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복음을 방해하는 자(2:1-5)
사도 바울은 롬 1:1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일평생 동안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했습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고 복음을 위해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곧 이어서 사도 바울은 롬 1:2 이하에서 그러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이것을 우리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쉽게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주홍빛보다도 더 붉다 할지라도 깨끗하게 다 사함 받고 심판주 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서 처형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모든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겁니다.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고 죽게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모든 죄에서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하시고 영원한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잇게 하시며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 이것보다도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지난 주일에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운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끄러운 욕심에 자기의 몸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적으로도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실한 마음대로, 부패한 마음대로 온갖 합당치 못한 일을 자행하게 되어서 도덕적으로도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들에 대해서 이미 정해놓으신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형입니다.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외에 다른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를 생각해보세요. 4명 가운데 아직도 3명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사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복음을 대적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두 종류의 사람을 우리들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첫째가 1∼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과 스도이고 학파와 같은 도덕주의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 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판? 웃기고 있네.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인생을 즐기기나 하자.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건강할 때 마음껏 인생을 즐기는 거야.” 행 17:18에 나오는 에비구레오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5절에서 무엇이라고 저들에 대해서 경고를 하고 있습니까?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이런 말입니다. “너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면서 너희가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노의 그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너희에게 나타나는 그날, 너희가 쌓아놓았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한꺼번에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각오해라.”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자기를 의롭다 여기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심판을 아예 무시하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복음을 대적하는 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행여 내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요소는 없는지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서 알게 모르게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오고 있지는 아니했는지를 한번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모습에서 이것이 발견되면 더 늦기 전에 즉시 돌이키고 회개하시는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3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1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앞에 있는 말을 요약해서 받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하반부에서 종교적으로,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1:32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바가 있는데 그것이 사형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이런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마음속에 찔리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워야 합니다. 얼굴이 뜨끈뜨근해지면서 수치스러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 흘리면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하는 찬송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엉뚱한 한 부류의 사람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했습니다. “그런 쓰레기같은 인간들은 죽어야 해.” 이와 같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을 했습니까? 무론 누구든지, 즉 네가 판단을 받는 사람이든지, 판단하는 사람이든지, 유대 율법주의자에 속하든지, 이방 도덕주의자에 속하든지 누구든지 관계 없이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괜찮아. 나는 상관없어. 왜냐하면 나는 본질적으로 그런 죄인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내게 결코 임하지 못할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일을 행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제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봅니다. 저의 집사람이 보기에는 참 얌전한 것 같아도 재주가 상당히 많은 사람입니다. 아들만 셋을 두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에 셋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재주가 좋습니까? 큰아이와 둘째아이는 쌍둥이입니다. 한날 한시에 낳았습니다. 지금 중학교 2학년입니다. 방학이 되었습니다. 늘 같이 붙어 있으니까 까불고 장난치고 서로 떠들면서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집사람이 속이 상해서 이런 궁리를 했습니다. 둘 중에 한 녀석을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로 보내서 공부를 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아이만 집 근처에 있는 독서실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큰 아이는 집에서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큰아이가 심술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왜 자기는 독서실에 보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동생을 판단하면서 말합니다. “엄마, 걔가 독서실에 가 있다고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아세요? 한번 가보세요. 틀림없이 낮잠을 자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을 거예요.” 그것을 자기가 어떻게 알아요? 바로 자기가 그렇게 해보았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알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 동생을 판단함으로써 결국은 자기가 지금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다 똑같은 죄인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가 있습니까? 오십 보 백 보인데요. 우리 인간은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로마서 1장에서 말하는 종교적으로,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판단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을 보지 못하니까 사람의 판단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편견에 의해서, 선입견에 의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로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언제나 사람의 속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죄까지도 하나님은 남김없이 다 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로 진리대로 이루집니다. 마음속으로만 죄를 지었다고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하나님의 판단은 의로우신 판단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3절에서 다시 한번 판단하는 사람이나 판단받는 사람이나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강조해주었습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똑같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을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봅니다. 저들은 이방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사람이 만든 조상의 유전을 지키느라고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대로 범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나, 유대인들이 사람이 만든 조상의 유전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같은 죄입니다.
