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3:1-12 2012.9.23(일)
성령님이 하시는 세 가지 일
신앙생활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갈5:16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좇다“라는 말은 ”페리파이테“(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가 그렇게 했습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세 가지로 우리를 돕습니다.
성령님은 사람을 세우게 합니다.
행13: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는 다양했습니다. 교회 창설자 바나바, 흑인 니게르,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 루기오, 왕족 마나엔, 그리고 사울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습니다. 교회는 경제, 지식, 지역, 인종, 교파, 신앙의 색깔에 있어서 다양해야 합니다. 교회는 다양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1절 보십시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으니.”(prophet and teacher). 당시 안디옥교회 지도자는 사람을 양육하는 영적 리더쉽을 가진 사람들이 었습니다. 교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 제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님은 기도하게 합니다.
행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여기 “섬겼다”(레이투르기야)는 말은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예배하고(2절) 다음 기도했습니다(3절). 예배는 공동체적으로 하고 기도는 개인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나 기도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목적입니다. 2절, “주를 섬겨 예배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예배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3절, “금식하고 기도할 때“ 성령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예배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욥33:31, ”너는 내 앞에서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계2:11,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셋째. 성령님은 선교하게 합니다.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최종적인 일은 선교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꼭 외국에 선교사로 가는 것만이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의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본질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은 다릅니다. 교사, 공무원, 주부, 직장인, 하나님이 보낸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이 선교입니다. 선교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 둘째 성령의 능력입니다. 은혜는 선교의 이유요 능력은 선교의 동력입니다. 이 가을, 영혼의 추수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 친구, 이웃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1)
성령님은 사람을 세웁니다. 당신도 성령님의 능력으로 세워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지도자를 세우는 조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예배, 기도, 십일조, 전도, 봉사, 목장, 훈련, 성품, 리더쉽, 청지기).
(2) 예배하고 기도하는 생활이 왜 중요합니까? 당신은 얼마나 예배하고 기도합니까?
(3) 선교가 무엇입니까? 당신도 평신도 선교사라고 생각하고 삽니까? 선교의 두 원리가 당신의 선교적 삶에 어떤 의미를 줍니까?
행13:1-12 2012.9.23(일)
성령님이 하시는 세 가지 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은 우리는 쉴새없이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앞에 마귀가 어두운 얼굴로 다가왔답니다. 자세히 보니까 다 죽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물었습니다. “마귀야, 너는 왜 오늘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왔느냐?” 그랬더니 마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요즘 너무 따분하게 지내거든요”. “아니, 왜 따분하게 지내느냐? 사람들을 유혹해서 죄짓게 하는 일이 네 일이 아니냐?”. 마귀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게 제 일이죠.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제가 유혹해야 사람들이 죄를 지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제가 유혹하기도 전에 죄를 짓는 바람에 제가 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따분하겠습니까?” 마귀의 말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는지. 우리도 얼마나 완악해 졌는지 우리가 생각해도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요즘은 마귀가 유혹도 하기 전에 죄를 짓습니다. 죄가 관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죤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쳔”이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들어가 보니까 방이 온통 먼지로 덮혀 있습니다. 잠시 후 하녀 한 사람이 나오더니 빗자루로 방을 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빗자루로 쓸면 쓸수록 먼지가 더 납니다. 결국 하녀가 돌아가고 또 한 사람이 나왔는 데 이 사람은 빗자루로 방을 쓸지 않고 물을 뿌리며 청소합니다. 물을 뿌렸더니 먼지도 안나고 깨끗하게 방이 청소됩니다.
이때 한 사람이 나와서 이 장면을 해석합니다. “방은 인간의 마음이고 먼지는 죄로 덮혀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방을 쓸고 있는 하녀는 구약의 율법이요 인간의 노력인데 인간이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먼지가 더 나온다. 두번째 나와서 청소한 사람이 있다. 그가 성령이시다. 성령님은 마른 빗자루로 먼지를 쓸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쓸면 쓸수록 더 먼지가 나온다는 것을 그는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물을 뿌린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리고 청소했더니 방이 깨끗해졌다.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정결하게 하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적 노력만으로 개인이나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성령님입니다. 갈5:16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좇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페리파이테“입니다. 이 말은 ”페리“, 함께”. “파이테” “걸어가는 것”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입니다. Walking with Holy Spirit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실제 그렇게 살았던 교회가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입니다. 행11장에서 안디옥교회가 생기면서 보였던 세 가지 모습을 우리는 이미 들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예수님을 중심한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행13장이 있습니다. 13장에 계속해서 나오는 키워드가 “성령”입니다. 13:2절 첫부분입니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4절입니다. 행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로 내려가”. 그리고 9절입니다. 행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것이 성령님으로 시작하여 성령님으로 끝납니다. 13장에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납니다. “성령님은 지시하고, 사람들은 순종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우리 개인의 삶과 교회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안디옥교회에서 이루어진 성령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1절을 읽겠습니다. 행13: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성령님은 사람을 세우게 합니다.
