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5:1-11 2012.6.10(일)
말씀에 의지하여
6월 둘째 주일입니다. 6월도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요즘 일하시느라 바쁘시죠?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우리가 바쁘게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도 한 분을 만났는 데 아침 7시에 출근하여 퇴근은 대중이 없답니다. 8시에 퇴근하면 빨리 퇴근하는 것이랍니다. 보통 10시, 11시, 어떤 때는 야근도 한답니다. “그러면 월급을 더 많이 줍니까?” 했더니 그렇지도 않답니다. 오히려 사람을 줄이는 추세에 있기 때문에 일을 더 하는 것을 불평할 틈도 없답니다. 그래서 주일 하루 쉬는 데 그 하루를 교회 나옵니다. 평소에 신자가 교회나오는 것을 당연히 여겼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즘 T.V에 그런 것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뛰면서 손을 모아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일주일 내내 일하고 주일날 교회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 먹고 살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 말대로 부자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분이 부자 아빠가 되는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부자 아빠가 되는 것 어렵지 않답니다. 확실한 방법 세 가지가 있답니다. 첫째 부자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둘째 부자 아내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셋째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아들 이름을 “부자”로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 이름이 “부자”기 때문에 아빠는 항상 “부자 아빠”랍니다. 아직 아들을 낳지 않은 분은 그렇게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 뿐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부자되는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저는 지난 목요일, 우리 교회안에 있는 예수영성대학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영성훈련을 했습니다(영상). “말씀묵상”을 주제로 L.A의 강준민 목사님이 오셨는데 묵상에 대한 이야기하고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눅5장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경계할 것은 “이 말씀은 내가 잘 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성경 읽을 때 거기 나오는 이야기를 잘 알면 성경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 이름을 안다고 그를 잘 압니까? 아닙니다. 이름은 그 사람을 아는 가장 기본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스토리를 알면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안다고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내 말씀이 되어 내가 그렇게 살기전까지는 그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도 말씀을 읽었는 데 쓱 보니까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은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는 데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해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잠기게 잡았다“.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많이 들었고 설교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고기잡는 사람입니까? 제가 갈릴리바다에 삽니까? 아닙니다. 저는 고기잡는 사람이 아니요 목회자입니다. 저는 갈릴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고 고기잡이가 문제가 아니라 목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여러번 읽고 또 읽자 상상이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와 거기서 일하는 어부들을 떠올랐습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의 초췌한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생각났는 데 베드로의 가족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혼했고 장모님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장모는 몸이 아팠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에게는 딸이 있었는 데 예수님이 그 아이를 예뻐해서 “어린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하고 안아 주었던 바로 그 아이랍니다. 갑자기 베드로의 딸이 생각나자 베드로가 고기못잡은 것이 심각해 졌습니다. 그렇게 고기를 못잡으면 장모는 어떻게 치료하며 딸은 어떻게 키웁니까? 빈 손으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베드로의 축쳐진 어깨가 보이는 듯 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니까 상황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돛을 단 요트들이 떠다니는 한가한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가정의 생존이 달린 심각한 생존의 현장이었습니다.
