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구원의 여정 그 마지막
딤후 4:6-8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면서도 가장 그 답을 찾기 힘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람은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에는 이 질문과 똑 같은 질문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에 정확하게 맞는 답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와 영혼이 분리가 됩니다. 요 19:30을 보면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주님의 육체는 남아있고, 그 영혼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죽을 때 육체는 이 땅에 남고 영혼은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다릅니다.
우선 믿는 사람들은 낙원이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눅 23:43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 중에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육체에서 분리된 믿는 사람의 영혼은 낙원으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영혼이 낙원으로 가게 되면 그곳에서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머물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며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잠정적인 낙원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죽을 때 육체를 떠난 영혼은 어둠의 곳 음부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역시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육체가 부활할 때까지 머물게 됩니다. 그러니까 잠정적인 음부의 저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면 상황은 또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살전 4:16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자들의 육체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그 육체는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혼과 연합하게 됩니다. 요일 3: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이 말씀대로 부활한 육체와 낙원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던 그 영혼이 다시 연합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변화된 존재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펼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서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 육체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음부에서 두려움과 고통가운데 기다리고 있던 영혼과 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던져져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영화란 무엇인가?
그러면 사람에게 죽음 이후에 앞에서 말씀드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미 구원이 하나의 여정처럼 연속된 과정이라고 말씀드려왔습니다. 구원의 첫 번째 여정으로 ‘칭의’를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칭의라 하는데 이 칭의가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미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과거의 사건입니다.
다음으로 구원의 두 번째 여정으로 ‘성화’를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미 칭의를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해져 가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것을 성화라 하는데 이 성화는 구원의 진행과정입니다. 지금 구원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이제 구원의 세 번째 여정이자 마지막 여정인 ‘영화’를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장차 구원이 완성되는 미래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말 그대로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그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인격 전체가 영광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영화롭게 변화될 때 그동안 죄로 인해 변질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상태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야 말로 구원의 종착점이자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보자 자세하게 말씀드려보면 이 영화도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변화입니다.
히 12:22-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 믿는 사람들이 죽음 이후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이미 그곳에 와 있는 믿는 사람들의 영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믿는 사람들은 죽는 순간 그 영혼은 육체를 떠나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즉 낙원으로 나아갑니다. 이 때 그 영혼은 영화로운 상태로 변화됩니다.
사람들이 죽는 순간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죄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알고 짓고 모르고 지으면서 죄로 얼룩졌던 그 영혼이 그 모든 죄악을 완전히 떨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을 그 성향마저도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의 첫 번째 사건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영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둘째, 부활 이후의 변화입니다.
요 5:28-2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들의 생명의 부활이란 무엇일까요? 고전 15:4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즉 믿는 사람들의 육체가 부활할 때 그 몸은 과거와 같은 육의 몸이 아니고 신령한 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신령한 몸을 빌 3:21에서 이렇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한 마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우리의 몸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체가 부활합니다. 이 때 우리의 육체가 영화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와 다른 신령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는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변화된 그 육체는 낙원에서 이미 영화의 과정을 거치고 기다리고 있는 영혼과 다시 연합하여 온전한 영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온전한 영화를 이루게 된 사람들은 우선 온전한 거룩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도 없고 그래서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영화를 이루게 된 사람들은 비로소 주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3:12절에서 꿈꾸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는 말씀 그대로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드디어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 가운데 영원토록 주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화는 어떻게 맞게 될 것인가?
그러면 이런 영화를 맞이하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 답을 알려줍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 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만 맞이하게 되는 구원의 열매입니다.
마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설명하시는 비유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36절 이하에 소위 ‘가라지 비유’가 나옵니다.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추수꾼들이 와서 가라지를 따로 거두어 불에 사릅니다. 그리고 알곡만 따로 거두어 갑니다.
43절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가 끝이 납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맞이하려면 추수 때에 알곡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알곡이란 무엇일까요?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말합니다.
지난 종교개혁성지순례 때 제게 가장 인상적인 곳은 체코의 타보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후스의 추종자들이 세운 도시입니다. 로마천주교와 맞서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얀후스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러 차례 로마천주교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다가 결국 장렬하게 산화해 갔습니다.
이곳에 당시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역사를 보존해 놓은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후스 박물관입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먼저 얀후스가 믿음을 지키다가 화형당하는 그림이 전시되어있습니다. 산채로 화형을 당하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도 카타콤이 있었습니다. 도시 땅 속에 또 하나의 지하 도시가 있었습니다. 미로 같은 땅굴이 끝없이 이어져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곳곳에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 심지어 가축을 기를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어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을 순례하면서 당시 체코사람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어떻게 싸웠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그냥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체코인들이 타보르에 모여 생명을 걸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처럼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박해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바로 사탄의 미혹과 싸워야 합니다. 편안함과 안일함 속에 영적으로 졸게 하는 사탄의 공격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가야 합니다.
둘째,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 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사도 바울은 장차 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모진 박해 중에서도 견디기 힘든 사역의 고단함 속에서도 그를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모진 박해 가운데 순교의 각오로 믿음의 삶을 이어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 같지는 않아도 오늘 우리가 믿음을 지켜가는 일도 힘겹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저 천국의 소망이 필요합니다. 이 소망이 있어야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떻든지 우리도 반드시 저 천국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합창곡 가운데 미국의 포스터가 작곡한 ‘올드 브랙 조’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은 합창 선율도 아름답지만 멜로디 자체에 포스터 특유의 서정이 담겨서 듣는 이나 부르는 이 모두 가슴이 뭉클할 정도의 감동을 받습니다.
한 번은 이곡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가사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포스터의 아내 친정에는 흑인 노예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조(Joe)였습니다. 참 성실하게 일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늘 포스터와 아내 제니가 타는 마차를 몰아주어서 포스터와는 가까이 지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포스트는 언젠가 이 늙은 조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야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래를 만들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노래가 완성되기 전에 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마음에 이 노래를 완성해서 조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나의 기쁨과 젊음의 나날은 지나가 버렸네. 목화밭에서 일하던 내 친구도 떠났네.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간 것을 나는 알고 있네. 그들이 부르고 있는 소리가 들리네. 올드 블랙 조. 나도 가리라. 곧 가리라. 그들의 상냥한 부름 소리가 들리네. 올드 블랙 조···. ”
포스터는 조가 노예로서 고달픈 인생을 살면서도 늘 주 안에서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가 소망대로 천국에 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조처럼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고달픈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버겁습니다.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인생의 짐이 너무도 무겁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겨내야 할 죄의 미혹이 너무도 거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들어갈 저 천국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저 천국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지금 성화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을 완성한 것은 아닙니다. 장차 우리가 죽음 이후 저 천국에서 온전히 영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변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체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결국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영화를 누리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믿음 잘 지키고 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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