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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5:22-28 부부가 사랑하며 산다는 것 2010.5.27.(일)

5:22-28 2010.5.27.()

 

 

부부가 사랑하며 산다는 것

오늘은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521은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둘이 하나되어 사랑하는 날이라고 해서 21일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부부는 서로 사랑합니까?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에도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평소에 멀리 지내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참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이래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더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표는 나지 않지만 사실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어려울까요? 평소에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사랑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더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더 사랑하기 어려운 것은 가까운 사람은 가깝게 있기 때문에 늘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가깝게 있기 때문에 사랑의 필요성을 덜 느낍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 가까운 대표적인 사람이 부부입니다. 부부는 참 신비합니다. 전혀 남남이면서도 자기 몸같이 살아갑니다. 가장 가깝게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평소에는 있는가 없는가 모르다가 없으면 허전합니다. 그래서 어떤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이렇게 썻습니다. “집에 두고 오면 근심 덩어리, 같이 다니면 짐 덩어리, 혼자 보내면 걱정 덩어리, 마주 앉으면 웬수 덩어리”. 아내 여러분은 공감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하면 아내나 남편이 없으면 아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2장에서 남자의 이름은 하와가 있고 없고에 따라 다릅니다. 하와가 없을 때 남자는 그냥 아담입니다. 아담은 아다마에서 나왔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입니다. 아내가 없으면 남자는 흙덩이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생기자 이름이 달라집니다. “하 이쉬”. 남자, 2:7절부터 22절까지는 아담입니다. 그러다가 하와가 생긴 뒤에 이름이 남자가 됩니다. 2:23,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는즉 여자라 부르리라”. “여자란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남자가 된 아담이 갈비뼈에서 나온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때 여자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생기자 남자가 된 아담, 남자가 이름을 불러주자 생긴 여자”, 이 둘은 창조의 신비를 안고 인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가정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기본 단위는 아내와 남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며 살까요? 부부가 늘 가까이 있지만 더 사랑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은 전체적으로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어떤 원칙과 방향을 제시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부부 사랑의 성경적 원리는 세 가지입니다.

 

먼저 사랑의 감정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첫 번째 축복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부부는 서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많이 식었다고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어떤 분이 부부가 자는 것도 세대에 따라 다르답니다. “20대는 서로 마주 보고 자고, 30대는 똑바로 누워 자고, 40대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자고, 50대는 따로 자고, 60대는 어디서 잤는지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감정이 식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의 감정은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은 감정을 포함합니다.

 

저는 사랑의 감정을 생각할 때마다 구약의 야곱을 생각합니다. 야곱은 일생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았습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결혼해서는 네 아내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늙어서는 아들 요셉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많이 받는 사람이 더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꽃에 나비가 몰리듯이 감정이 풍부한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의 특징중의 하나는 감정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랑은 하란에서 꽃피웠습니다. 그가 긴 여행 끝에 하란에 이르자 우물가에서 일단의 양떼와 만납니다. 마침 목자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우물가로 나온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야곱은 운명의 여인 라헬을 만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운명처럼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작년에 이태리 피렌체에 갔습니다. 거기서 단테가 베아뜨리체를 만났다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당시 단테는 9살이고, 베아뜨리체는 8살 이었는데 단테는 베아뜨리체를 만난 것을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쓴 <신곡>의 여주인공 이름을 베아뜨리체라 붙였습니다. 그의 시집에서도 베아뜨리체를 만난 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부터 사랑이 나의 영혼을 지배했다”. 다른 책에서는 또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서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가장 미세한 혈관마저도 더불어 떨리기 시작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순간은 어떻했을까요? 29:10절입니다.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야곱은 라헬이 우물에 덮힌 돌을 옮기지 못하여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 혼자 그 무거운 돌을 가볍게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의 양떼에게 물까지 먹입니다. 친절한 야곱씨, 힘센 야곱, 그런데 야곱은 본래 힘센 사람이 아닙니다. 늘 어머니와 함께 부엌에서 산 사람입니다. 형이 밖에 나가 사냥할 때 그가 한 일은 어머니 옆에서 팟죽끓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라헬을 보자 야곱이 벌떡 일어나 무거운 돌을 거뜬히 들어 올렸으니. 사랑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29:10절 첫 부분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을 보고”. 라헬을 본 것입니다. 라헬을 보는 순간 뿅 간 것입니다. 야곱은 감격에 겨워 울기까지 합니다. 11, 29: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

