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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나누는 사람들 딤전 6:18

그리스도인, 나누는 사람들

 

딤전 6:18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믿게 되면 참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나누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에 소개되고 있는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입니다. 행 2:44-4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교인들이 함께 모여 서로 자기의 것을 내어 놓고 함께 나누어 썼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나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이 땅에 처음 생겨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나눔이라는 점입니다. 누가는 이 나눔을 서로 교제하는 것보다 먼저 소개했습니다. 이 나눔을 예배보다 먼저 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은 교회 외에도 잘 하는 곳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교회 이전에 구약시대 성전에서도 잘 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눔을 제대로 실천하는 곳은 교회가 처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남달리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눔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한 마디로 말하면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고 나누는 일을 하는 ‘NGO’ 단체들은 대부분 기독교 단체들입니다.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단체들을 살펴보면 국제 기아대책기구,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컴페션, 해비타트, 홀트 아동복지회, 등 손으로 꼽기가 힘이 들 정도입니다. 이 단체들 모두 기독교 단체들입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생겨난 단체들을 살펴보면 한민족복지재단, 한국교회 희망봉사단, 안구기증운동협회, 다일복지재단, 밥상공동체, 기독교 세진회, 사랑과 행복나눔 등 역시 손으로 다 꼽기가 힘이 들 정도입니다. 이 단체들 역시 모두 기독교 단체들입니다.

 

  일전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신 유시민씨께서 목회자들 모임에 오셔서 강연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분은 기독교인이 아니시고 과거 기독교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셨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 뒤에 생각을 바꾸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어렵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곳을 살펴보니까 70% 이상이 기독교계통이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치 지향적 기독교 지도자들의 행태와 초대형교회들을 보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나누는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시 어려운 이웃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앞장 선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이티, 네팔, 아프가티스탄 같은 곳에 지진이 났다고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필리핀,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 태풍이나 홍수로 피해를 보았다고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길거리 노숙자들에게 제일 먼저 다가간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고, 미혼모와 탈북자 다문화 가정에 따뜻한 손길을 제일 먼저 펴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션 부부, 김장훈과 같은 ‘기부천사’라고 알려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해 보라고 하면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눔의 동기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기 전보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예수 믿기 전 보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나눌 것이 많이 생겼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 때문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살펴보면 저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가르침을 듣거나 3년 동안 가까이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서 달라진 것이라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저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성령을 받고 달라진 것입니다. 이 성령 때문에 과거와 달리 나눔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저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령 때문에 나눔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우리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분명히 당시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직 당시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처럼 이렇게 모두가 성령을 받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하셨고, 그리고 각 사람 안에 내주하셨습니다. 저들 모두가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체험했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 뜨거웠습니다. 자신들이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과거에 듣지 못하던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뜻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뜨겁게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 33:29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먹고 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와 마셨습니다. 도대체 그 누가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아들 예수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의 달려 죽게 하시고 부활하셔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까지 보내주셔서 이 땅에서 구원 받은 백성으로 능력있게 살게 해 주셨습니다. 도대체 그 누가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요? 저들은 강물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그 놀라운 사랑을 받고 감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을 자기들만 간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샘물이 솟으면 샘이 흘러 넘쳐서 주변을 적시고 시내를 이루어 흐르면서 주변의 많은 생명들에게 생수를 공급하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흘러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는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멀리는 땅 끝까지 그 사랑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고후 5:14을 보면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특성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강권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임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셔서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나눔의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바라고 나누는 것도 아닙니다. 더더욱 우리가 보람을 얻기 위해 나누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눔의 내용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나눌까요? 행 2장 45절을 보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가 필요한 사람에게 그 필요한 것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이 임하시고 난 후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저들은 자기의 필요만 보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난 뒤 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보이게 된 것입니다. 특히 스스로 자기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의 필요를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사람들에게 받은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랑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푸드뱅크 사역을 시작한 것이 2006년부터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교회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왔습니다. ‘사랑의 불씨운동’이라 해서 겨울철에 연탄배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쌀을 나누어왔습니다.

  쌀을 나누며 독거노인들의 가정을 방문해 보니 이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바로 식사를 위해 반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독거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몸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밥은 하실 수가 있어도 장을 보고 와서 끼니때마다 반찬을 만들어 드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반찬을 만들어 집에까지 배달해 드려야겠다고 시작한 것이 푸드뱅크 사역입니다.

  푸드뱅크 사역을 하면서 집을 방문해 보니 또 필요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주거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방안에 냄새가 나고 곰팡이도 설어있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루도 그 방안에 있을 수가 없는 집들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웃사랑나눔 바자회를 열게 된 것입니다. 도배도 해드리고 페인트도 칠해 드리고 창호도 손을 봐드리고... 1차 목표가 40가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눔은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입니다. 가진 것을 더 가지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전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나눔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이웃의 필요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이웃의 필요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행 6장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과부들을 매일 구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과부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당시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에 결혼 한 여자들은 철저하게 남편을 의지하며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여자들은 가사를 돌보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러다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과부들은 생계를 지탱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우선 교회 안의 과부들의 이런 필요를 채우는 일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변의 이웃들 가운데 스스로 자기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찾아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닿는 대로 나눔을 통해 그 필요를 채워주려고 해야 합니다.

 

나눔의 방법

   그리스도인들은 나누는 방법도 다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저들은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행 4:34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교인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눌 때 사도들에게 나눌 것을 가져왔고, 사도들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눌 사람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직접 전달했을 경우 전달하는 사람과 전달 받는 사람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모두가 다 주 안에 형제와 자매입니다. 모두가 대등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나눈다고 할 때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지속적이 될 때 그 관계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이 들 것입니다.

   우리가 요사이 흔히 쓰는 말로 ‘갑-을 관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의 관계를 말합니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를 받는 사람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사람이 대등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누는 사람은 ‘갑’의 위치에 서게 되고, 도움을 받는 사람은 ‘을’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눔에서 이런 관계의 왜곡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이 나섰습니다. 누가 누구를 도왔다는 식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게 한 것입니다. 나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도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이런 태도가 중요합니다. 교인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직접 개척교회나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부득이한 경우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교회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직접 전달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직접 전달하게 되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자칫 사탄이 틈을 탑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더 많은 기부를 하려는 마음 생깁니다. 어려운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보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일에 더 관심을 갖기 쉽습니다.

   실제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서 자기들의 이름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팔아서 얼마를 감추고 얼마만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리고는 전 재산을 다 팔아 드린 것처럼 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 지도자들이 이 점을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처단하게 하셨습니다. 자칫 초대 교회가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들어내면서 사탄의 미혹에 넘어질 것을 방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4절에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나눔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일이 돼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우리의 나눔이 늘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 아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반드시 깊으실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될 건대” “대통령!” “대통령 되면 아빠 뭐 시켜 줄건대” “탕수육!”

  이 아빠는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아들이지만 짜장면만 먹어본 녀석이 그래도 큰마음 먹고 탕수육시켜 준다는 말에 흐뭇했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넉넉한 마음으로 나누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 그들의 필요를 보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 안에 가두어 놓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나눔을 통해서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