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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7:54-60 스테반처럼 승리하게 하소서 2012.6.17(일)

7:54-60 2012.6.17()

스테반처럼 승리하게 하소서

여러분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흑인 부부가 아브라함 링컨을 너무 존경했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해서 자기들도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아이를 임신했는 데 존경하는 링컨을 닮은 아이가 나오라고 방안에 링컨 사진을 걸어 놓고 매일 바라 보았답니다. 태중의 아이에게는 매일 링컨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링컨을 사모하고 링컨만 생각하며 열 달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아이를 낳고 보니 흑인이 아니고 백인이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외토픽감입니다. 그만큼 좋아하고 존경하면 닮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두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는 좋아하고 하나는 존경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구약의 야곱입니다. 야곱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합니다. 슬슬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그러다가 급하면 천사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야곱은 저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테반입니다. 그 논리정연한 믿음과 그 장열한 죽음이 어린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스테반이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2천년 교회사를 보면 딱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교자가 역사를 다스린다는 진실입니다.

 

로마에 가면 카타콤이 있습니다. 카타콤을 찾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는 것은 로마의 황제가 아닙니다. 순교자입니다. 그 중에 순교자 세바스티안이 있습니다(그림1). 세바스티안은 3세기, 로마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황제에 의해 순교당했습니다. 군인이었던 그는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수없이 화살에 맞습니다. 그래도 안 죽자 황제가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하수구에 버렸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죽었으나 카타콤에 살아 2천년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순교의 역사는 로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도 있습니다. 19194, 당시 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수원 제암리 교인 21명을 교회에 가뒀습니다(사진2). 그리고 교회를 못질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 교회안에서 21, 교회 밖에 2명이 죽었고 동네 집도 33채가 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급히 달려갔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교회안에 있었던 교인 21명은 동그랗게 손을 맞잡고 무릎을 꿇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 밖으로 피하지 않고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최후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다 순교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차피 인생은 둘중의 하나로 판가름나게 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전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자녀를 기르든 직장생활을 하든 성공이냐 실패냐 둘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날마다 승리하는 것이고 차선은 최후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저는 스테반을 통해서 승리의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이번 주에도 이 말씀을 여러번 읽고 그 원리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기뻣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 스테반처럼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라

첫 번째 원리가 2절에 나타납니다. 7:2, “스테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여기에 영광의 하나님이란 말이 나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스테반은 유대인들에게 둘러쌓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을 죽이기 위해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유대교로부터 이탈하여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스테반이 언제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행6장에 보면 스테반은 당시 훌륭한 믿음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6: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7집사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하자 유대인은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이 자기만 믿을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을 예수믿도록 영향준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스테반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유대인이 스테반을 핍박한 첫 단계는 논쟁이었습니다. 6:9절 마지막,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테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변론은 요즘 말로 하면 공개토론입니다. 공개적으로 누가 옳으냐 그르냐 논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토론을 통해 스테반을 당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테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말로 안되자 그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중상모략입니다. 중상모략의 내용은 스테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6:11절입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결국 유대인들은 스테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결국 그것으로 스테반을 체포했습니다. 12절입니다.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처음에는 말로 공개토론합니다. 그것으로 안되자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중상모략합니다. 그래도 안되자 그것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잡아 가두고 불법 재판을 통해 죽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이 과정을 거쳐 공회까지 왔습니다. 6:15절입니다. 6:15,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테반을 주목하여 보니”. , 지금 스테반이 공회앞에 섰습니다. 공회는 72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사법기관입니다.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가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독일에 갔습니다. 독일 보름스에 가면 루터가 제국의회에서 심문받은 장소가 있습니다. 수많은 카톨릭 신부들앞에 루터가 섰습니다. 그때 했던 루터의 기도가 그가 섰던 자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 주소서”. 그 심정이 바로 스테반의 심정일 것입니다. 스테반은 지금 유대인 대적자들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섰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테반에 대하여 제기한 죄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스테반이 성정을 헐자고 했다, 또 하나는 스테반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앙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성전신앙과 하나님이 율법을 만드셨다“. 율법신앙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어기는 것이 가장 큰 죄였습니다. 이에 대해 스테반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것이 행7장입니다.