유대인들의 성적인 면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저들은 순결을 지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간음하다가 붙들린 여인을 개 끌듯이 예수님에게로 끌고왔습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소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는 죄 짓지 아니했느냐? 너희는 마음에 한번도 간음죄를 짓지 아니하였느냐? 자신 있으면 어디 돌을 들어 던져보라.” 이러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모두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높이 들었던 손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뺑소니치고 말았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똑같은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덕적인 면을 생각해보세요. 겉으로 보기에는 번지르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온갖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불쌍한 과부의 가산을 꿀꺽 삼키고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습니다. 죄인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잔칫집에 가면 언제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기도할 때는 외식적으로 남에게 보이면서, 남이 들을 수 있게 길게 기도했습니다. 구제할 때 자기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니까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살인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3절 마지막 부분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논리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삼단논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로, 남을 판단하는 자도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결론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쉽게 남을 판단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설교는 아무개가 꼭 들어야 하는데, 그 아무개가 어디 있나.”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기를 스스로 의롭게 여겨서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매일매일 짓는 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매일매일 죄를 짓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남을 판단하는 죄까지 지어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뽑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면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결국은 복음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아예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4절에서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혹,” 다시 말해서 “또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행위도 복음 전파에 막대한 지장을 주지만, 그것 못지 않게 복음 전파에 큰 지장을 주는 요소가 또 한 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그 한 가지 요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4절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에게 풍성하게 있는 것 세 가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무엇이 풍성하다고 했습니까? 첫째는, 인자하심이 풍성하고, 두번째는, 용납하심이 풍성하고, 세번째는,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인자하신 분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햇빛을 허락해주실 때 선한 사람에게만 허락해주시지 아니했습니다. 악한 사람에게도 따뜻한 햇볕을 똑같이 공급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단비를 내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단비를 허락해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에게는 용납하심도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용납과 용서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는 모든 죄를 다 사해주는 것이 용서이고, 용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잠시 보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못된 놈!”하면서 귀싸대기를 한 대씩 올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뺨에 살점이 남아 있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뺨에 아직도 살점이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납하심이 풍성하신 연고인 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하나님에게는 길이 참으심도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아무리 하나님의 용납하심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하루나 이틀로 끝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 년을 하루같이 참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타락한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기를 120년 동안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제가 한번 물어봅니다. 여러분께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다고 했는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풍성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4절 상반부에 그 답이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어디로 인도하는 것입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세 가지 풍성하신 것을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목적은 회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하나님은 용납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길이 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 17:18에 나오는 에비구레오 학파는 쾌락 중심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에비구레오 학파는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짓밟고 멸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쁜 짓인지 뻔히 알면서도 “내가 죄를 짓더라도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겠지”라고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반복해서 짓는 우리가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은근히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경견하게 잘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겠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반드시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의로우신 판단입니다. 심은 그대로 반드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세번째로, 5절 말씀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복음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하면서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천만에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까?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행에 가서 적금을 부을 때를 생각해보십시다. 정해진 기간 동안 매달 얼마씩 일정 금액을 적립을 하면 나중에 목돈으로 돈을 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정해진 때에 한꺼번에 타게 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해진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날입니다. 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무섭게 나타나는 날입니다.
우리가 적금을 들 때 매달 부은 금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중에 많이 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양은 무엇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고집 피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집을 피우면 피울수록 나중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서, 회개치 아니한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의 양도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집 피우지 마세요. 고집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길을 행할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길이 험하다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저들은 임자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불뱀을 보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울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높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누구든지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리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믿는 마음으로 쳐다본 사람은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고집을 피우면서 독사에게 물렸으면 칼로 상처를 찢어내고 피를 빨아내고 거기다가 약초를 발라야 살지 그까짓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겠느냐고 고집을 피우면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남김없이 다 죽었습니다.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요 3:14~15에서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골고다 언덕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피흘리고 죽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리 악독한 죄의 병에 걸렸다 할지라도 다 용서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지옥불 속으로 던져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집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집 때문에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이 나쁜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고집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노의 그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그에게는 무서운 진노가 한꺼번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농촌에 두 농부가 서로 이웃을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농부는 하나님을 믿는 농부를 언제나 아니꼽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꾸 자기에게 와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고, 안 믿으면 무서운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간다고 하니까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어느해 가을철이었습니다. 수확을 다 하고 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농부가 지방 신문에 글을 투고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농부다. 나는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게 살아왔다. 봄이 되면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땀을 흘리면서 그것을 잘 가꾸어서 가을철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내 생각에 내 이웃에 사는 예수 믿는 농부보다도 훨씬 더 많이 수확한 것 같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한 가지 분명히 느낀 것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며칠 뒤에 똑같은 신문의 똑같은 난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예수 믿는 농부가 쓴 글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10월의 결산 한 번만 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두고두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 때문에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면서 지금도 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의 그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모든 진노가 한꺼번에 임하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산이여, 바위여. 우리 위에 떨어져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워다오.” 그러나 아무리 고통 가운데 소리쳐도 그때는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의롭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즉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한번 묵상해보시고 특별히 오늘 본문 가운데서 “너”라고 하는 2인칭 대명사가 모두 몇 번 사용되었는지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모두 몇 번 나왔습니까? 아홉 번 나왔습니다. 몇 번 나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손가락질하면서 “네가,” “네가”하는 네가 과연 누구입니까?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판단하는 네가 과연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면서 계속해서 좋지 못한 죄를 반복해서 짓고 있는 네가 과연 누구입니까? 고집 피우면서 뒤돌아서야 할 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네가 과연 누구입니까? 혹시 우리들은 아닙니까? 나 자신이 아닌지 한번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쌓지 마십시다. 그리고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남을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은 것이 있거든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다 풀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무시하지 마세요.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짓지 마세요. 고집 피우지 마세요. 잘못된 길에서 속히 뒤돌아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 위에 굳게 서서 이 복음을 붙들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모습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복음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저희들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의 결과인 것을 잊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며 자고해서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저희가 서지 않도록 저희를 붙들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멸시하면서 하나님 미워하시는 죄를 너무나도 쉽게 반복해서 짓는 자리에 들지 않도록 저희를 붙들어주시옵소서. 우리의 잘못된 고집을 꺾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즉시 회개하고 뒤돌아설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주변에는 아직 고집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는 일들을 즉시 중단할수 있도록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들에게 은총을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승동의 권속들의 가족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은혜를 속히 허락해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승동의 가족들 모두가 복음 위에 굳게 서서 복음에 합당한 삶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모습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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