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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 갈 5:1

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

 

갈 5:1

 

  서커스 단 가운데 ‘코끼리 쇼’를 하는 곳이 있습니다. 거대한 코끼리가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쇼 전과 후에 코끼리는 자그마한 나무 기둥에 밧줄로 묶어놓습니다. 그 큰 덩치로 얼마든지 밧줄을 끊을 수가 있을 뿐 아니라 나무기둥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코끼리는 차분하게 묶여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육사들이 코끼리가 연약한 새끼일 때 아무리 몸부림쳐도 끊어낼 수 없는 쇠사슬에 단단히 묶어놓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을 써 봐도 뿌리칠 수 없는 쇠기둥에 묶어놓습니다. 처음에 새끼 코끼리는 여러 차례 벗어나보려고 발버둥을 쳐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체념합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벗어나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덩치가 큰 어른 코끼리가 된 후에도 여전히 벗어나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나무기둥에 밧줄로 묶여 있으면서도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코끼리는 새끼 때는 그 몸이 묶여 있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큰 힘에 그 몸이 단단히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는 그 마음이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데 연약한 밧줄과 나무기둥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무엇엔가 묶여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 사람이 묶여있습니다. 감옥에 수감되어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북한 동포들처럼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거나 질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독한 가난과 열악한 환경 가운데 짓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어떤 사람들은 속사람이 묶여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의식이나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 그리고 불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묶여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겉 사람이 묶여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속사람이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겉 사람도 묶여 있을 뿐 아니라 속사람까지 묶여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무엇엔가 묶여서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창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뒤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 때 인간은 참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또 자유롭게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창 3장을 보면 저들이 그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근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순간 저들이 누리던 자유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창 3: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이 무엇인가 가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창 3:8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렇게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서던 아담과 하와가 이제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 뒤에 그동안 누리던 자유를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죄를 범하자 깊은 죄의식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죄책감에 두려움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숨어야만 했습니다. 자유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는 한 번 죄를 지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우리의 속사람 안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뱀이 집안에 들어와 똬리를 틀고 앉는 것처럼 죄가 우리의 속사람 안에 들어와 앉아서는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7:17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 안에 죄가 거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악한 일을 저지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속에 세균이 들어와서 번식하듯이 죄가 또 죄를 낳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죄의 유혹을 뿌리칠 힘이 없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죄인 줄 알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또 다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 또 때로는 아예 죄 가운데 깊이 빠져있어서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른 채 또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롬 6:17에서 인간이 본래 죄의 종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면서 죄의 종으로 그 속사람이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현직 부장판사가 성매매 현장에서 경찰에 적발되어 충격을 준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은 법원에서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장차 사법계에서 큰일을 할 사람으로 주목을 받아온 사람이랍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됐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술을 마신 뒤 손에 잡히는 전단지를 보고 전화를 했고, 전화를 받고 찾아온 접대부와 오피스텔로 가서 성매매를 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높은 의식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부장판사니까 준법 의식의 수준 역시 높은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수치스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까요?

 

   아마 본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도 왜 내가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제정신이 아니었나봅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술에 취해 순간적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회에 만연된 음란문화 속에 젖어있는 중에 당시 분위기에 휩쓸려서 순간적인 잘못을 범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분 안에 죄가 있고 그 죄가 이끄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이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롬 3:10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 말씀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이것은 어쩌다 실수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속사람이 죄에 묶여있고, 죄의 종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뿌리치고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죄의 종이 돼서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속사람이 참된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속사람만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죄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겉 사람도 철저하게 자유를 빼앗겨 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 3장을 보면 죄를 범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수고를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낳아 길러야 하는 힘겨운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자기 홀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게 되었습니다. 병들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과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 겉 사람은 먹고 사는 문제에 묶이고, 인간관계에 묶이고, 질병과 노화 그리고 죽음에 묶여 살아갑니다. 한 마디로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자유를 주시는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무엇엔가 묶여있는 것, 그리고 우리의 겉 사람이 무엇엔가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참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무엇엔가에 묶여있고,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엔가에 묶여 있는 채로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동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역사하고 계시는 점입니다.

   누가는 눅 4:18-19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사야서의 예언을 읽으시면서 당신께서 하실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소개해 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저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 마디로 갖가지 매여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은 매여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일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매여 있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막 2:1 이하에 우리가 주목할 만한 예수님의 이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든 들 것에 메고 그 집 앞에 왔습니다. 사람이 많아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방안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두 단계로 나누어셔 고쳐주셨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5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지금 중풍병자는 육체에 질병이 걸려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풍병 자체보다도 그 심령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이 보실 때 이 사람에게 시급한 일은 겉 사람이 매여 있는 중풍병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시급한 것은 속사람이 매여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중풍병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겪고 있는 정말 심각한 고통은 죄로부터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점은 당시 아무도 몰랐습니다. 중풍병자 자신도 자신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가 중풍병보다도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사함 받는 일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중풍병자를 돕기 위해 들 것에 메고 왔던 사람들도 중풍병자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저가 겪고 있는 중풍병의 고통인 줄만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이 중풍병자처럼 내게 시급한 문제는 내가 씨름하고 있는 이 질병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지금 내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업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부부간의 문제, 취업의 문제, 진로의 문제, 노후의 문제 이런 것들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속사람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우리의 속사람이 참된 자유를 누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그 다음 일은 어렵지 않게 풀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1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이 사람에게 죄사함을 선포해 주신 뒤에 중풍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중풍병 때문에 상에 들려왔습니다. 그 겉 사람이 중풍병에 묶여있었던 것입니다. 그 병 때문에 겉 사람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죄를 사해주신 후 중풍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더 이상 상 위에 누워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나아가 이 사람이 자기가 실려 왔던 그 상을 들고 나갔습니다. 바로 누워있어야 했던 그 상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겉 사람이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겉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특히 질병 때문에 묶여있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케이스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수많은 간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전교인 연합기도회에 오셔서 간증해 주신 문성선교사님의 경우 네 차례나 죽을병에서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장례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의사들도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와 비슷하게 간증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주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질병에서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바로 병은 그대로 두고 병에 묶여 있는 그 마음을 자유롭게 해 주시는 방법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의 경우입니다. 고후 12장을 보면 바울은 만성병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하게 세 번이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 말씀을 듣고 바울은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병의 고통을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질병 때문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됐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늘 자신에게 머물러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겉 사람이 여러 가지 문제로 묶여있을 때 때로는 그 문제는 그대로 두신 채로 우리의 속사람을 자유롭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더 큰 주님의 능력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때로는 죄 문제로 속사람이 때로는 갖가지 삶의 문제로 겉 사람이 묶여서 자유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주 안에서 주님 주시는 자유를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