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7:1-5 2012.6.3(일)
한신교회 사명과 비전
오늘은 한신교회 창립 35주년입니다. 허허벌판 판교에 이 성전이 세워진 것은 1998년, 지금부터 14년 전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여기 세워진 것은 서울의 한신교회가 이곳으로 이사오려고 세웠고 또 담임목사님이 직접 목회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14년을 거슬러 35년으로 거슬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처음 오신 분들은 교회 오면 먼저 교회 앞에 세워진 돌비를 봅니다(영상). “한국민족을 신자화하자”. “민족성전 한신교회”, 이 글을 보면서 많은 분들이 “민족성전 한신교회, 야 특이한 교회구나” 합니다. 그런 이름을 붙인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소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민족성전, 별세신앙, 이름이 이상하다. 혹시 이상한 교회 아니야?”. 제가 새가족 심방가서 이 말을 들었습니다. “민족성전, 별세신앙”을 보고 처음에는 이단인가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아, 처음 오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상하기로 말하면 한신교회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이상합니다. 세상의 어떤 나라가 교회만큼 오래 간 나라가 없습니다. 로마가 천년 갔지만 교회는 2천년 되었습니다. 식물도 동물도 수명이 있는 데 교회는 수명도 없습니다. 가장 오래가는 나무가 주목나무라고 하는 데 몇 백년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2천년이상 갔습니다. 교회가 완전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많은 실수도 했고 죄도 지었습니다. 갈릴레오 같은 과학자, 죤 후스, 사보나롤라같은 의인을 화형시켰습니다. 교황의 권력이 하늘을 찔러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파문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지으려고 면죄부도 팔았습니다. 종교전쟁도 했습니다. 이단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대로 교회는 가난한 방앗간 집 딸처럼 누더기를 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누가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 바티칸에 가면 군인들이 있지만 일반 교회를 지키는 군인들은 없습니다. 수없는 핍박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로마에서만 100만 이상이 죽었습니다. 중국에서만 수백만이 죽었습니다. 수많은 왕들, 나찌, 공산당이 교회를 불태우고 신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16:18절이 중요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 자신의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내 교회를” 했습니다. 교회는 누구의 소유도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내 교회” 곧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세우리라“ 미래형입니다. 앞으로 계속 세워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속에 의지도 담겨 있습니다. 반드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세운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보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모델링이 아닙니다.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참으로 세계 교회가 지금까지 있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한신교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1977년 한신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지난 35년동안 많은 어려움과 문제가 있었지만 교회는 여기까지 발전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예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할 일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기독교의 미래>에서 한 말을 좋아합니다. “교회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으려면 교회는 변해야 한다”.
그래서 솔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솔개는 새중에서 장수하는 새중의 하나랍니다. 최고 70년까지 사는 데 그렇게 살기 위해 솔개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모험을 한다고 합니다. 솔개가 한 40년 정도 되면 발톱이 노화되어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습니다. 부리도 길게 털도 두껍고 날개가 무거워 하늘로 날기가 힘들어집니다. 이 때 솔개는 두 가지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는 그대로 죽든지 아니면 약 반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변화의 과정을 거치든지. 만일 더 살기로 선택했다면 솔개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 그곳에 둥지를 짓고 고통스러운 수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 그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이렇게 반년이 지나면 묵은 털은 뽑히고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30년을 더 살게 됩니다.
한신교회 35년 주년을 맞아 우리는 이 땅에 변함없이 살아 남기 위해 변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솔개처럼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전통에 충실하되 전통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 메시지를 받되 그것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시대를 좇되 말씀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저는 오늘 35년을 맞아 우리가 붙잡고 씨름할 세 가지 주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이 세 가지를 붙잡고 갱신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람이 되라
오늘 말씀은 2천년전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백성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셨습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니라”. 가르치셨습니다. 교육입니다. 전파하셨습니다. 선포입니다. 고치셨습니다. 치유입니다. 교육과 선포와 치유입니다. 교육은 정신을 깨우치기 위해 있습니다. 설교는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있습니다. 치유는 육신을 강건하기 위해 있습니다. 영혼이 구원받고 정신이 변화되고 몸이 강건하게 되는 것,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36절입니다.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5절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여준다면 36절은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을 치료하셨습니다. 어땋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어머니가 자식을 불쌍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속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히브리어로 말하면 “라쿰”입니다. 이 말은 “자궁”이라는 말입니다. 입에 바른 말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섬진강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시를 쓰고 사는 김용택 시인이 있습니다. 이 분이 이번에 “어머니”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그 어머니가 그의 딸 복숙이가 집안이 하도 가난해서 학교를 그만 두고 도시에 나가 취직했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편지를 썻습니다. “복숙아, 니 학교 그만 둔 것, 징검다리를 건너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그냥 우두커니 서지고 호미 끝이 돌자갈에 걸려 손길이 떨리고 눈물이 퉁퉁 떨어져 콩잎이 다 적신다. 이 에미가 이렇게 가슴이 미여지는 디 너사 올매나 가슴이 아프것냐? 복숙아 논에 들고 밭에 들어 일헐 때 그냥 너그널 못 입히고 못 멕이고 언제 너그덜 가윗돈 한 번 준 적 있었나? 그렇게 가르친 걸 생각하면 꼭 죽것다”. 이것이 어머니 마음입니다.
