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바울에게서 배운다(1:8-12)
여러분, 강화도령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그는 전주 이씨였습니다. 이성계의 피를 타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상이 강화도에 유배를 가게 됨에 따라 그는 비록 왕손이었지만 아주 형편없는 집안의 자손처럼 자라났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양에서는 이씨 왕가의 대가 끊어졌습니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이성계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서 왕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안동 김씨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들의 속셈은 이러했습니다. 이성계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워놓고 실질적인 권세는 자기들이 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발탁된 사람이 바로 강화도령이었습니다. 그가 조선의 제 25대 임금 철종입니다.
강화도령은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다 갖추었습니다. 분명히 전주 이씨였습니다. 명백하게 이성계의 피를 타고 태어났습니다. 또 동기야 어떠했든지 간에 그는 실제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었다는 사실과 그가 얼마나 왕답게 살았느냐는 것은 전연 별개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하들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제대로 왕답게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화도령은 왕이 되기는 했지만 매일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쾌락 때문에 몸을 망쳐버리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서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6∼7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얼마나 소중한 신분인지를 세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와 같이 귀한 신분을 가진 자로 삼아주셨지만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볼 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과연 어떠한 삶인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과연 어떠한지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고하기에 앞서서 먼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는 것,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순서가 바로 잡혀야 합니다. 이 순서가 잘못되어 버리면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만큼 했으니까 저에게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앞이 막혀 버립니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읽었으니까, 내가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내가 선한 행실을 많이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겠지.” 이러한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형식주의입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율법주의적이고 행위 중심적인 신앙이 철저하게 깨지지 아니하면 우리 마음속에 뜨거움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었어도 마음속에 감사와 감격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로마서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이와 같이 잘못된 신앙들이 철저하게 완전히 깨져버리는 귀한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언제 사랑하셨습니까? 내가 그럴 듯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셨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롬 5:8에 있는 말씀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어떠할 때라고 했습니까? 죄인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셨다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얼룩진 모습, 문둥이처럼 더럽고 추한 모습이었을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지만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분명히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속에 평안에 있고 마음속에 기쁨이 있고 감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 어떠한지 사도 바울에게서 중요한 세 가지의 모습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다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첫째는 감사입니다. 순서로도 첫째가 감사이지만, 내용으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 아버지에게 마땅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어떠한 감사를 드렸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누구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만 들어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5절 말씀을 보세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귀한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높고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리시며 고통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 내게 새로운 생명의 감격과 환희를 허락해주시기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시는 예수님, 나를 위하여 반드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아니했습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누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까? 나 때문에라고 했습니까? 나로 인해서 감사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때문에, 너희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하나님께 드렸던 감사를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실 때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또 식후에 예수님이 잔을 가지고 사례하셨습니다. 역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비록 내 몸은 찢기고, 내 피는 쏟아지게 되지만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생각하니까 내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감사와 사도 바울의 감사는 내가 잘 되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잘 되기 때문에, 네가 잘 되기 때문에 드리는 수준 높은 감사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의 어떠한 점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까?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 교회인들 왜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왜 단점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좋은 점, 장점을 생각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문제가 많았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아니하고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좋은 점을 생각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편지할 때도 저들의 좋은 점을 생각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나쁜 점, 좋지 못한 점을 보려고 애쓰기에 앞서서 상대편의 좋은 점을 생각하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8절의 마지막 부분을 묵상하면서 기도 제목을 하나 얻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승동교회가 이런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승동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서울 장안에, 더 나아가서 대한민국에,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고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다니던 한 유학생이 그날 말씀을 통해서 아주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청년이 작년 여름방학 때 잠시 서울에 나올 일이 있었습니다. 방학이니까 저도 서울에 와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승동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까지 왔다고 합니다. 전철역에서 나와서 이 근처까지 왔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동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근처까지 와서 묻는데도 한 사람도 알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근처까지 왔다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찾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가 우리에게 오랜 역사와 전통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귀한 믿음의 선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만 가지고 만족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축복이 우리 승동교회에 반드시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앞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로마에 가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보고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겠다는 것이 바울이 가진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그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9절 말씀을 보면 미루어 짐작해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그리워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쉬지 않고 저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사도 바울만큼 바쁜 사람이 또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힘들고 고달픈 삶으로 말한다면 사도 바울만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바쁘고 힘든 삶에서도 날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그리워하면서 계속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울의 그 심정, 그 눈물, 그 기도를 알아주겠습니까? 비록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준다 해도 단 한 분 알아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은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그것은 껍데기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열심에 지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해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내가 얼마나 너희들을 위하여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하는지를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아직도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소원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할 때에 바울이 어떻게 대처를 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기도를 했는데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오늘 본문 10절이 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물론 로마에 가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바울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억지로 하지 아니했습니다. 