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1:18-23)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했습니까?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별 없이 다 전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늘 새롭게 전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은 항상 구원의 감격을 잃지 아니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세 가지로 일깨워주었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전해라,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라, 복음은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는 세 가지였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그러면 복음은 왜 전해져야 한다고 했습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과연 복음의 빚을 얼마나 갚으셨습니까? “그까짓 빚이야 안 갚아도 상관 없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입을 꾹 다물고 한 마디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제가 구약 성경 겔 3:17∼18을 읽을 때 문제의 심각성을 여러분께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무슨 뜻입니까? 가령 우리 이웃 사람이 예수를 안 믿습니다. 내가 그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이 예수 믿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고도 입 다물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기는 그 사람이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 피 값을 누구에게 찾으신다는 것입니까? 나에게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청구서를 내게 보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말도 잘하고 혀도 쉴 새 없이 잘 놀리더니 내가 전하라고 하는 복음은 왜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따지고 책임을 추궁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9:16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경우에 자기에게 화가 미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도 바울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바울에게 화가 미친다면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옆집에 불이 났습니다. 여러분,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철로 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기차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체면 차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교양이고 에티켓이고 찾을 게 어디 있습니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단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세요. 예수 믿고 살 길을 찾으세요.” 일단 복음을 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이 피 값을 우리들에게서 찾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한 마디라도 좋습니다. 복음의 빚을 꼭 갚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세요.”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단 한 마디라도 괜찮습니다. 잊지 마시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시는 이번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만일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편의상 세 가지로 나누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18절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아무도 입을 열어서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세번째로는, 21∼23절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경우에 우리 인간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이 읽을 때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속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가 듣기 싫은 말씀이라도 이 말씀을 통해서 얼마나 복음이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합니다. 아마 정신이 번쩍 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뜨끔뜨끔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서 먼저는 우리가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아울러 이제부터는 정말로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하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반드시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나타난다는 것을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겠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쭉 풀이하겠습니다. 18절 말씀을 같이 읽어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문장이 조금 복잡합니다. 제가 간단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라는 것이 주어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게 되는데 누구에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왜 나타납니까?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 때문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서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타나나니”가 동사입니다. 중간에 있는 것을 다 빼버리고 주어와 동사를 연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죄인이면서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롬 1:17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18절에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지 아니하면 여러분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납니까?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서”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무엇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반대로 죄에는 무엇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간과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에게 죄 값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큰 죄든지 작은 죄든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티끌 만한 죄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죄값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어떠한 죄에 대하여서라도 그러시겠다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 인간이 짓는 죄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경건치 않음이고, 또 하나는 불의입니다. 경건치 않음은 수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짓는 죄입니다. 그리고 불의라고 하는 것은 수평적인 죄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짓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두 개의 돌 판에 기록하셨습니다.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는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인간의 죄를 경건치 않음, 즉 하나님께 대한 죄와, 불의, 즉 인간에 대한 죄로 구분했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경건치 않음과 불의,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먼저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무엇을 먼저 기록했습니까? 경건치 않음이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가 불의, 즉 사람에 대한 죄보다도 우선합니다. 순서적으로 먼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수직적인 죄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해주었고 26절부터 32절까지는 수평적인 죄, 불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 못할 때 이런저런 불의의 죄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가려지면 어둠이 찾아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의의 태양 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할 때 우리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로 좇아온다고 했습니까? 하늘로 좇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불꽃같은 눈초리로 우리 인간 세계를 다 굽어살피고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은밀한 죄까지도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시고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실수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로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실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 좇아 나타나기 때문에 감히 인간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보려고 하거나, 도망치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엄두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인간이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겠습니까?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감당하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십니다. 의롭다고 인정해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직접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서 저들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19∼20절에서 말씀해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랬다고 핑계할 수 있느냐? 너희 속에 있는 양심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바라보아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나타나 보이고 있지 않느냐? 그럼에도 너희가 몰라서 믿지 못하고, 몰라서 죄를 지었다고 핑계할 수 있느냐? 입이 열 개라도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었습니다.
19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이는”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이미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직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혈육끼리는 딱 보면 알아차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것을 심어주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마음속에 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을 심어주지 아니하셨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성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으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죄를 지어보세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이 아픕니다. 왜 그렇습니까? 양심의 가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러다가는 매맞지.” 누가 매를 때리는 것입니까? “내가 이러다가는 벌받지.” 누구에게서 벌받는 것입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다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이미 심어주신 것입니다.
