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1:24-32)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만 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그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만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사람이 복음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저절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서 우상 숭배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가 무엇인지, 타락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강조해주고 있는 말을 찾아보겠습니다. 여러분,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어서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넘어가서 28절 말씀을 보십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하나님께서 인간을 단념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내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봅니다. 자식이 부모의 속을 썩입니다. 처음에는 말로 잘 타이릅니다.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매를 때립니다. 그런데도 끝끝내 듣지 않습니다. 부모의 화가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럴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가! 더 이상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네 마음대로 해!” 이것이 바로 진노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부모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물며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끔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그때는 사탄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의 자식, 지옥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에게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결국은 단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해라.”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가룟 유다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이 듣기 싫으니까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결국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매달았습니다. 땅에 떨어졌습니다. 배가 갈라지고 창자가 터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났습니다. 가정을 떠났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극구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단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은 모든 것을 싸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멀리멀리 떠나가버렸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버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에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섭이 사라지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수중에 있는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돼지를 쳐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배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돼지가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로 배를 채워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돼지가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로 배를 채웠으니까 돼지보다 못한 신세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생은 돼지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들은 뉘우쳤습니다. 회개했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만일 이 아들이 십 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고 50년이 넘도록 아버지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돼지 옆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고 말았겠습니까? 버림받은 아들, 내버려진 아들, 포기된 아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늦기 전에 즉시 뒤돌아서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저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내버려질 수밖에 없고, 또 그러한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타락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우리들에게 폭로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타락할 수밖에 없는 추한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우리들에게 설명을해주었습니다. 첫번째가 24∼25절에 기록되어 있는 종교적 타락입니다. 두번째는 26∼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적인 타락입니다. 마지막 세번째가 28∼3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도덕적인 타락입니다.
인간의 추악하고 타락한 모습을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먼저는 이 못난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이모저모로 간섭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시고 감격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행여 내 삶의 모습 속에서 오늘 사도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은 타락한 모습들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즉시, 늦지 않게 그 자리에서 떠나서 되돌아서시는 귀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종교적인 타락을 보겠습니다.
24∼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라고 하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말씀을 다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마음을 심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아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마음,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정욕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운 죄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인간의 죄 가운데 가장 더러운 죄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을 보면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번째 계명은 무엇입니까?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짓는 죄 가운데 가장 더러운 죄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자기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운 죄, 우상숭배하는 죄에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더러운 우상을 섬기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기 몸을 욕되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에는 수많은 이방신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린도에 있는 큰 신전에는 창기와 미동들(남자 창기)이 천 명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종교의식을 행한다는 구실하에 저들은 육신의 쾌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음란한 일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기의 육신을 서로간에 욕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그러한 종교적인 타락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종교적인 타락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를 무엇을 바꾸었다고 했습니까?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거짓된 우상으로 바꾸어서 섬겼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오늘 본문 앞에 있는 23절에 나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서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썩어질 사람이라든지, 금수라든지, 버러지는 다 피조물입니다.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이와 같은 피조물들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유일하게 섬기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25절 끝부분에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여기서 말하는 “주”는 앞에 나오는 조물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가 찬양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생명 걸고 목숨 걸고 우상숭배와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다니엘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팔이 울려퍼지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금신상 앞에 꿇어엎드려 경배해라.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풀무불에 집어던지리라.” 드디어 나팔이 울려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금신상 앞에 꿇어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달랐습니다. 고개를 까딱하지도 않았습니다. 왕 앞에 붙들려 왔습니다. 왕이 호통을 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아니했습니다. 비록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우상숭배에 대항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도 그러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의 천황을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들에게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때 주기철 목사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드리리이다. 드리리이다. 이 목숨만이라도 주님께 드리리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섬길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성적인 타락을 살펴보겠습니다.