언제나 성경의 생명은 그 속으로 들어가야 만납니다. 성경을 쓱 보면 옛날 이야기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옛날 이야기해주려고 쓰여진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늘의 이야기요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성경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 내가 거기 있고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몇 번을 읽고 또 읽는 데 단어 하나가 제 가슴에 확 와닿았습니다. “수고”라는 단어입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되 선생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수고하였으되
평소에는 이 단어가 제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기 못잡은 것은 안됐지만 그것이 그에게 그렇게 큰 “수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베드로에게 큰 “수고“였습니다. ”수고“란 헬라어로 ”코피아오“, 힘들게 일한다는 뜻입니다. 노동한다는 뜻입니다. 일은 많이 하는 데도 성과가 없습니다. ”코피아오“, 우리 말로 ”코피가 나요“ 하는 말을 줄인 것 같습니다. 그날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코피나게“ 일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이 “수고”란 말이 제 마음에 들어오자 말씀은 서서히 제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2천년전 갈릴리 바다에서 “코피나게” 일했지만 별로 고기는 잡지 못해 허탕친 베드로는 바로 저였습니다. 이 말씀을 읽은 전날, 지난 수요일, 저는 현충일이었지만 교회에서 하루종일 일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집중해서 제자훈련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인도 목회자 세미나에 쓸 교재와 말씀도 몇 시간 준비했습니다. 교인도 몇 사람 만나고 책도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녁 11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잠시 쉬고 또 나와 하루 종일 영성훈련을 했습니다. 제 하루 하루가 이렇습니다. 신자들은 주일날 설교하는 저를 보고 “목사님은 평일날 무엇을 하세요?” 하고 묻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분의 얼굴이 너무 순진해 같이 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인생을 수고하며 삽니까? 문제는 그렇게 수고했는 데도 성과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되 선생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수고의 대가가 있기만 하면 우리는 아무리 수고해도 피곤치 않습니다. 자식키울 때 허리가 끊어져도 자식이 잘되기만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성과가 없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끔 그렇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잘 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해도 별 성과가 없습니까? 밤새 그물을 던졌는 데 그물에 고기가 없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일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일터로 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아닌데 하면서 또 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생긴 것이 일중독입니다. 미국의 클라인벨이라는 상담학자가 일중독의 몇 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첫째 쉬는 것은 잠간 쉬고 일하는 것은 오래한다. 둘째 일하다가 쉬면 신경과민이 되고 심지어 죄의식까지 느낀다. 셋째 한번 일을 하면 완벽하게 해야 하고 조금만 잘못되면 불안하다. 넷째 적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고 한꺼번에 큰 일을 한다. 다섯째 저녁에나 주말에도 일을 집으로 가지고 가고 휴일에도 일한다. 여섯째 자기가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많은 정당한 이유들이 있다. 일곱째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내며 그것이 곧 창의적인 삶이라고 믿는다. 여덟째 자기관리나 휴식을 위해 투자한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한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일만 하는 사람의 일반적 특징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로 살면서 가끔 경험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분명 행복하고 감사한데 일에 몰두하다 보면 행복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교인이 눈에 보이게 말씀대로 안 삽니다. 직분은 중진인데 교회도 잘 안나오고 기도도 거의 안 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적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을 만나 한참 그것을 걱정했더니 그 집사님이 저와 헤어진 후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목사님은 언제나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우시겠습니까? 목사님은 다른 사람이 지은 죄나 실수에 대해 항상 너무 걱정하는 나머지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다는 걸 아십니까?”.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사람은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입니다. 제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알지만 또한 지나친 노심초사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안 것입니다. 신자보다 못한 목사가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나도 소유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두 번째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세 번째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실제 살아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은 내려놓아야 행복합니다. 조금씩 더 내려놓아야 행복합니다. 의사 이시형 박사가 쓴「내 안에는 해피니스 폴더가 있다」에서 “멈춤의 힘”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힘은 멈춤에서 나옵니다. 심호흡을 할 때도 얼마간 멈출 때 힘이 생깁니다. 음악도 쉼이 있어야 여운을 즐길 수 있습니다. 춤도 정지의 순간이 없으면 춤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일상으로부터의 멈춤, 달리는 것보다 더 필요한 생활의 힘입니다”. 일로 수고하시는 여러분,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행복한지 물으십시오. 달리기만 하지 말고 잠깐 잠깐 멈추십시오. 자동차도 기름이 떨어지면 멈추고 사람도 아프면 멈춥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기름이 있을 때 멈춰야 다시 갈 수 있고 건강할 때 멈춰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래서 물었습니다. “나는 왜 수고하는데도 고기는 못잡는가?” “나는 왜 열심히 사는 데도 행복하지 않고 걱정만 앞서는가?” 제가 이 말씀을 쳐다보는 순간 한 구절이 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5절, 눅5:5,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렇습니다. 이 말이 해답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너무 평범하여 비범한 해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사실 제대로 된 교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목회자는 아마 더 할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끼고 다니고, 설교할 때 성경 펴고 나름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저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충분히 읽지 못했습니다. 