내가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나를 로마로 보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내 뜻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조지 밀러는 80이 넘은 고령이 되었을 때에 어느 교회의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서 지나간 날을 쭉 돌이켜보면서 그들에게 자기의 경험담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조지 밀러가 일평생 동안 길러낸 고아의 수가 자그만치 1만 명이 넘었습니다. 또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주일학교 학생 수는 10만 명이 넘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선교사들에게 보내준 성경책만도 2만 권이 넘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동안 자기 손으로 돈은 한 푼도 벌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금까지 만진 돈의 액수가 자그만치 1,300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이 위대한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까?”
그 질문을 받고서 조지 밀러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자기의 두 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이고 꿇어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한참 있다가 일어서서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것뿐이었노라!”
조지 밀러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는 최선의 길을 깨달을 수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뜻을 발견할 수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최선의 복을 누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내 일평생 동안에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고 기도를 통해서 내가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의 최선의 복을 손꼽아보라면 아마도 줄잡아서 5만 번 이상은 될 것입니다.”
그는 일평생 동안 참으로 위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큰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늘 하나님께 구했지 한번도 사람에게 구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께 구했지 사람에게는 구해본 적이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삶을 살았던 조지 밀러가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네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여러분도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이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한번 따라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맑아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다 없애버려야 합니다. 시기라든지 경쟁심도 없애고 선입견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감정으로 들뜨는 것도 없애서 마음이 편할 때, 마음이 맑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경 원리에 비추어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또는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언제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주십니다. 따라서 내가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서 과연 이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인지, 맞지 않는 일인지를 알려면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환경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절대로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환경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로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반드시 막으십니다. 때로는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친구의 조언을 통해서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 마음속에 따끔따끔한 가책이 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억지로 가려고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순리적인 길,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좋은 길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환경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네번째로, 조용히 하나님께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해보라는 것입니다. “오 주여, 만일 주님이 저의 경우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빙긋이 웃으시면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라면 이 경우에 이렇게 하지”하고 예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네 가지 방법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첫째로는 마음이 맑아라, 두번째로는 성경원리에 비추어 보아라, 세번째로는 환경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찾아보아라, 네번째는 조용히 하나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지라도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나의 뜻을 앞세우려고 하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로, 사도 바울은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겸손! 오늘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이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로마에 그토록 가고 싶어했는지, 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그토록 간절하게 보고 싶어했는지 오늘 본분 11∼12절을 보면 그 이유와 목적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11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심히 보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을 받아오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얻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신령한 은사를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시는 줄 압니다. 행 3:6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우리 성도들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나누어줄 것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나누어주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언제나 가득 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도 수없이 맞았고 감옥에 여러 차례 갇혔고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한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신령한 은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형편을 제대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떠한 은사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슨 신령한 은사가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하신 은사를 나누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맡기신 신령한 은사를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성도들을 견고하게 세워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더 든든하게 세워나가고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목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서울대학교 교수 손봉호 박사를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이분은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여러 가지 건설적인 비판을 많이 하시는 분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최근에 놀랍게도 이러한 간증을 했습니다. 제가 그 간증을 듣고 그분을 더욱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는 자신이 한국 교회에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동안 한국 교회에 대해서 여러 가지 건설적인 비판을 많이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까 자기의 비판으로 인해서 성도들을 견고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속에 상처를 준 것이 아닌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자기의 비판으로 인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물어뜨리는 일을 하지 않았나 하는 두려운 생각이 앞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일을 아주 신중히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삼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나서 더욱더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비판하는 말 한 마디로, 독설적인 말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물어뜨리는 일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가 늘 살펴보면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정말로 본받아야 할 귀한 모습이 거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에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사도 바울의 겸손한 모습을 우리가 여기서 본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는 사람이고, 너희는 받는 사람이다. 나는 가르쳐주는 사람이고, 너희는 배우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주장을 한다든지 권위적인 자세를 취하지 아니했습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뭐 그리 대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건너가서 너희의 믿음을 내가 더욱더 견고케 해주리라. 내가 누구냐? 이방인의 대사도 바울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 나도 역시 부족한 사람입니다. 연약한 사람입니다. 우리 서로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피차에 서로 세워주고 위로함을 받는 귀한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까?
