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8:1-8 2012.6.24(일)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
여러분은 세상을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오래전에 한 선교사가 영국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몇 년간 그야말로 열심히 전도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믿고 변화되었습니다. 그 도시에 무신론자가 하나 있었는 데 이 사람이 자꾸 선교사를 괴롭힙니다. 이 문명 세상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비웃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동원하여 선교를 방해합니다. 참다 못해 선교사가 편지를 썻습니다. “선생님, 저로 하여금 더 기도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신앙과 선생님이 믿는 무신론이 어떻게 다른지 토론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예수믿고 변화된 사람 100사람을 데리고 나갈테니 선생님도 무신론을 믿어 변화된 사람 100명을 데리고 나오십시오. 만일 100명이 다 안되거든 10명도 좋고 그것도 안되면 1명도 좋습니다”.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선교사는 100명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무신론으로 변화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교입니다. 이 세상을 바꾼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경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복음입니다. 오래전에 로마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때까지 로마는 다신교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만신전”이 있습니다. 모든 신들을 모셔놓은 신전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자 다신교는 무너지고 하나님 한 분을 믿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독일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 알기 전에 독일은 게르만족, 야만인의 땅이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그 나라에 괴테, 칸트, 바하, 헨델, 종교개혁,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래전에 영국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복음이 들어가기 전 영국은 바이킹, 해적의 나라였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영국은 섹스피어, 대영제국, 의회, 청교도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1620년, 120명의 청교도들이 배타고 미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그때까지 미국은 황량한 인디언의 나라였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죠지 와싱턴, 아브라함 링컨, 민주주의가 꽃피우고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127년전 한국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때까지 한국은 미신과 우상의 나라였습니다. 복음이 들어오자 세브란스, 이화여대 생기고, 독립운동, 계몽운동, 문화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 한국이 달라졌습니다. 그 모든 변화의 시작에 예수님의 복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시절, 하나님의 선교가 에루살렘과 유다의 경계를 넘어서 사마리아까지 간 위대한 역사를 봅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핍박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절입니다. 행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지난 주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 집사 스테반의 순교를 보았습니다. 그는 논리정연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예수님처럼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핍박은 거기서 끝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테반의 죽음을 계기로 유대인들은 더 집요하게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선교는 반드시 고난을 통해 일어납니다. 고난없이도 선교가 이루어지면 좋은 데 선교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는 반드시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고 일어납니다.
문제는 고난과 핍박이 올 때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크게 네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핍박입니다. 사도 바울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박해에 편승하여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3절입니다. 행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여기서 “잔멸했다”는 말은 포도원에 뛰어든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드는 모양을 가르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스데반을 장사한 사람들입니다. 2절입니다. 행8:2, “경건한 사람들이 스테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두 번째 사람들은 스테반의 순교를 슬퍼하며 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울었다”는 말은 가슴을 치며 울었다는 뜻입니다. 눈물만 조금 흘린 것이 아닙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한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사람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 교회를 지켰습니다. 1절에서 “사도외에는 다 흩어졌다” 고 했습니다. 그것이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들인 사도들은 고난당하는 교회를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켰습니다. 6.25가 되어 평양이 공산당치하가 들어가자 많은 사람이 월남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산정현 교회 조만식, 유계준 장로는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여수 애양원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모두 순교했습니다.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사람들, 그들은 충성스러운 종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흩어진 자들입니다. 다시 1절을 보실까요? 행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흩어졌다”는 말이 나옵니다. 1절에도 나오고 4절에도 나옵니다. 안디옥교회가 생겨난 행11:19절에도 나옵니다. “흩어졌다”는 이 말은 핍박 때문에 사람들이 사방으로 퍼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퍼진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헬라어 동사는 “디아스페이로”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동작을 의미합니다. 박해로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씨를 가진 성도들이 세상에 씨를 퍼뜨리기 위해 펴졌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서워서 현장을 피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러 떠난 것입니다. 그냥 몸만 떠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씨입니다.
선교는 다른 것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엇을 주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씨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떨어뜨리기 위해 갑니다. 떨어뜨리면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고난이 올 때 부화뇌동하여 같이 핍박합니까? 고난이 올 때 가슴을 치고 울기만 합니까? 고난이 올 때 주어진 책임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합니까? 고난이 올 때 그것을 기회로 알고 흩어집니까? 선교는 흩어진 사람들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중의 하나가 빌립 이었습니다. 오늘 거룩한 선교주일에 복음의 씨를 들고 흩어진 빌립처럼 오늘 파송되는 단기선교사들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 모두 하나님의 선교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빌립입니다. 그가 행8장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사마리아로 갔고 그가 광야로 가서 에피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8장에서 빌립만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빌립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은 본래 선교사가 아닙니다. 행6장에 보면 그는 7집사중 하나입니다. 그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그가 선교의 꿈을 안고 선교훈련을 받거나 일찍부터 선교에 헌신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종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감동이 임했습니다. 자기 동료 스테반이 순교하는 것을 보면서 “아, 스테반도 주님을 위해 죽었는 데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핍박은 더 심해지고 마음에 하나님의 감동은 더 크게 임했습니다. “에루살렘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그래서 그는 감동을 받고 선교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여러분,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입니다. 선교는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있고 그 뜻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나에게 임하면 내가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선교는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와만 관계됩니다.