혹시 읽었어도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아침마다 큐티하는 것은 저의 오랜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했고 제 목회와 영성을 붙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가끔 “이만 하면 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가끔은 너무 피곤해도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을 철저히 붙들지 못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해야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은 우선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우선 말씀 읽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No Bible, No Bleakfast입니다. 성경없으면 아침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성경암송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생각하고 암송카드도 다시 샀습니다. 한때 60귀절 성경암송카드 가지고 주야로 외었던 적이 있습니다. 다시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해야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큐티식으로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주신 말씀을 읽고 각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무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6-7월 수요예배는 교우들과 말씀묵상의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묵상의 원리와 실습을 통해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말씀을 읽을 뿐아니라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오래 전에 어느 교회에서 그룹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룹에 연예인 구봉서 장로님도 같이 있었는 데 한 남자가 자기는 다 믿어도 동정녀 탄생만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인도자가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못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아요? 성경이 비과학적인 책인가? 그러면 어떻게 지성인들은 성경을 믿죠?” 그러자 옆에서 참고 있던 구봉서 장로님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임마, 남편인 요셉도 마리아를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 말씀에 의지한다는 말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성경에 쓰여진 글자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의 삶은 하나님 믿음에 대한 결과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능력있는 하나님을 믿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적의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치유의 하나님을 믿으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성품이 달라집니다. 지혜의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 살이가 달라 집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지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 하나님 관점, 하나님 시각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가 5월 어느 주일, 야외예배를 계획했습니다. 전 교인이 야외에서 예배드리는 데 하필 그날 따라 억수로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 모처럼 야외예배가는 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야외예배장에 도착했는 데 비가 더 옵니다. 교인들은 여기 저기서 비를 맞아 비맞은 장닭처럼 되었습니다. 도저히 예배가 되지 않았습니다. 담임목사가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왜 하필 오늘입니까? 우리 예배를 망쳐서 좋을 일이 무엇입니까? 비가 내리기도 하시고 비를 그치게도 하시는 하나님, 제발 비를 그쳐 주옵소서”.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교인들과 예배드리러 나왔다면서 왜 예배를 위해서는 한 마디도 기도하지 않느냐? 오늘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비냐? 나냐? 날씨냐? 예배냐?” 그때 목사님이 회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알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비가 오고 안 오고가 아니라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비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만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날 그 교회는 억수로 내리는 비가운데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한다는 것은 성경 귀절을 인용하여 자기 생각을 펼쳐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매사를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실패와 성공속에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사업이 잘되느냐 못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까가 중요합니다.
목회자인 제가 가끔 스스로 속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한 생각이 하나님이 원하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가끔은 자기가 생각한 어떤 계획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께 강요한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내가 나다”. 이것이 제가 발견한 나 자신입니다. 다같이 “내가 원하는 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내가 나다”. 내가 원하신 한신교회가 한신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한신교회가 한신교회입니다. 내가 원하는 사업이 내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사업이 내 사업입니다. 내가 원하는 미래가 내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미래가 내 미래입니다.
그래서 짐 콜린스가 아주 좋은 말을 했습니다. “좋은 것(good)은 위대한 것(great)의 적이다”.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갈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속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모범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것을 위해 자신의 좋은 것을 버렸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물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좋은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도 기도했고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주야로 말씀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믿으십시오.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발견하십시오. 나의 좋은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것을 좇아가십시오.