여러분, 혹시 “알부남”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와 같은 사람을 알부남이라고 합니다. 알부남이 뭔고 하니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차갑게 보이지만 그 속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편지를 할 때마다 “여러분, 부족한 저를 잊지 마시고 기억하시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고 하는 부탁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제 마음속에 불현듯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잠시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우리 교회의 대학부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주저없이 그때 그 젊은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은 그때의 대학부 형제 자매들의 도움이었다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해마다 방학이 되면 수련회가 열립니다. 그러면 수련회가 열리기 약 한 달 전부터 저는 매일 두 통의 편지를 형제 자매들로부터 꼭꼭 받습니다. 제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학부원들이 자진해서 순번을 짜서 매일 두 사람씩 제게 편지를 보내줍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형식적이고 마지못해서 하는 편지가 아니라 진정으로 저를 사랑해주고, 위해주고, 존경해주고, 아껴주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지금도 그 편지의 내용 몇 개는 제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내용입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번 수련회 동안에도 우리 전도사님을 통해서 풍성하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분명히 확신합니다. 이것을 생각하니까 수련회가 너무나도 기다려집니다. 전도사님, 힘내세요!” 또 어떤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처럼 귀한 분을 우리 대학부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소리 높여 찬양 올립니다.” 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전도사님, 지난 주에 전도사님께서 주신 그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스러워서 지금 녹음기로 다시 전도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전도사님, 주님 안에서 진정 사랑해요.” 이런 내용의 편지들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 편지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왜 눈물이 흐르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들을 위해서 더욱더 기도하리라. 내가 이들을 위하여 더욱더 열심으로 말씀을 준비하리라.” 저도 모르게 그와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수련회가 시작이 됩니다. 전도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그 젊은이들의 눈빛이 다릅니다. 상기된 모습,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목해서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오히려 은혜를 받습니다. 말씀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눈에 자기들도 모르게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흥건히 고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부족한 것도 그렇게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는구나”하고 제가 은혜를 받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 젊은이들을 인해서 제가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피차 안위함을 받고, 피차 세워주는 아름다운 분위기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한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귀한 은사를 나누어줌으로써 서로 견고케 해주고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위로를 받고 안위함을 받는 귀한 역사가 날마다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숙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떠한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첫째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네가 잘 된 것을 생각하면서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성숙한 모습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내 뜻을 앞세우지 말고 누구의 뜻을 앞세우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마음이 맑아야 합니다. 성경 원리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환경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조용히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사도 바울의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한 심정으로 나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높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각자의 은사를 서로 나눔으로써 서로 견고케 해주고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안위함을 받는 아름다운 역사가 우리 승동교회에 날마다 더하게 해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 일깨워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도 사도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좋은 면을 생각하면서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성숙한 저희들의 모습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내 뜻을 앞세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사도 바울의 겸손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승동의 가족들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각자에게 맡기신 은사를 서로 나눔으로써 피차 위로 받고 안위함을 받는 아름다운 역사가 날마다 더해갈 수 있는 복이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해서 우리의 이 아름다운 믿음이, 우리 승동 교우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널리 전파되는 귀한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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