 

사랑의 감정은 위대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까? 남들이 볼 때 유치하게 보이겠지만 사랑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과 함께 라헬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또 한 여자가 있습니다. 언니 레아입니다. 자세히 보니까 라헬보다 예쁘지 않아 마음에 두지 않았는 데 아버지 라반이 야곱을 속여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첫날 밤을 지내고 눈을 떠 보니까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에게 라헬 뿐 아니라 레아도 주었을까? 야곱은 참 여복도 많습니다. 레아와 라헬뿐 아니라 두 여종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모두 넷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렇게 많은 아내를 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결혼생활안에 여러 종류의 아내가 있고 여러 종류의 남편이 있는 것입니다. 크게 레아가 있고 라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레아와 함께 살고 어떤 사람은 라헬과 함께 삽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종처럼 부리며 삽니다. 야곱의 가정은 결혼이라는 제도안에 있는 모든 가정의 축소판입니다. 레아는 서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사는 불행한 가정을 상징합니다. 라헬은 서로 사랑해서 사는 행복한 가정의 표상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정에 속합니까? 레아는 동의없이 결혼한 불행한 가정의 예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서로 동의해서 결혼했습니까? 동의했다는 말은 상대방의 현재뿐아니라 과거와 미래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동의했다는 말은 상대방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연애는 장점만 보고 하지만 결혼은 단점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레아와 야곱은 그런 동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의외로 레아와 결혼한 분들이 많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는 데 어쩌다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살고 정때문에 삽니다.

 

혹시 이런 가정이 있다면 잘 들으십시오. 통계에 의하면 라헬의 가정보다 레아의 가정이 더 많습니다. 모두가 다 첫 사랑과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또 첫사랑과 결혼한 것이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좋은 배우자는 객관적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사람입니다. 결혼 조건에 객관적 조건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가정은 대개 맞춤형 가정입니다. 오래 인내하며 살다보면 , 그래서 저 사람이 내 아내가 되었구나하고 느낍니다. 미국의 가정 상담가 마틴박사가 주부들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좋은 남편입니까?” 했더니 결혼 1년차 아내들의 98%”, 결혼 2년차 아내들의 56%”, 10년이 지난 아내들은 겨우 6%만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 20년이 지나자 아내들은 또 다시 95%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박사가 이렇게 결론을 썻습니다. “부부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하나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20년은 걸린다”.

 

참고 인내하다 보면 정도 생기고 감정도 생기고 좋은 일도 생깁니다. 항상 좋은 것은 나쁜 것을 제거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계속 공급할 때 옵니다. 아침이 오기 위해서는 어둠을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을 계속 공급하면 아침이 옵니다. 100% 만족하지 않은 부부도 서로 나쁜 것을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좋은 것을 계속 공급하면 반드시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과 레아가 보여준 교훈이 그것입니다. 야곱이 레아와 헤어지지 않아서 좋은 것은 레아가 야곱의 13남매중 7을 낳았고 그 중에서 레위, 유다같은 훌륭한 자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레위는 훗날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이 되고 유다는 훗날 다윗, 솔로몬 40명의 이스라엘 왕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모든 가정이 라헬의 가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라헬을 위해 7년을 더 일했으나 그 7년이 마치 수일처럼 짧았다고 야곱이 말합니다.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사랑하면 인내합니다. 사랑하면 기다립니다. 라헬같은 가정이 되십시오. 혹시 레아를 만났습니까? 오래 참고 기다리십시오. 좋은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유지하는 첫 번째 축복으로 주신 것이 사랑의 감정입니다.