이 어머니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이 보여준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은혜였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의 일도 잘했지만 그가 늘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예수님 마음이었습니다. 누구나 노력하면 예수님 일을 잘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닮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교회, 다른 목회자가 교회 성장, 교회 부흥, 1,000명 달성 방법을 찾아 헤맬 때 목사님은 예수님에게 집중했고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웃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쓴 책중에 가장 마지막 쓴 책이 <죽어도 행복합니다>입니다. 이 책에서 목사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다.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 남들이 보아도 미친 사람이다, 나는 예수 믿고 예수에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목회지에서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미친 전도사가 왔다고 했다. 신학교에서 나를 가르쳤던 교수도 예수에 미친 제자가 왔다고 했다. 그렇게 가르쳐도 안나오던 예수제자가 나왔다며 화제가 되었다. 나는 공부에 미쳐 본 일도 없고, 사랑에 미쳐본 일도 없다. 그런데 어쩌다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미치게 됐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예수님이 너무 좋아 거기 미치다 보니까 자신이 암에 걸렸어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가 병상에서 한 고백입니다. “암은 나를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려고 찾아온 친구이기에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잘 사귀어 내 몸에서 조용히 떠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암에게 매일 속삭였다. “네가 내 몸을 찾아 주어 고맙다. 나는 별세를 배우는 하나님의 종이요, 별세의 수련생이다. 암아, 나에게 별세를 가르쳐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렴.” 많은 분들이 암과 싸워 수명을 연장시킨 것을 큰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나 병을 고쳐 몇 년 더 살더라도 결국은 죽는다. 암에 걸려서도 예수와 함께 나를 죽이고, 암이 떠나가도 내가 예수와 함께 살 따름이다. 의사는 병을 고치고 하나님은 사람을 고친다. 주여, 내가 암에 걸렸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나로 끝까지 예수님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 교회가 받은 가장 자랑스러운 전통이 이것입니다. “예수님 배우는 제자가 되는 것”,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예수님 외에는 일체 앞장세우지 않는 것,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의 일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일은 잘 하는 데 예수님과 상관없이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종일 수 있으나 예수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이 주신 행복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다만 행복을 원한다면 저녁에 사우나 하고 푹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닝 커피 한 잔만 해도 행복합니다. 출출할 때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포도주 한 잔에 스테이크만 걸쳐도 행복합니다. 행복은 예수믿음의 결과요 하나님의 선물이지 예수믿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자기애적 기독교”라고 불렀습니다. 자기성취, 자기만족, 자기성공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한신교회가 서 있는 자리가 여기입니다. 다른 교회에 비해 조금 다른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받는 축복이나 선물보다 예수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교회,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양을 먹이는 것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저 예수님 때문에 좋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님 때문에 남은 생을 믿음으로 살겠습니까? 문제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느냐? 이 문제로 기도하다 제가 쓴 교재가 있습니다. “예수영성제자훈련” 교재입니다(영상).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구체적우로 다루었습니다. 모두 9권입니다. 1권 “십자가에 죽고”, 2권 “예수로 살고”, 3권 “세상을 살리고”, 이미 50명의 교인들이 시작했고 9월에 2기가 또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시다. 예수님의 사람이 됩시다. 그것이 성경 최고의 가치요 우리 교회의 자랑스러운 첫 번째 비전입니다.