26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를 인하여”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타락의 결과로 인하여”라는 말입니다. 종교적인 타락이 오면 성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셨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운 욕심이 무엇인지 사도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럽고 설명하기도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명을 보십시다.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썼다고 했습니다. 순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거스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역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한 남자에 여러 명의 여자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한 여자에 여러 남자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두 남자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두 여자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둘을 짝지워서 가정을 이루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여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거스르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이것을 설명해줍니다.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제가 물어봅니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동성연애라고 합니다. Homosex라고 합니다. 성적인 타락 가운데 가장 추악한 모습이 바로 이 동성연애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레 20:13에 보면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는 자는 둘 다 하나님 앞에 가증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둘 다 살려두지 말고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동성연애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일이 됩니까? “신이여, 나는 당신보다 더 낫소. 당신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살게 했지만 나는 남자로 여자를 만들 수 있고 여자로 남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당신보다 더 낫소.” 이렇게 항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증스런 일입니까? 살려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신약 성경 고전 6:9 에 보면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심은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이즈(AIDS)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후천성 면역결핍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에이즈를 “아! 이제 다 살았다!”는 말의 약자라고 말들을 합니다만 에이즈에 걸리면 살 길이 없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에이즈가 무엇의 결과입니까? 동성연애의 결과가 아닙니까? 자기가 심은 그대로 다 받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인간들에게 이런 성적인 타락이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 못할 때 인간은 성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인들 제대로 지킬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쓰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초기 로마 황제 15명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 14명이 모두 동성연애를 즐겼다고 하는 조사가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 사회는 성적으로 아주 타락했습니다. 황제뿐 아니라 귀족들, 심지어 밑바닥에 있는 노예들까지도 동성연애를 즐겼다고 합니다. 뒤에 콘스탄틴 황제가 즉위했습니다. 그는 다른 황제들과는 달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로마를 성적인 타락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다, 이거다. 기독교를 공인하자. 기독교를 전파하자.” 그렇게 해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감동을 받고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처음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배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순결한 삶에 감동을 받고 마음이 움직여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혼인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침소를 더럽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더럽히고 간음하는 자, 음행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거든 즉시 뉘우치고 회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세번째로, 도덕적인 타락을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28절 이하에서 도덕적인 타락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타락한 인간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니까 귀찮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쫓김을 당한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28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내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까?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고 했습니다. 상실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 말은 금속학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어떤 금속에 불순물이 너무나도 가득 차서 가치를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금속으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보실 때 너무나도 지저분하고 더럽고 불결해서 전혀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타락하고 부패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어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옳지 못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9절 이하에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스물한 가지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정말 악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악이 악을 낳고, 악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본문에 기록된 21가지 죄목들을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디에 해당되는지, 내가 해당되는 것은 이 21가지 중에서 몇 개나 되는지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꼽아보시기 바랍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불의, 여러분은 지금 의롭고 바르게 살고 있습니까?
추악, 여러분에게는 더럽고 악질적인 성품은 없습니까?
탐욕, 혹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의가 가득한 자, 다른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악한 생각 때문에 괴로웠던 적은 없습니까?
시기,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살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분쟁, 남과 다투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기, 다른 사람을 속인 적은 없습니까?
악독이 가득한 자, 복수심에 불타고 있지는 않습니까?
수군수군하는 자, 다른 사람의 흉을 즐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방하는 자, 다른 사람을 욕하고 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 하나님이 미워하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능욕하는 자, 다른 사람의 인격을 짓밟아버린 때는 없습니까?
교만한 자, 여러분은 과연 겸손하십니까?
자랑하는 자, 혹시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나는 아닙니까?
악을 도모하는 자, 다른 사람과 함께 악한 일을 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를 거역하는 자, 부모님의 말씀에 여러분은 순종하고 있습니까?
우매한 자, 어리석고 미련해서 하나님을 알고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는 않습니까?
배약하는 자, 약속을 제대로 잘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용이 생명입니다.
무정한 자, 혹시 다른 사람에게서 무정하다고 원망 들을 일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무자비한 자, 여러분은 이웃에게 사랑을 잘 베풀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 21가지 가운데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것은 과연 몇 가지입니까? 직접, 간접으로 우리에게 다 해당되는 죄악들인 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32절에서 타락한 인간들이 어느 정도까지 추악한지를 우리들에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다 같이 읽어봅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양심을 통해서, 본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합리화시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나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데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하면서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까지도 두둔하는 추악한 세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성연애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공식적인 통계로 30만 명 이상이 동성연애자라고 합니다. 은밀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동성연애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시장으로 출마하는 사람이 동성연애를 두둔하지 않으면 시장으로 당선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다 썩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동성연애자들끼리 모인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들까지도 타락해서 동성연애를 신학적으로 옹호하는 썩어빠진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인간들이 이와 같이 타락하고 말았습니까?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문제의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28절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마음에 온갖 정욕들과 더러운 죄악들이 가득 찰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내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다닌다고는 하지만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실한 마음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마음을 우리들에게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인간들이 얼마나 타락하게 되는지 우리들에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인간의 추하고 타락한 모습들은 남김없이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이것보다도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지은 죄가 아무리 주홍빛보다도 붉다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은 우리 죄를 흰 눈보다도 더 희게 씻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롬 8:1∼2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부패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죄의 유혹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지금까지 도와주신 것처럼, 임마누엘로 지금도 같이 해주시고, 여호와이레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며, 여호와닛시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귀한 믿음을 붙드시고 오늘도 내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시는 복된 여러분의 삶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저희들을 내버리지 아니하시고 저희들에게 복음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우리의 죄가 주홍빛보다 붉다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시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 마음 중심에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을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거룩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복 내려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남은 삶 동안에 모든 시험을 다 물리치고 하나님의 자녀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승동의 권속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추천 설교 > 박상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마서강해/제8강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2:6-11) (0) | 2016.12.01 |
---|---|
[스크랩] 로마서강해/제7강 복음을 방해하는 자(2:1-5) (0) | 2016.12.01 |
[스크랩] 로마서강해/제5강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1:18-23) (0) | 2016.12.01 |
[스크랩] 로마서강해/제4강 나의 열매는 누구인가?(1:13-17) (0) | 2016.12.01 |
[스크랩] 로마서강해/제3강 바울에게서 배운다(1:8-12) (0) | 2016.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