 

둘째. 사랑의 언약

하나님이 우리의 부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주신 두 번째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유대인 영화가운데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구 소련지역에서 디아스포라로 살던 유대인 테비에 가정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두 부부는 열심히 일해서 네 딸을 시집보냅니다. 막내딸을 시집보낸 날 남편 테비에는 허전해서 아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오?”. 아내는 뜽금없는 질문을 하는 남편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요? 글쎄 25년간 당신 네 아이를 낳고 길러 시집보낸 것이 사랑이 아닌가요?” 남편이 또 묻습니다. “그런 것 말고 당신 나를 사랑하냐 말이요?” 아내가 또 말합니다. “사랑이라니요? 지난 25년간 당신과 함께 소와 양을 키우고 수없이 이사하며 함께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이 사랑이 아닌가요?”. 남편이 또 묻습니다. “당신 정말 나를 사랑하냐 말이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사랑이요? 내 속으로 난 자식들도 다 우리를 떠났어요. 그런데 나는 지금 당신옆에 있지 않아요? 무엇이 사랑인데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이 감정으로 표현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표현이 없다고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25년간 온갖 고락을 같이 하고 살았다면, 둘이 함께 고생하며 자식들 키우고, 떠나 보내고 그 허전한 빈 자리에 둘이 함께 마주 보고 있다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감정을 넘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결혼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성경적 끈이 있습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과 언약맺기를 좋아하십니다. 먼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언약했습니다. “땅을 주겠다. 아들을 주겠다. 그리고 너희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은 또 모세와 언약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였습니다.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번에는 조건부 언약이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하나님은 그 백성을 거룩한 백성되게 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주신 것이 율법과 성막입니다. 율법은 말로 쓰여진 하나님의 언약이요 성막은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뒤에도 다윗에게, 에스겔에게,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성취로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언약은 계약과 다릅니다. 계약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약속이요 언약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 하는 약속입니다. 사람이 하는 계약은 언제나 깨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깨지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과 백성간의 언약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을 결혼의 관계로 보여줍니다. 호세아서의 하나님은 그 백성의 남편이 되고 백성은 하나님의 아내가 됩니다. 3: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내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아를 알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겠다“. 월터 트로비쉬는 이것을 이렇게 바꿨습니다. ”나는 너와 결혼하였다“, (I married with you). 그런데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집을 나갑니다. 세 아이를 낳고 집을 나갑니다. ”고멜은 히브리어로 끝난 자란 뜻입니다. finish, ”끝났다라는 뜻의 가말의 명사형입니다. 자기 남편을 버리고 세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 여자, 그 여자는 인간이 볼 때나 하나님이 볼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여자를 데려오라 말합니다. 3:1, ”여호아께서 네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심지어 빈 손으로 보내지도 않습니다.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그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자기 아들, 딸을 팽개치고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자가 우리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람이 설령 내 동생이라 해서, 내 자식이라 해서 찾으러 가겠습니까? 대부분 내버려두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편이고 너는 내 아내다”. 하나님이 인간과 결혼했습니다. 호세아의 이야기의 구조를 잘 보셔야 합니다. 호세아의 이야기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남편인 하나님이 호세아가 되고 집을 나간 고멜이 인간이 되어 펼치는 가상 결혼 드라마입니다. 두 개의 결혼이 호세아에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백성간의 결혼, 신적인 결혼입니다. 호세아와 고멜과의 결혼, 인간적 결혼입니다.

 

