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전하는 사람들
미 4:1-5
본문의 미가서입니다. 이 미가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를 통해 주신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미가는 주전 8세기 경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이 시기는 나라가 내우외환으로 큰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영적으로 피폐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앗수르라는 초강대국이 부상하여 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나라를 바로 인도하려고 힘썼습니다.
미가가 선지자로 활동할 때 또 다른 선지자들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 이사야와 아모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미가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우선 미가는 이사야와 대조적입니다. 이사야는 왕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학식도 뛰어나고 정치적인 배경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미가는 천한 가문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느 집안 출신인지 소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라셋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들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이 권력자들에게 어떻게 압박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나라가 왜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미가는 아모스와도 대조적입니다. 아모스도 미가처럼처럼 당시의 권력자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압제를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전한 예언의 메시지는 정의를 외치고 부정과 부패 그리고 우상숭배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미가는 달랐습니다. 물론 미가도 멸망을 예언하며 책망의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가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희망, 이스라엘이 회복될 희망, 그리고 정차 메시야가 오실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희망을 전한 미가 선지자를 만나 보겠습니다.
희망을 보다
오늘 본문은 미가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희망을 본 이야기를 기록한 것입니다. 우선 미가는 메시야가 오신 뒤에 펼쳐질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시온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다스리는 나라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많은 이방 민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참여하는 나라입니다. 다음으로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요가 가득하고 특히 전쟁이 없는 완전한 샬롬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희망을 보았던 당시는 절망이 가득한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그 누구도 희망을 보기 힘든 때였고, 그 누구도 희망을 이야기하기 힘이 들 때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가가 예언하던 시대에 그 땅에는 절망이 가득했습니다. 우선 나라가 둘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한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야곱의 12 아들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인 사람들이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이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미가 선지자를 비롯하여 많은 뜻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 속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입니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서 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 왕국 유다는 나으냐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북 왕국을 정죄하면서도 남 왕국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1:8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 이런 영적 타락상을 보며 역시 미가를 비롯하여 뜻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은 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문제는 앗수르의 위협입니다. 이미 앗수르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리고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변 약소국들을 침략하려고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앗수르에 맞설 나라가 없습니다. 게다가 남북이 분열된 상황에서 우선 북왕국 이스라엘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남왕국 역시 북왕국 다음 차례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국가 안보의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또한 미가와 뜻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절망의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가가 바라보는 당시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미가는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절망적 상황을 보면서도 절망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15세기 세종대왕 시대에 우리나라 천문학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천재천문학자 김담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답니다. 이 분은
간의대라는 당시 국립천문대에서 천체를 관측하여 우리나라 독자적인 역법을 확립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천체를 측정해서 1년의 길이가 365.2425일, 한 달의 길이가 29.530593일라는 것까지 정교하게 계산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종 29년(1447년) 8월에는 그달 그믐에 있었던 일식과 보름에 있었던 월식을 예측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천문 자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천문학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에 신기하기 짝 없습니다. 어떻게 하늘의 천체를 관찰해서 시간의 흐름을 그토록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계절의 흐름을 예측하며 또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 천문학자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문의 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절망의 시대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어떻게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며 그 속에서 희망을 볼 수 있을까? 미가 역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를 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DNA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DNA를 가진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다윗입니다. 다윗은 시 23:4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무엇일까요?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10년이란 긴 세월을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상황 속에서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주께서 함께 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하며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특별한 영적인 DNA입니다.
이것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영적인 DNA가 있습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한 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와 다른 영적 DNA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런 질병이 찾아와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굴러 떨어집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돼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참담한 실패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게 됩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은 고통과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원망합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 한다고 했는데 왜 제게 이렇게 가혹하십니까?”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서도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봅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는 주님 안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처럼 이렇게 외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DNA, 희망의 DNA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희망을 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영적인 DNA, 희망의 DNA가 더욱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전하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미가 선지자는 자기가 본 희망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입을 열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희망, 자기가 본 그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잭 캔필드라는 분이 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로 친한 친구 사이인 암 전문의 두 사람이 주고받는 간단한 대화 한 토막입니다.
한 의사가 자기 친구 의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도대체 이해가 안 돼. 자네나 나나 전이성 암 환자에게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만큼 똑같은 일정에 따라 똑같은 용도로 처방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나는 22%밖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네는 74%나 성공을 하지? 같은 전이성 암을 치료하는 데서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야. 자네,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그러자 친구 의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보게, 자네나 나나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만큼 처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전이성 암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은 에토호사이드(Etoposide),플라티눔(Plat -inum),온코빈(Oncovin), 하이드록쉬리아(Hydoxyurea), 이 네 가지뿐이야. 나도 자네가 처방하는 그대로 환자에게 처방하고, 똑같은 약을 주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아마 틀림없이 그 약을 줄 때 환자에게 '이 약은 어제도 먹은 에포(EPOH)라는 약입니다.'라고 말할 거야" 여기서 에포(EPOH)란 그들이 처방한 네 가지 약의 첫 자를 딴 말입니다. 그는 계속 말합니다. "아마도 자네는 이 에포(EPOH)를 열심히 드시라고 말하며 약을 줄 거야. 하지만 나는 통계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별로 많지 않은 환자들이지만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 말을 거꾸로 바꾸어 약을 주네. 여기 당신의 호프(HOPE)가 있습니다. 이 약을 열심히 드세요. 그러면 당신도 희망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그냥 약만 처방했고, 다른 한 사람은 약과 함께 희망도 처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랍도록 달랐다고 합니다. 그냥 약만 처방한 사람의 환자는 10명 중 7명이 죽었지만 약과 희망을 함께 처방한 사람의 환자는 10명 중 7명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희망을 전하는 사람과 희망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상황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은 희망을 전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전하지 못합니다. 이 한 가지 차이가 너무도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망하는 시대에 희망을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본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보고만 계시지 않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답답한 현실만 보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희망을 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 당시 홍해 앞에서 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 14:14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사들이 추격해 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절망하고 있을 때 모세가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희망은 우리가 만들어갈 희망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변화로 만들어질 희망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펼쳐질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일하실 것이다.” 이 말씀 안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미가 선지자는 샬롬의 희망을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고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라고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그칠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농부들이 마음 놓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때문에 늘 불안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는 전쟁에 대한 공포입니다. 계속되는 남북 간의 분쟁과 주변 강대국들의 침공 때문에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업에 대한 불안입니다. 권력자들의 핍박과 강도의 약탈 때문에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에게 샬롬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가는 샬롬의 희망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땅에 전쟁이 그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편히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도 미가가 전한 샬롬의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국가 안보를 지켜주실 것을 믿고 그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의 그 날을 허락하실 것을 믿고 그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선진강국으로 서게 될 것을 믿고 그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각 개인들도 하나님께서 샬롬의 날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고 그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한 마디로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도무지 앞날을 예측하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절망의 시대에서도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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