둘째 한국민족을 신자화하라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예수님이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36절입니다.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우리가 첫 번째로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두 번째로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사랑했습니까? 36절 마지막, 목자없이 기진맥진하며 고생하는 양들을 사랑했습니다. 양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이스라엘 가기 전에 양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참으로 연약하고 우둔한 존재였습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영락없이 잘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벧전 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주인없으면 양은 길을 잃습니다. 양이 주인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그런데 한신교회는 이 잃어버린 양을 한국민족에게서 보았습니다. 한국민족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오랫동안 하나님없이 살았습니다. 그나마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Korean이라고 하면 반드시 묻습니다. “south? north?”. 그때마다 곤혹스럽습니다. 허리잘린 민족, 그 허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북한에 대해 애증을 같이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저의 가정의 배경때문입니다. 저희 할머니, 큰 아버지, 큰 어머니가 6.25때 학살당했습니다. 할머니는 4살, 7살, 어린 딸들이 보는 데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고모들이 그때 이야기만 하면 웁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 북한이 미웠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미워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때문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두 오빠가 있었는 데 인물이 다 출중하고 공부도 잘 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 두 분 다 동경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해방되어 나와 정부의 요직을 지냈는 데 6.25가 되자 납북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홧병이 나 돌아가셨습니다. 막내였던 어머니는 졸지에 고아가 되었고 그때 저희 아버지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19살에 시집와서 저를 낳은 후 어머니가 한 일은 매일 우는 것이었습니다. 6.25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나서 울고 북에 있을 오빠들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어릴 때 저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자주 우는지 몰랐습니다. 한번은 T.V 방송을 보는 데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북한 T.V인데 꼭 오빠같은 노인이 t.v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성도 어머니 성과 같고 얼굴도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남북의 창”, “지금 북한은” 북한 T.V만 나오면 봅니다. 어머니는 젊을 때부터 몸이 안 좋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때 돌아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딱 두 가지 같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요 다른 하나는 북한에 있는 두 오빠 때문입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겠습니까? 어머니 나이가 올해 80인데 그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들이 북한에 살아 있겠습니까? 그래도 어머니는 기다립니다. 오빠가 무엇인데, 핏줄이 무엇인데 90이 넘은 노인들을 기다립니까?
몇 년 전 한 복음성가 가수가 우리 교회에서 찬양했습니다. 그 노래를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제목은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입니다. 한 어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 데 6.25전쟁때 하나는 인민군이 되고 다른 하나는 국군이 되어 서로 싸우다 죽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같이 들어보겠습니다(노래).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한 아들은 북쪽에서 인민군되고 한 아들은 남쪽에서 국군이 되어/ 집나간지 오십여년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네 돌아오지 않아/ 육이오때 어느 전투에서 서로가 서로를 쏘았을까/ 형도 동생도 숨을 거두며 오마니 어머니를 찾았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을 애달피 가슴에 묻은/ 나는 이 나라의 슬픈 에미 나는 이 나라의 슬픈 에미/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북쪽에서 인민군되고 한 아들은 남쪽에서 국군이 되어/ 집나간지 오십여년 되었는데도 소식조차 없네 소식조차 없어/ 육이오때 어느 전투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였을까/ 형도 동생도 숨을 거두며 오마니 어머니를 불렀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을 한번에 가슴에 묻은/ 나는 이 나라의 슬픈 에미 나는 이 나라의 슬픈 에미 나는 이 나라의 슬픈 에미”
어떻습니까? 정치체제는 달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남과 북은 한 형제입니다. 경제체제가 달라도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세월이 흐르면 다 사라질 이데올로기들입니다. 공산주의는 다 같이 먹고 살자 하다가 다 같이 못 먹고 살고 자본주의는 열심히 일하면 잘먹고 산다 했는 데 잘 먹고 산 사람은 잘 먹고 살고 못 먹고 산 사람은 못 먹고 삽니다. 어떤 체제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체제가 달라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한 어머니가 낳았습니다. 어머니라고 부르든 오마니라고 부르든 어머니는 하나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북한에서 탈출한 동포가 30만이 넘습니다. 그 중 생사의 경계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한 동포가 2만 3천이라고 합니다. 정부에서 최선을 다해 돕지만 이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움이 많습니다. 기자가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남한 동포들이 자기들을 업수이 여기고 무시할 때 가장 힘듭니다”. 그래서 정착하지 못하고 탈선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죄악입니다. 이들을 북한에서 떠나게 한 북한 지도자들이 첫 번째 죄인이라면 이들을 형제로 맞아 들이지 못한 우리가 두 번째 죄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 형제를 찾아도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36절 다시 보실까요?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목자”입니다. 양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이 기진하고 고생하는 이유는 이들에게 목자이신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더 예수를 잘 믿는 곳이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가 1866년 순교한 곳이 대동강입니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곳도 원산과 평양입니다. 미션스쿨도 북한이 많고 최초의 신학교도 평양에 있었고 이승훈,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조만식, 손정도, 한경직, 교회 지도자가 다 북한 사람들입니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 강형욱은 30년간 장로교 숭덕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후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6촌 동생 강양욱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때 까지 평양에서 목사로 일했습니다.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평양 기독교 학교 숭실학교를 졸업했고 어머니 강반석은 평양 칠골교회 집사였습니다. 김일성도 어머니 강반석을 따라 교회 출석했고 객지에 갔다 집에 오면 어머니가 반드시 교회 들러 기도하고 가라고 가르쳤습니다. 분단되기 전 북한에는 2천 6백여 교회가 있었고 평양에만 270여가 있었습니다. 그때 서울에는 교회가 100개도 안될 때입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습니다. 그 뒤에 북한이 무너졌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잘못된 공산주의 때문입니다. 북한이 회복되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목자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처럼 이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목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야 줄 합니다. 우선 남으로 온 북녘 동포들을 품어야 합니다. 전체가 2만 3천, 경기지역에만 280명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가족결연이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이들을 가족으로 여기는 동포애와 하나님 사랑으로 한 가정이 한 사람을 책임지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이를 실천하고 싶습니다. 선교중에서도 북한 선교에 박차를 가했으면 합니다. 이번에 뽑는 선교사도 북한 선교를 위해 일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6천만 남북 동포가 다 하나님 믿는 그 날까지 한국민족을 신자화하는 발걸음을 계속했으면 합니다.