예수를 따르니라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다가 순간적으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문학이나 드라마에서 반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독자나 청중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스토리가 급진전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밤새 수고했으나 고기를 못 잡았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상황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여기에 대하여 성경이 답합니다. “말씀을 의지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이제 부터는 말씀에 의지하여 고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이 이 말씀을 읽었다면 “지금까지는 내 머리를 의지해서 공부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지혜로 공부해서 기필코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현대, 삼성에 취직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사업가가 이 말씀을 읽었다면 ”아, 지금까지는 너무 내 머리만 의지하고 사업했구나. 이제는 나도 성경 읽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나오면서 부지런히 사업해서 올해 안에 100억 매출을 달성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지금까지는 너무 내 생각으로만 목회했구나. 그래서 내가 힘들고 열매도 없었구나. 이제부터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목회해야겠다. 그래야 나도 행복하고 교회도 부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침마다 성경도 읽고 성경도 암송하고 좀 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11절에서 갑자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눅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기본적으로 붙잡은 것은 물고기였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 못잡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만일 말씀에 의지하기만 하면 반드시 물고기 잘 잡겠다고 생각한 우리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속에는 물고기로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물고기를 가슴에 품었고 물고기 잘 잡는 방법으로서 “말씀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밖에 나가서 그 방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애지 중지했던 물고기를 베드로는 통째로 예수님 앞에서 바칩니다. 다시 11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모든 것을 버립니다. 배도 버리고 힘들게 잡은 물고기도 버리고 마가복음을 보면 아버지까지 버립니다. 다 버리고 11절 마지막, “예수를 따르니라”로 마칩니다. 여러분, 조금 허무하지 않습니까? 물고기 하나 붙잡으려고 끝까지 버텼는 데 모든 물고기 다 버리고 예수를 따르다니 베드로는 우리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직장, 일터, 희망, 미래를 모두 버리라는 뜻입니까? 지금까지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머리깍고 산으로 가라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제 예수 잘 믿어 사업 좀 잘 보려고 했는데, 말씀에 힘입어 공부도 잘하고, 말씀대로 목회도 잘 해보려고 했는 데 다 버려야 하다니 이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베드로의 이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물고기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그 무엇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보다 소중하고 사업보다 소중하고 유학보다 소중하고 결혼보다 소중하고 목회보다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교회안에서 직분을 받고 임직할 때 이렇게 묻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제 예수님을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할 것인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이제 어떻게 더 예수님의 사람이 될 것인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평생 물어야 할 질문은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주님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의 일을 좋아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교회 일에 헌신하기 위해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헌신하기 위해 직분을 받았습니다. 일에만 헌신하고 예수님께는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하다 다투고 일 때문에 지치고 일없으면 안 나옵니다. 레너드 스위트가 말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좋아하지만 교회는 교회만 좋아한다”. 그렇습니다. 이제라도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좋아하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도움의 장소>에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예수님 아닌 우정, 축복, 영적 체험, 교회사역등으로 자신을 붙잡으려고 하면 결국 그것들이 자신을 부패시킬 것이다. 예수님 아닌 어떤 사랑도 썩는다.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것만 우리를 살린다”.
여러분, 열심히 일해서 사업의 물고기를 많이 잡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에 목숨걸지 마십시오. 예수님 아닌 것에 목숨걸면 그것이 우리를 부패시킵니다. 교회안에서 좋은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치케 특정한 사람을 예수님 보다 더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실패합니다. 교회를 섬기되 교회 일에 목숨걸면 결국 그 일이 우리를 부패케 할 것입니다. 8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풍성한 물고기를 잡고도 물고기앞에 무릎꿇지 않고 예수님앞에 무릎꿇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물고기 잡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잡되 예수님께 경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10절 마지막을 보십시오. 눅5:10,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물고기에 붙잡히는 것보다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정말 이런 신자를 보고 싶습니다. 세상 일을 열심히 하되 예수님께만 부릎꿇는 사람, 교회를 사랑하되 교회 일보다 예수님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 말씀에 의지하여 사업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공부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되 언제나 모든 것을 예수님앞에 버릴 줄 아는 사람,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 그런 신자, 그런 직분자, 그런 목회자를 보고 싶습니다, 저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꿈입니다.
* 찬양(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1-2절 앉아서 부르고 정말 그렇게 살기로 다짐란 성도들 자리에서 일어나 3절, 1절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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