 

먼저 스테반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시간이나 장소에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솔로몬까지의 역사를 개관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성전은 솔로몬 시대에 지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때부터 일하셨다”. 그 하나님이 2,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부터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이삭, 야곱, 요셉을 세웠습니다. 때가 되자 영광의 하나님은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에 잠시 광야교회를 이루다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다윗을 통해 나라를 세우시고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영광의 하나님이 다스린 역사였습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와 공간에 제한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며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History is the His story,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입니다. He is everywhere, 그는 어디나 계십니다. He lives anytime, 그는 언제나 살아 계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이요 우주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성전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말씀하시지만 성전에 제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셨지만 율법에 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하나님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7:51, 성령의 하나님, 7:52,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은 곧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그 믿음 때문에 여기 서 있습니다. 내가 그 믿음 때문에 죽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영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사나 죽으나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스테반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되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을 믿습니까? 모든 인생은 결국 두 가지로 결판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믿느냐? 둘째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무서운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나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 루터가 그랬습니다. 루터가 어느날 친구와 함께 집에 다녀오다가 들에서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루터는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전전긍긍,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하나님이 벼락을 내리지 않나 공포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25장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을 남기고 두 달란트받은 사람은 둘을 남겼는 데 하나 받은 사람은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다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25:24,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굳은 사람”,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굳은 분입니까? 감정표현도 없고 항상 딱딱하고 무섭습니까? 저도 어릴 때 그렇게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아버지 이미지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 이미지는 아버지 이미지 따라갑니다. 아버지가 좋으면 대부분 하나님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나쁘면 하나님도 나쁩니다. 아버지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자녀에게 하나님 이미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셔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아버지가 누구든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루이스 앤더슨이 말한대로 모든 노력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렇습니다. 모든 능력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영광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승리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하늘의 예수님을 바라보라

스테반이 보여준 승리의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55절입니다. 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절입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 지금 스테반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죽고 있습니다. 스테반이 잘못한 것도 없는 데 억울하게 죽어 갑니다. 그러면 누구를 바라 보겠습니까? 자기에게 돌던진 사람들을 바라 볼 것입니다. “너희들 두고 보자. 내가 하늘 나라 가면 너희들에게 천벌을 내릴거야”. 그러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테반은 사람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스테반은 또한 자기 자신을 바라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죽어가는 자기가 안쓰럽고 불쌍하고 또한 대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자기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스테반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늘도 어떤 하늘이냐가 중요합니다.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를 바라본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다시 55절을 보십시오. 7:55-56, “스테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이면서도 또한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바라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젊고 유능한 은행 간부인 앤디가 아내의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하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주인공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고자 애를 쓰지만 부질없는 일임을 알고 탈출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감옥의 벽돌을 보면서 싫어했지. 그것은 우리를 미치게 했지. 그런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거기에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 날부터는 그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거야. 마치 감옥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 거야. 그때 깨달았지. 진짜 감옥은 내 안에 있다고. 그때 나는 결심했지. 탈출하기로”.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감옥이 자꾸 보니까 편안해 지고 집같이 여겨지고 그것 없으면 못 살 것 같게 됩니다. 위기는 내가 감옥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보는냐가 문제입니다. 자꾸 보면 그 사람이 됩니다. 자꾸 감옥을 보면 내 마음도 감옥이 됩니다. 건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건물은 처음에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다가 그 건물에 오래 살면 나중에는 건물이 사람을 짓습니다. 자꾸 보니까 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테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모양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 봅니까? 본대로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브라함과 롯도 그들이 본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둘이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양과 소가 많아졌습니다. 분가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다”. 그때 롯이 눈을 들어 바라 보았는 데 소돔쪽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당시 소돔은 아무 비옥한 곳, 물좋고 정자좋은 곳이었습니다. 마치 애굽들처럼 물이 넉넉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롯이 떠나고 나니 아브라함은 갈 데가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광야가 보였습니다. 광야에 무엇이 있습니까? 풀이 있습니까? 물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13:14,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롯은 소돔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광야를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물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얼마후 소돔은 불과 유황으로 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받았습니다. 본대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스테반처럼 예수님을 바라봅니까? 바라보면 닮습니다. 스테반이 예수님 바라볼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59-60절입니다. 7:59-60, “그들이 돌로 스테반을 치니 스테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무릎를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스테반은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기전 겟세마네동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되도록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를 더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은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스테반은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으나 죄는 사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죄는 예수님만 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했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죽음의 순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처럼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패트릭 존스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패트릭 존스톤) . 고난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아무 이유없이 핍박당하고 무시당했습니까? 가끔 나만 당하는 슬픔이 있습니까? 하늘의 주님을 바라 보세요. 예수님은 지금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눈은 지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신 분, 그 분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를 버려야 세상을 살린다