셋째. 세상을 살리는 교회가 되라
우리 교회의 마지막 사명은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37-38절을 볼까요? 예수님이 백성들을 보며 하신 말씀입니다. 마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할 일꾼을 보냐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기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일할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추수꾼”의 사명입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 하라”. 분명히 추수는 교회안에서 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합니다. 추수는 곡식을 대상으로 하지만 영적 추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추수는 익은 곡식을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곡식이 익을 때까지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곡식을 거두기만 하는 것입니다.
추수의 사명은 세상을 설리는 사명입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 죽은 영혼, 죽은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람과 구조, 다 포함합니다. 막3:13-15에서 예수님이 12제자를 불러 두 가지 사명을 맡겼습니다.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시고”, 전도는 사람 살리는 것입니다. 귀신 내쫓는 것은 구조를 살리는 것입니다. 도덕적 개인과 도적적 사회가 같이 가야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 자기 희생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이는 사람이든 구조든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이 자기 희생을 우리 교회에서 “별세”라고 합니다. “별세”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어 나를 살리신 것처럼 내가 죽어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을 죽여 내가 살리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죽어 세상을 살립니다. 이것이 “별세”입니다. 추수는 곡식을 베어 타작해서 알곡을 모으는 것입니다. 곡식이 낫에 베어지고 아프게 탈곡되고 껍질을 벗기는 고통을 통해 알곡이 되면 그 알곡이 또 기계에 들어가 잘게 자기를 부숩니다. 그러면 밀가루가 되고 쌀이 됩니다. 추수는 반드시 자기 희생을 전제합니다. 한신교회가 민족사에 받은 사명이 이것입니다. 곡식처럼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인들은 먼저 좋은 예수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9장에서 추수꾼으로 부른 사람들을 10장에서 제자로 훈련시켰습니다. 안으로 예수님 제자가 되어야 밖으로 세상을 추수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예수님 제자고 우리의 사명은 추수입니다. 우리는 능력있는 제자가 되기 전에 깨끗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전에 갓 피풀에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은 깨끗한(정직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깨끗하다: 6.8%, 깨끗한 편이다: 40.1%, 깨끗하지 않다: 40.9%, 잘 모르겠다: 12.2%. 교회가 세상보다 더 깨끗하다는 확신을 주기 전에는 교회가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 보다 더 정직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손해보야야 합니다.
오래전에 어떤 교회 집사가 친구 빛 보증을 섰습니다. 그러다 잘못 되어 집사님이 돈을 물어주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채권자가 집사님을 찾아와 당신 친구가 빚을 갚지 못하니 보증 선 당신이 대신 갚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그 집사님은 집을 팔아서라도 갚아줄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정말이냐고 묻자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한 대로 합니다.” 집사님은 바로 집을 팔아 친구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약간 남은 돈으로 서울 변두리에 땅을 사 집을 지었습니다. 그곳이 지금의 한강변 리버사이드호텔부근입니다. 그 후 강남의 땅값이 올라 집사님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지 않았어도 그는 성공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었다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한 대로 합니다.” 이 말을 세상이 믿으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희망을 봅니다.
누가 한신교인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일보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축복보다 예수님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신교인입니까?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남과 북을 함께 가슴에 품고 진정한 복음적 통일이 올때까지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신교인입니까? 자기를 죽여 세상을 살린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시켜 세상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믿는대로 삽니다”. 내가 먼저 제자되고 나를 죽여 세상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사는 가정, 지역사회, 나라, 온 세계를 살리는 사람입니다. 창립 35주년, 입당 14주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한신교회를 민족사에 찬란한 교회로 세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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