호세아는 성경이 말하는 결혼의 신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호세아의 무대에 나타나는 주인공은 호세아와 고멜입니다. 그러나 배후에 있는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입니다. 히브리어로 결혼키두신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거룩이란 뜻입니다. 왜 결혼이 거룩일까? 저는 많이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결혼은 하나님이 인간과 결혼하는 것을 실재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하면서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맺은 결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결혼하면서 언약을 맺은 것처럼 우리도 결혼을 통해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결혼할 때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신 것처럼 우리도 결혼을 통해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이 거룩입니다. 단순히 인간적 결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우리의 결혼을 통해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장에 가 보면 몇 가지 관습이 있습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케투바라는 결혼서약서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케투바우리가 결혼하면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다짐하고 약속하는 일종의 결혼서약서입니다. 그것을 주고 받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만 들어가는 작고 투명한 망사안에서 합니다. 이것은 옛날 지성소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 것을 상징합니다. 결혼은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곧 하나님입니다. 옛날 지성소에서 하나님만나듯 나도 거륵한 제사장이 되어 배우자를 하나님으로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다 끝나면 신랑 신부가 유리 그릇을 들어 땅에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쨍그랑하고 깨집니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도 우리 인생을 쨍그랑 하고 깨뜨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혼식때 이렇게 서약했습니까? “나는 당신을 영원히 합법적인 나의 아내로, 남편으로 맞이하되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사랑하고 아끼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앞에서 한 엄숙한 약속이었음을 믿습니까? “우리가 사랑할 때까지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돈 잘 벌고 아내가 젊고 아름다울 때만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그 언약을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한 것입니다. 부부에게 첫 번째 축복, “사랑의 감정이 식어도 두 번째 축복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의 언약”,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셋째. 사랑의 모델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부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주신 세번째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모델입니다. 우리에게 본성인 사랑의 감정을 주셔서 결혼하게 하시고 그 결혼을 사랑의 언약을 통해 이루어가게 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시대에 가장 아름답고도 극적인 결혼의 모델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호세아와 고멜을 통해 결혼의 신비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 결혼의 신비로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오늘 말씀 25절입니다.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 여기서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아내인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26-27절에 암시됩니다.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물로 씻어야 할 만큼 깨끗하지 못합니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 있습니다. 불완전합니다. 신학자 한스 큉이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한 부자 남자가 한 가난한 방앗간 딸을 사랑해서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식날 신랑은 아름다운 신부가 깨끗하고 순결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신부는 너무 가난해서 깨끗한 웨딩드레스를 입을 수 없었다. 대신 신부가 입은 것은 여기 저기 누더기 나고 더러운 옷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식을 취소할 수 있는가? 신부가 신랑에게 완전한 것은 그가 입은 옷 때문에 아니라 그에 대해 가진 신랑의 사랑 때문이다. 더러운 옷이 그날 신부를 완전하게 못했지만 그들 둘을 완전하게 한 것은 신랑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신랑의 사랑이 있기만 하면 신부는 점점 깨끗한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늘 불완전했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완전하게 합니다. 교회는 마치 누더기를 입은 가난한 처녀와 같습니다. 그 처녀를 깨끗하게 하고 우아하게 하고 신델레라같이 만들 사람은 부자인 신랑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자나 여자나, 아내나 남편이나 하나님앞에서누더기를 입은 가난한 처녀입니다. 우리의 결혼을, 우리의 부부를, 우리의 가정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바꾸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하신 일이 세 가지입니다. 25, 자신을 주셨습니다. 26, 깨끗하게 했습니다. 27,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28절입니다. “이와같이 남편들도”. 무엇과 같이 입니까?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하신 것같이 우리도 남편들도, 아내들도 자기 자신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없이 줄 수 있지만 주지 않고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도 서로 서로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교회가 됩니다. 또 깨끗하게 했습니다. 26, 물로 깨끗하게 하고 말씀으로 거룩하게 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깨끗하지 못합니까? 하나님 외에 누가 깨끗하겠습니까? 물로 씻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27,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교회가 되고 성전이 되고 천국이 됩니다.

 

요즘 가정마다 문제가 많습니다. 서로 마음에 안 든다고 불화하고 갈라서고 갈등하고 싸웁니다. 그러다가 둘중의 하나가 먼저 죽으면 가장 마음 아플 사람은 아내요 남편입니다. 지난 주에도 목회자 세미나 하면서 어느 수양관에 갔습니다. 한국교회 유명한 목사님이었던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없는 쓸쓸한 집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 수양관에 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 사모님을 보자 문득 오래전 시인 고은이 쓴 글이 생각났습니다. 고은이 아내를 잃고 어느날 산에 올라갔다가 쓴 시입니다. “어느날 하루는 뒷산에 산책을 나갔더니 어디서 슬피 우는 소리 들리더라. 가까이 가보니 한 노파가 슬피 울고 있는데 영감 죽은 제삿날이라 한다. 영감 죽고 신세는 바뀌어 시골을 떠나 서울에 와 입주 가정부가 되었건만 어젯밤 제사를 드려야 하난 주인 아줌마 눈치 보느라고 드리지 못하고 오늘은 특별 휴가를 맡아 나와 아무도 없는 산속에 와서 차릴 음식이 없이 눈물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위로하느라고 이말 저말 하다가 나도 내 신세가 서러워 둘이 얼싸안고 실컷 울다가 내려왔다”.

 

여러분, 아내나 남편이 살아 있습니까? 정말 감사하십시오. 나에게 살아있는 한 사사랑의 감정 솟아나 도란 도란 사랑하며 살게 하시고 고멜을 살리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우리가 맺은 사랑의 언약에 충실하게 하시고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다 주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한 것처럼 나도 우리도 아내와 남편을, 우리 가정을 더 사랑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