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욜 2:21-27
요엘서는 메뚜기 떼로 인한 대재앙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메뚜기는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려 주는 곤충입니다. 여름 방학이면 논두렁 밭두렁에서 방학숙제로 곤충채집할 때 단골로 잡던 곤충입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던 생각도 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메뚜기는 정겨운 곤충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메뚜기는 때로는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무서운 곤충입니다.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남쪽 하늘에 작은 먹구름이 이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부채꼴로 퍼지며 온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온통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는 곳은 모두 졸지에 누런 황무지로 돌변한다. 아낙네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고,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와 싸웠다.”
이것은 펄벅이 중국에서 직접 체험했던 장면을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은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30일에 러시아 남부에서 이런 메뚜기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셀 수조차 없을 정도의 엄청난 메뚜기 떼가 날아와 러시아 남부 곡창지대를 초토화시킨 것입니다. 현지를 촬영한 기자는 마치 강력한 황사가 몰려온 것처럼 누런 메뚜기 떼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지구의 종말이 온 것 같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런 메뚜기 떼의 습격은 그야말로 대재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에 이와 같은 메뚜기 재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치 짙은 구름이 가득 몰려와 한 낮이 어두운 밤이 된 것처럼 하늘 가득 메뚜기 떼가 날아왔습니다. 저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밭이 황폐화되었고, 토지가 말랐고, 모든 과실나무들은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요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1: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 지어다” 그리고 2:12를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한 마디로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 기도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메뚜기 재앙을 당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와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엘 선지자의 말씀 선포에 어떻게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2:18을 보면 요엘 선지자의 말씀 선포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태도를 바꾸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와 회개했고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점은 2:19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를 받으시고 또 그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하나님의 응답이 있은 후에 요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엘 선지자는 도대체 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2: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메뚜기 재앙을 당하여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간절히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12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저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노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이라는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매를 맞은 뒤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와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태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보이신 반응이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그 모습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저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가득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시 103:13-14을 보면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해줍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부모는 못난 자식 때문에 때로는 실망도 많이 하지만 그 자식이 불쌍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부모는 죄짓고 교도소에 수감된 자식 때문에 화가 나고, 사람들이 죄수라고 손가락질해서 부끄럽고 속도 상하지만 그 자식이 불쌍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도 그러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에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 때문에 때로는 실망스럽기도 하시지만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서 화가 나시지만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명성교회 원로목사님이 되신 김삼환 목사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신학교 시절 폐병을 심하게 앓았답니다. 신학교 졸업반 때 설악산으로 졸업여행을 갔답니다. 일정에 따라 설악산 등반을 하게 되었는데, 당신은 건강 때문에 산에 오를 수가 없어서 혼자 숙소를 지키게 됐답니다.
그래서 혼자 숙소에 남아서 학우들이 돌아올 때까지 찬송만 불렀답니다. 그때 4시간 동안 같은 찬송을 반복해서 불렀답니다. 그 찬송이 407장이랍니다. 특히 3절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 때도 같이 하사”라는 소절을 반복해서 부르며 울고 또 울었답니다. 그리고 4절 내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네“ 부분을 반복해서 부르며 하나님께 병을 고쳐주시고 강건하게 목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당신이 믿기는 이때의 눈물과 이때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 후 병도 고쳐주시고 목회도 크게 잘 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할 때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로 기도할 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엄마 아빠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 그리고 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앞의 부대는 동해로 그 뒤의 부대는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또한 2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메뚜기 떼를 그 땅에서 몰아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피해 본 것을 그 이상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자기들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던 메뚜기 떼가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는 동쪽 바다 즉 사해 쪽으로 사라지고, 또 나머지는 서쪽 바다 즉 지중해 쪽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밭과 과수원이 되살아나고 풍족한 소출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저들은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하고 너도 나도 찬양을 합니다. 성전에 올라가 찬양합니다. 밭에서 일하며 찬양합니다. 과수원에서 과일을 거두면서 찬양합니다.
성경에 제일 먼저 나오는 찬양이 출 15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내용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미리암이 찬양한 내용도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찬양을 하게 된 이유가 특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모세의 인도 하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저들이 막 광야가 시작되는 에담이라는 곳에 장막을 치고 머물렀을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나 저들을 인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명을 따라 저들이 홍해 바닷가 바하히롯 앞에 장막을 치고 머물러있었습니다. 이 때 바로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바로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다급한 상황입니다. 저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응답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5-16)
모세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홍해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육지처럼 걸어서 건넜습니다. 그리고 따라오던 애굽의 군대는 다시 합쳐진 바닷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저들이 다급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놀라운 일을 겪은 뒤 얼마나 놀랐을까요? 하나님께서 명하지도 않으셨는데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찬양의 책입니다. 이 모세의 찬양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양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간증이 담긴 노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응답하셨다는 체험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부르짖을 때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찬양을 부르게 하십니다. 간증의 노래, 체험의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
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한 마디로 말하면 앞으로의 꿈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는 영적인 꿈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이런 꿈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기들은 메뚜기 떼의 습격에서 벗어났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됐고 사회도 안정됐습니다. 더 이상 크게 바랄 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장차 미래에 일어날 일을 꿈꾸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먹고 사는 문제, 오늘 당면한 문제 이상의 것을 꿈꾸게 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저들은 처음에 당황했을지 모릅니다. 사실 이 꿈은 자신들의 소원 그 너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분하게 말씀을 묵상하게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꿈을 꾸게 하시는가? 그러면서 이런 꿈을 꿀 수 있음이 은혜요 특권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침편지를 주관하고 있는 고도원이라는 분이 쓴 [꿈 너머 꿈]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백만장자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백만장자가 된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바로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꿈 너머 꿈이다.
꿈이 있으면 행복해지고,
꿈 너머 꿈이 있으면 위대해진다.
그렇습니다. 꿈은 우리가 꿀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참 많은 사람들이 이 꿈마저 포기한 채 살아가기에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꿈 너머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의 꿈을 꾸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저 고기를 많이 잡아 걱정 없이 살아보는 꿈을 꾸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꿈입니다. 이 꿈이 베드로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평범할 인생이 위대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사울 시절 개인적인 입신양명을 꿈꾸며 살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유학까지 와서 공부했고, 출세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꿈입니다. 이 꿈이 바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평범할 인생이 위대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꿈 너머의 꿈을 꾸게 하십니다. 스스로 꿈을 꾸며 살던 사람들에게 꿈 너머의 꿈을 꾸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꿈 너머의 꿈을 향해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위대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찬양했던 것처럼 바울이 찬양했던 것처럼 차원이 다른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즐거워하고 기뻐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꿈 너머의 꿈을 꾸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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