또 “천국이 어디 있어? 지옥이 어디 있어? 가봤어?”하고 따지고 드는 사람에게 “그래? 그럼 너 이 다음에 죽어서 지옥에나 가거라”고 하면, 막 화를 내면서 “내가 왜 지옥에 가느냐?”고 달려들 것입니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처럼 내 마음속에는 양심의 도덕률이 빛나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개 두 가지 경우에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첫번째는 위급한 경우를 당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아이구 하나님 맙소사!”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습니다. 두번째 경우는 어떤 때이겠습니까?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늘 한 주에 한 번 대대 장병들이 연병장에 모입니다. 대대장의 훈시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때 태극기가 올라가면서 애국가를 부릅니다. 저는 애국가를 부를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몰라요. 그래서 대대의 장병들 가운데 제일 큰소리로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가사가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누가 우리 나라를 보우하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보우하사.” 중들도 애국가를 부를 때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당도 애국가를 부를 때는 하나님이 보우하사라고 합니다. 산신령이 보우하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이 보우하사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나라에 복을 주실 수밖에 없지요. 우리 나라 애국가가 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저는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제일 큰 소리로 부릅니다. 아쉬운 것은 애국가를 다 부르고 나서 딱 한 마디만 집어넣었으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넣었으면 좋겠습니까? “아멘.” 그 소리만 더 넣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 소리가 빠졌는지 참 아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에 양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외적인 세계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들이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만물 속에 분명히 보이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해주었습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알기 쉽게 설명해봅니다. 어떤 젊은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러 작품을 완성해서 화랑에 전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멋있다! 구성이 잘 되었다! 명암처리가 참 잘 되었다!”고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한 중년 여인이 화랑에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은 그림을 한 점 한 점 깊이 응시를 하더니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 여인이 누구였겠습니까? 그 젊은 화가를 키워낸 화가의 홀어머니였습니다. 왜 어머니가 감격해서 울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에 남달리 감격해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작품, 온 우주만물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 우주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살아 숨쉬는 숨결을 더욱 뜨겁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속에서도, 숲속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의 노래 소리에서도,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높고 위대하신 신성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찬송가 40장 1절만 한번 불러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높고 위대하신 신성을 깨달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멋지게 그린 그림이나 아주 멋지게 만든 조각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동하기도 하고 찬사를 아끼지 아니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비싼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사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 그와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작품인 이 우주만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모른 체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분명히”라고 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의로 진리를 막기 때문에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입이 열 개 있어도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다 사랑합니다. 반대로 자식은 부모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어릴 때 자기가 자랐던 동심이 깃들어 있는 고향 땅을 그리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찌 타락한 인간들은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고, 어찌 타락한 인간들은 영원한 우리의 고향, 하늘 나라를 사모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입이 열 개 있어도 핑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번째로, 복음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하는지 21절 이하에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1절을 읽어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되”라고 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저 자기가 잘나서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이 어떠해진다고 했습니까? 허망하여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없으니까 그 생각이 자꾸 헛된 것만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누구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분명히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누구를 위해서 만드셨습니까? “너희는 정복해라, 다스려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우주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생각이 허망해서 이 우주는 빅뱅, 대폭발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 생각이 허망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그런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데 참된 지혜가 마음에 없으니 미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의 태양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없을 때 그 마음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22절을 보세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현대인들은 문명인이라고 자처합니다. 지성인이라고 자처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대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돼지머리를 삶아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돼지머리를 앞에 놓고 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복을 내려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지혜 있다고 하지만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23절에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하는지 우리들에게 적나라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으로 내려갑니까? 썩어질 사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무엇으로 내려갑니까? 금수로 내려갔습니다. 맨 밑바닥에 어디까지 내려갑니까?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꿉니다. 얼마나 한심합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도 영원불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썩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으로 대치했습니까? 썩어질 사람으로 대치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누가 서 있다는 것입니까? 인간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은 사람의 신상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처럼 숭배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일본의 천황을 신이라고 숭배했습니다. 김일성이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한 걸음 더 내려가서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금”이라는 것은 날짐승, 새입니다. 옛날 로마 사람들은 독수리를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은 황새라든지 매를 숭배했습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길짐승, 네 발 달린 짐승을 의미합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소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서 출애굽했을 때 광야에서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우리의 신이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신이라고 하면서 절을 했습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소를 신으로 숭배합니다. 그래서 소를 잡지 않습니다. 심지어 인도 사람들은 쥐조차도 신으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인도에 가면 쥐가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인도에 흑사병이 돌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쥐를 잡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모습들입니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일 밑바닥의 버러지를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추하고 더러운 버러지를 신으로 섬기는 모습으로까지 전락해버렸습니다. 버러지는 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뱀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코브라를 자기들의 신처럼 숭배했습니다. 심지어 애굽 사람들은 더러운 오물 속에 살고 있는 딱정벌레가 자기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애굽에 가면 딱정벌레 모양을 만들어서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팔고 있습니다. 얼마나 한심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썩어질 인간으로 대치했습니다. 새의 형상으로 대치했습니다. 짐승의 형상으로 대치했습니다. 나중에는 추하고 더러운 버러지 형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으면 그와 같이 우상을 섬기는 모양으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럽고 추한 버러지를 섬길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변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이 언제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때입니다.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섬길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고 거룩함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경우에 어떻게 되는지 세 가지로 말씀해주었습니다. 첫째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아무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번째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인간은 저절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지옥에 가면 “걸걸걸!” 하는 소리로 야단법석을 떨 것이라고 합니다. “걸걸걸!”이 무슨 소리입니까? 웃는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그때 예수 믿을 걸.” “내가 그때 교회에 다닐 걸.” “내가 그때 회개할 걸.” 뉘우치는 소리로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때 가서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미 때는 늦으리입니다. 기회가 다 지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복음을 다 받았습니다.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다 받으셨습니다.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옷입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혼자만 간직하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을 땅 속에 파묻어둘 생각은 하지 마세요. 복음은 나누어주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내 부모 형제,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수 있는 복된 이 한 주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와 자비가 한량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저희들에게 복음을 허락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만 입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어찌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다 찬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만분지 일이라도 갚는 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우리들에게 허락해주신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일인 줄 압니다. 주여, 우리 입술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영혼 구원의 열정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전도의 문을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무관심하지 말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셔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붙들어주옵소서. 이 한 주간도 그냥 보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우리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믿으세요.’ ‘교회에 나오세요.’ ‘믿고 살 길을 찾으세요.’ 단 한 마디라도 좋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의 빚을 갚을 수 있는 우리 승동의 가족들이 다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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