어떤 목회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베트남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다고 생각했는데, 3년여 동안 열매가 없는 사역을 하면서 큰 실망과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오산리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왜 저는 안되는 것입니까? 제가 베트남에 갈 때 분명 저를 불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선교가 안됩니까?” 그랬더니 기도하다가 그런 감동이 왔답니다. “혹시 내가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랑했지만 더 사랑하라면 나는 못해. 나는 자신없어”. 그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혹시 제가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했지만 그 이상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래도 네가 베트남에 가야 할 이유는 네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때 선교사님은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 시작했답니다. 늘 사역의 주체가 자신이었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순간 깨달았답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전도하고, 내가 사랑하고”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의 생각하고, 하나님이 전도하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사역의 주권을 하나님께 돌리는 순간, 그는 선교의 자신감과 능력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빌립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은 일찍이 선교사로 서원한 적도 없고 선교훈련을 받은 적이 없지만 어느날 하나님이 감동하니까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지도 그렇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지역으로 가고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당시 모든 유대인이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강제로 혼혈된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끌려간 백성들이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방인과 혼혈하여 민족의 순수성을 깨뜨렸으니 유대인들이 싫어할 만도 합니다. 그래서 눅9장에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 죽여버리자고 하는 것도 그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감동하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꾸 “사마리아로 가라. 가마리아로 가라” 하시니 피할 수 있습니까?
제가 작년 안식월 때 예루살렘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한국의 어느 교단이 목회자 성지연수를 위해 집 하나를 얻어 놓고 목회자, 교인에게 제공하는 곳인데 방이 네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목회자, 성도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하루는 저녁인데 남자 한 분과 여자 다섯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하는 데 “분당에서 왔다”고 해서 “나도 분당인데” 했습니다. 그래서 “분당 어디입니까?” 했더니 분당 샘물교회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가왔는데 사연을 듣고 더욱 놀랐습니다. 이 분들은 2007년 아프간에서 피납되어 고생한 21명중 다섯 분이었습니다. 그때 샘물교회 교인 23명이 출발하여 40여 일간 고생하다 두 분이 순교하고 21명이 돌아온 사건이 있었는 데 그 분들이 거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갔다 왔느냐고 했더니 아프간에 다시 갔다 왔다는 것입니다. 불과 4년전에 아프간에 피랍되어 삶과 죽음을 오락가락했던 위험한 땅에 이들이 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위험한 땅에 왜 들어갔어요?” 했더니 “목사님, 하나도 안 위험해요. 저희들은 아프간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이번에도 만류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기도하다가 가기로 하고 가서 봉사 잘 마치고 돌아가다가 예루살렘에 들렀어요” 하는 것입니다.
