, 왜 요즘 교회에서 안 보이세요?” 그 아주머니가 대답하시는 말씀이 시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데 너무 반대가 심해서 교회에 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열심히 교회에 나오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은 엄청나게 무서운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시부모는 지옥에 가도 괜찮고, 자기는 혼자 예수 믿어 천국에 가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와 같이 무서운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구원하고 싶으십니까?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왜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생명을 걸고 해보세요. 그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부모, 형제, 자매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되는 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 복음은 어떻게 전해져야 합니까? 16절 말씀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안됩니다. 복음을 당연히 전해야 하는데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은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너희에게 자랑하노라”고 하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자랑하면서 전파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시지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하리라.”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나중에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설 때 예수님이 우리를 부끄러워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입을 열어서 담대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첫째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전해야 하고, 두번째로,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생명을 걸고 하라고 했습니다. 세번째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번째로, 복음이 왜 전해져야만 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교리적인 설교이기 때문에 좀 딱딱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께서 반드시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제가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복음이 왜 전해져야만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에서 그것을 잘 설명해주었습니다. 16절 말씀을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이 자랑하는 지혜라든지, 로마 사람들이 자랑하는 힘 같은 것은 다 인간적인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줍니다.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때로는 구원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뒤돌아서면 구원을 안 받은 것 같기도 해서 마음속에 불안이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노력하고, 내가 애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힘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 없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바로 구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아멘, 할렐루야!”하고 대답은 잘합니다. 그런데 뒤돌아서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내 힘으로, 내가 노력해서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을 하니까 불안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재미 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촛불 앞에 서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누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한 태양 아래 서 있는 것과 같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촛불 앞에 서 있어 보세요. 촛불이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얼마나 불안합니까? 내 노력으로, 내가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와 같이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 뒤에 악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심성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한 태양 아래 서 있을 때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태양 빛은 꺼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때 우리 마음속에 불안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람에게 구원의 선물을 허락해주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고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자에게”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적어도 신구약 성경을 한번 이상 읽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16절에 보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했습니다. 믿어야 한다는 조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여러분, 조오련 선수를 기억하십니까? 조오련 선수는 무슨 선수였습니까? 수영 선수입니다. 여러 해 전에 조오련 선수가 수영으로 현해탄을 건너겠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결국은 파도가 너무 심해서 중간에 포기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수영을 해서 넓은 태평양을 건널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건널 수 없습니다.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저 넓은 태평양을 건너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합니다. 어떻게 하면 쉽게 건널 수 있습니까? 비행기를 타면 됩니다. 비행기를 타면 넓은 태평양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가 미국에 가니까 열심히 뛰어야지 하고 비행기 속에서 달음박질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러면 미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행기 안에서 달린다고 미국에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가 날라다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애쓰고, 내가 땀흘리고,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데려다주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속에 불안이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오늘 본문 16절에 보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예외가 없다고 했습니다. 믿기만 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께서 다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믿음이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했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에서 똑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7절은 마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했던 귀한 말씀입니다. 17절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되새기는 심정으로 같이 읽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범죄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입니까? 처음 시작도 믿음이요, 나중 끝도 믿음입니다. 오직 한 가지 믿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그런 것을 가지고는 되지 않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보내준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가 믿을 때 내가 그것을 보고 너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죄로 인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영원히 살 수 있는지 17절 하반부에서 사도 바울이 구약 성경 합 2:4의 말씀을 인용해서 우리들에게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 이 한 가지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 복음에는 무엇이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믿음으로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대해서 제가 다시 물어봅니다. 첫째로,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져야 합니까? 누구에게나 구별 없이 전해져야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자칭하는 사람일수록 복음은 다시 들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심령이  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겸손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복음은 어떻게 전해져야 합니까? 첫째로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전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복음을 왜 전해야 합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또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빚은 갚으면 갚을수록 내 형편이 더욱더 쪼들리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상에게도 복음의 빚은 갚으면 갚을수록 더욱더 풍성해집니다. 내 믿음이 그만큼 더 깊어집니다. 나 자신이 복음 위에 더욱더 견고하게 설 수가 있게 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맺어야 할 열매는 과연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 얼굴이 떠오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인물이, 그 얼굴이, 그 이름이 우리에게 복음의 아름다운 열매로 다 확실하게 맺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해주시고 믿음으로, 오직 믿음 한 가지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 일에 너무나도 둔감했습니다.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더욱 뜨거운 심정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가는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허락해주신 것은 그것을 싸서 땅에 묻어두라고 주신 것은 아닌 줄 압니다.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해서 복음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인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특별히 우리 승동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 가운데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 되지 못한 분들을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믿지 않는 가족들이 다 주님 앞으로 손에 손잡고 나올 수 있는 귀한 역사를 허락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더 이상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랑할 수 있는 우리 승동의 가족들이 다 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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