스테반이 보여준 세 번째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60절입니다.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테반은 아무 죄없이 죽었습니다. 참 억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긴 역사를 보십시오. 죽은 자가 세상을 다스립니다. 역사의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자기를 버린 자입니다. 억지로 버리면 타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버리면 희생입니다. 계란도 자기가 스스로 깨지면 부화가 됩니다. 그러나 남이 깨뜨리면 후라이가 됩니다. 5:13-14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아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니”. 소금과 빛이 무엇입니까?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여 맛을 냅니다. 녹지 않으면 맛도 낼 수 없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올리브 기름으로 밝힙니다. 해마다 9월이면 이스라엘 농부들이 올리브를 땁니다. 올리브를 따면 그것을 씯고 찧어 부숩니다. 아주 옛날에는 올리브를 돌위에 올려 놓고 사람이 일일이 발로 밟거나 절구를 이용하여 찧었습니다. 그 후에는 무거운 돌로 눌러서 짯습니다. 올리브 열매위에 무거운 돌을 덮고 누르면 기름이 나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라는 뜻을 눌러서 짠다는 말입니다. 빛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올리브를 찧고 부숴서 나옵니다.

 

영어 단어에 영향력이란 말이 있습니다. "influence"라고 합니다. 이 말은 ”flu" “흘러가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in flu 하니까 안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flow in”, “안으로 유입되는 것입니다. “독감이란 단어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influenza”. 무엇이 안으로 흘러갔느냐? 감기 균이 안으로 흘러갔습니다. 감기균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influence", 영향력은 안에 들어간 것이 다시 나온 것입니다. 누가 세상을 살립니까? 자기를 버린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남에게 들어가 다시 나옵니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영향력이 됩니다. 스테반의 죽음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입니다. 7:58절을 보십시오. 7:58,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당시 사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테반이 죽는 장면을 옆에서 다 지켜 보았습니다. 사울은 그때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에 스테반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8:1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니라”.

 

그러나 막상 스테반이 기도하며 죽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어가는 스테반의 모습을 통해 엄청난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신앙은 달랐지만 , 대단하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저렇게 죽게 하는가?”. 그 후 사울이 하나님께 돌아와 바울이 된 후 스테반의 영향력이 그에게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스테반의 정신이 그 속에 들어가 in flu 했습니다. 평생 스테반의 정신으로 선교했고 마지막에 로마에서 스테반처럼 순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장면입니다(그림3). 손을 뒤로 묶이우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아마 죽어가면서도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 주여 저들의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기도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입니다.

 

스테반의 영향력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복음 전파에 불을 붙였습니다. 8장에 보면 스테반의 일로 인해 핍박을 받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지역을 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를 전도해 에티오피아를 지상에서 가장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또 그 영향으로 안디옥교회가 생깁니다. “, 한 사람이 죽어 세상을 살렸습니다”. 바울 한 사람을 살려 그리스, 로마를 살리고 전도자들을 일으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스테반 자신은 죽어 예루살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그로 인한 영향력은 민들레 홀씨처럼, 태평양의 파도처럼, 전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스테반 한 사람만 죽이면 기독교는 끝난다 생각했지만 스테반이 죽음으로 오히려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믿는 우리의 삶을 한마디로 오스왈드 샌더스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얻는 것으로 살고, 잃는 것으로 살린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얻는 것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무엇이나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더 구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인해 잃는 것도 있게 하옵소서”. 그동안 우리는 너무 얻는 것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제 무엇을 좀 버릴까 무엇을 좀 잃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스테반처럼 꼭 순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피흘리는 순교말고 희생하는 순교는 불가능할까요?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좀 버릴까요를 기도해야 합니다. 개인이 그래야 하고 교회가 그래야 하고 한국교회가 그래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시간을 조금 버릴 수 없습니까? 선교를 위해 물질을 드릴 수 없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 지식, , 충성을 드릴 수 없습니까? 그래서 얻는 것으로만 살아온 우리가 조금 잃는 것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까?

 

누가 최후 승리자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누가 고난속에서도 끝까지 승리합니까? 하늘의 예수님 바라보는 자, 보좌에 앉으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는 자,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역사를 새롭게 하는 승리자입니까? 자기를 버려 남을 살리는 자, 얻는 욕심으로 살지 않고 잃는 기쁨으로 사는 자, 몸도 물질도 희생도 시간도 사랑으로 잃고 잃고 잃어 예수님처럼 스테반처럼 사는 자, 그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승리자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