누가 말립니까? 하나님이 감동하면 아무도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라고 아프간에 대한 두려움과 상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감동하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누가 막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감동을 거역합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 많이 흘렸습니다. 그들이 잡힌 지 얼마후 그들을 붙잡은 사람들이 탈레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부 자매들은 방에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껴 우는 데 배형규 목사가 입을 열었답니다. “여러분,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전 세계의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하여 우리 중에 한 두사람을 죽일지도 모릅니다. 선전 효과를 위하여 아마 비디오를 찍으면서 총살을 할지 모릅니다. 그때 제가 제일 먼저 앞장을 서겠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때 나이가 가장 많은 장로님이 말했답니다. “목사님 순서를 좀 바꾸시지요. 저는 이제 나이도 많고 살 만큼 살았습니다. 목사님은 나이도 젊으시고, 나가셔서 하실 일도 많으시고, 우리 팀원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셔야 하니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그때 배목사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전부터 저는 나이가 들면 선교지에서 마지막 생을 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공평하게 제비를 뽑지요”. 이때 배목사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은 제자리를 넘보지 마십시오. 순교는 목사의 자리입니다”. 그날 배형규목사는 끌려가서 순교했습니다. 아, 위기의 순간, 서로 죽기를 자청했던 사람들, 누가 이들에게 그런 담대한 마음을 주었을까? 만일 죽어가는 목사를 보고 “목사님,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하는 장로가 있다면, 자기가 먼저 죽겠다는 장로에게 “장로님, 제자리 넘보지 마십시오. 순교는 목사의 자리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대가 센 목사가 있다면 한국교회가 잘못될까? 그 위험한 곳에 “그래도” 가야만 하는 사람들, 누가 보낸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빌립을 사마리아로 보내시고, 안디옥교회의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불러 선교사로 보내시고, 바울을 다시 마케도냐로 보내시고, 리빙스톤을 아프리카에, 윌리암 케리를 인도에,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으로 보내시고, 독일인 구쯜라프를 1832년에, 영국인 토마스를 1866년대에, 미국인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1885년에 한국으로 보내시고, 그리고 오늘 71명의 한신교회 단기 선교사들을 인도로, 베트남으로 보냅니다.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나님이 열매맺습니다. 이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과 함께 표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빌립이 사마리아에 갔는 데 하나님이 역사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6절입니다. 행8: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다같이 “말도 듣고 표적도 보고”. 선교는 예수님을 말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어떻게 중거합니까? 행17:1-10에 나타난 바울의 데살로니가 설교가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성경을 가지고”, 선교는 성경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선교의 도구요 무기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선교는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래서 최종 결론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드리리”. 아멘.
문제는 선교지는 말로만 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행8:7,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선교지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은 곳입니다. 오랫동안 우상과 귀신이 지배한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만으로 안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표적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믿는 우리에게 표적을 주셨습니다. 막16:17-18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그런데 이 말씀의 문맥을 자세히 보면 이 표적은 선교와 전도를 위해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16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세례받고 세례받으면 전파한다“. ”누구든지 마음으로 예수믿으면 교회에서 세례받고 세상에 나가 전도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생각한 믿음의 과정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한번 따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믿으면 세례받고 세례받으면 전도한다“. 이 셋 사이에 단절이 없습니다. 믿으면 누구나 세례입니다. 세례의 더 다른 자격이 없습니다. 세례받으면 누구나 전도합니다. 전도의 또 다른 자격이 없습니다. 세례받으면 전도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는 쉽지 않습니다. 전도나 선교는 영적 전쟁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말로만 되지 않습니다. 능력이 필요합니다. 표적이 필요합니다. 다시 8:6절, “말도 듣고 표적도 보고“, 듣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빌립을 통해 표적을 나타냅니다. 귀신을 내 쫓고 중풍병자도 고칩니다. 9절 이하에서는 마술사 시몬도 꼼짝 못하게 제압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표적 자체를 위해 표적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케냐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몇 년전 케냐 마우마우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때 선교사 두 사람이 그 지역을 통과하여 나이로비를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폭동 지역 사람들은 케냐인과 선교사들을 살해하여 시체까지 토막 낼 만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둘이 이 지역을 조심스럽게 통과해 오는 데 갑자기 차가 고장났습니다. 지금 이 지역을 얼른 빠져나가야 하는 데 차가 고장나 폭동지역의 한 복판에 놓였으니 얼마나 불안합니까? 어둠 속에서 차를 고치려 했으나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선교사 두 사람이 차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는 데 그들은 자기 전에 간절히 기도하고 성경을 폈습니다. 시편 4:8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말씀을 붙잡고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안전하게 나이로비로 돌아왔습니다.
얼마후 선교사 가족이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왔는 데 그들이 나이로비를 떠나기 전날 밤 한 케냐 목사가 그들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마우마우 지역사람들이 당신 차에 접근하여 당신들을 죽이려고 갔는 데 차에 열 여섯명이 에워싸고 있어서 무서워 그냥 돌아갔노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열여섯 사람이라고요? 우리는 둘 밖에 없었는데”. 선교사는 16명이 무엇일까 긍금하게 여기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모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중보기도팀이 있는 데 이들이 매일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명이냐고 물었을 때 선교사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16명이예요”. 16명이 주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두 선교사가 폭동지역에 있을 때도 16명이 기도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 16명을 폭도들에게 보이게 해 그들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표적은 하나님이 선교를 위하여 비상적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한편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고 한편 우리의 기도에서 옵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기도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도하면 선교지에 없어도 하나님은 선교팀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선교에 참여한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행여나 놀러 간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설교하고 전도하지 않고 무용을 하고 태권도를 해도 선교입니다. 여러분에게 전도를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치료하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무용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인형극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섬기십시오. 주님이 전도자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중에 큰 기쁨을 줍니다.
빌립의 선교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결론이 이것입니다. 행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이것처럼 선교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 이전에 그곳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 없는 곳에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들어가자 기쁨이 생겼습니다. 기쁨은 모든 삶의 능력이요 에너지입니다. 그나마 개인이 아니라 성전체가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선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 기쁨을 주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꼭 선교하려고 외국에 안나가도 선교입니다. 생활속의 선교, 일상의 선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어디서나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자, 우리가 시장에 가서 장을 봅니다.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무엇을 팔려고 옹기 종기 앉아 있습니다. 정성껏 기른 채소들을 팔아 아이들 학비를 마련하려고 쭈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깎아 달라고 하면 선교가 안됩니다. 달라는 대로 주고 천원을 더 주는 것, 이것이 “길거리선교”입니다. 택시를 탈 때 거스름돈은 받지 않고 내리는 것, “택시선교”입니다.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직장 선교”. 언젠가 부산에서 서울로 ktx를 타고 왔습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그냥 가지 말고 기도하며 가자”. 부산을 통과할 때는 “주여, 부산 사백만 시민을 축복하소서. 경북을 통과할 때는 주여, 경북 이백팔십만이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소서”. 대구를 지날 때 대구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을 결박시켜 주옵소서. 대전을 지날때 대전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주옵소서“. ”KTx 선교“.
비행기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을 통과 할 때 중국 13억원의 구원하여 주옵소서. 중국의 지하교회가 생명력을 잃지 말고 계속 부흥하여 13억이 다 구원받게 하옵소서. 인도, 몽골, 중동 지날 때 또 기도, “비행기 선교”입니다. 돈도 안들어요. 자기가 다니는 거리, 쓰레기, 오물 치우면서 “쓰레기선교”, 언젠가 길거리에서 자동차 사고가 났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소리치며 누가 잘했네 못했네 멱살을 잡았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보니까 같은 교인입니다.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그 사람이 목사라면 교회 나오겠습니까? 사고가 나면 우선 상대방이 다친 데는 없는가 물어보고 내가 주의하지 못해서 실수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감동받았는 데 마침 친구 인도로 교회 새신자로 왔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사고낸 사람이 그 교회 장로님입니다. 그 교회 신자 안되겠습니까? ”자동차 선교“입니다. 음식점에 가서 ”잘 먹었습니다“. ”음식점 선교“, 말끝마다 ”감사합니다.“ ”개콘선교“, 선교는 그 성에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가정, 직장, 도시, 나라에게 예수님으로 인해 큰 기쁨을 주는 것, 이것이 선교입니다.
이 선교에 여러분 동참하십니까? 이번에 보내는 선교에 참여해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하고 격려하고 마음으로 함께 합니까? 우리 사는 날 평생 “나는 선교사다”는 자각으로 매일 선교사 의식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기쁨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선교사, 자랑스런 한신의 선교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행8:1-8 2012.6.24(일)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
세상을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교입니다. 세상을 바꾼 것은 정치, 경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예루살렘에 스테반의 순교로 핍박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이 흩어졌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빌립입니다. 그는 최초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빌립입니다. 그가 사마리아로 갔고 그가 광야로 가서 에피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빌립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선교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명령입니다. 빌립은 일찍이 선교사로 서원한 적도 없고 선교훈련을 받은 적도 없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시자 순종하여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지역으로 가고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모든 유대인이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강제로 혼혈된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빌립을 사마리아로 보내시고, 바울을 로마로, 리빙스톤을 아프리카에,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으로 보내시고, 언더우드, 아펜젤러를 한국으로, 그리고 오늘 71명의 단기 선교사들을 인도로, 베트남으로 보냅니다.
말과 함께 표적으로 역사합니다.
빌립이 순종하여 사마리아에 갔을 때 하나님이 두 가지 방식으로 빌립을 사용하셨습니다. 행8: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여기에 “말도 듣고 표적도 보고”가 나옵니다. 선교는 예수님을 말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교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8:7,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선교지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마귀에게 빼앗긴 영적 지배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우리에게 표적을 주셨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능력이 필요합니다.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성중에 큰 기쁨을 줍니다.
빌립의 선교는 이런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행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선교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국에 안나가도 선교입니다. 생활속의 선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어디서나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늘의 기쁨을 줄 수 있다면 선교사입니다. 시장에서 깍지 않고 주는 “시장선교”, 택시를 탈 때 거스름돈은 받지 않고 내리는 “택시선교”, 기차에서 지역을 위해 기도하는 “ktx 선교”, 비행기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비행기 선교”, 직장선교, 학원선교, 수많은 선교가 있습니다. 가는 선교도 있지만 보내는 선교도 있습니다. 몸으로 가는 선교도 있지만 물질선교, 기도선교, 후원선교도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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