1절에 나타난 사람들은 당시 안디옥교회의 대표적인 사람 몇을 소개합니다. 이름을 보면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그리고 사울입니다. 이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우선 그 다양성에 놀랍니다. 바나바는 교회 창설자입니다. 덕과 관용을 갖춘 안디옥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니게르”는 아마도 “니그로”와 같은 발음일 것입니다. 본명은 시므온입니다. 루기오 역시 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온 사람입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리비아, 아프리카 북단 알렉산드리아 서쪽에 있습니다. 마나엔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입니다. 마나엔은 어렸을 때 헤롯 안티바스와 같은 왕궁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갈라졌습니다. 헤롯 아그립바는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 되고, 마나엔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입니다. 열심있는 유대교인이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개종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다양했습니다. 인종으로는 유대인, 비유대인, 흑인, 사회적으로는 왕족, 평민, 학벌로는 사울같은 박사, 보통사람, 종교적으로는 극단적인 바리새파, 온건 합리주의 사람들, 지역적으로는 안디옥, 이스라엘, 아프리카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다양성이 안디옥 교회의 생명이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습니다. 교회는 돈많은 부자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부자가 함께 모여 서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사회적 명사, 지식인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신앙의 색깔도 다양합니다. 진보, 보수, 따뜻한 보수, 온건한 진보, 다같이 모입니다. 우리는 진보적인 사람만 모인다. “운동권 교회”입니다. 우리는 보수적인 사람만 모인다. 사람들이 “꼴통보수교회”라고 부릅니다. 기장, 예장, 감리교, 성결교 다 모입니다. 본래 기장, 예장, 감리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 기장 가정에서 태어나면 가장사람입니다. 자라면서 감리교 다녔으면 감리교인입니다. 내 교단, 내 교파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교파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지역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판교 개발 이전에는 특정 지역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교회중에서 가장 지역색을 뛰어넘는 교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판교 개발 이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서울 경기, 다 모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열린 마음과 관용입니다. 자기 주장을 덜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획일성에 있지 않습니다. 신학적, 지역적, 교파적 획일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은혜의 바다입니다. 누구나 들어 올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들어오면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 자랑스러운 전통이 이것입니다. 한국은 본래 양반과 상놈이 철저하게 구분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885년 기독교가 들어오자 이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마팻이 서울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는 양반, 상놈 다 받는 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박동열이란 백정의 아들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백정의 아들은 그 당시로는 사람으로 취급도 안할 때입니다. 그러나 마팻 선교사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친구 의사에게 급히 연락해서 박동렬이를 살렸습니다. 그 의사가 누군가 하면 애비슨이었습니다. 애비슨은 당시 고종황제의 시의였습니다. 여러분, 황제의 시의가 백정의 아들을 고치러 급히 가방들고 왕궁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100년전 한국교회 모습입니다. 결국 박동열이는 애비슨의 치료를 받고 나았고 그 가족은 감동받아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박동열이는 1907년,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고 그 아버지는 축복받아 사업가가 되고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 교회, 누구나 품는 교회, 그것은 한국교회 자랑스런 전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양하다고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성령은 교회안에 다양성을 예수님안에서 품게 하면서 또한 그 사람들을 말씀과 은혜로 훈련시킵니다. 1절 첫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으니.” 안디옥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선지자와 교사였습니다, prophet and teacher. 당시 prophet,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teacher는 신자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 선포자와 양육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안디옥교회를 이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양육하고 훈련시킨 영적 리더쉽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떻게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요? 행11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1:26절입니다.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훈련받았습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모시고 와 둘이 함께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그 제자들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 제자가 그리스도입니다. 군중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배참석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따라 합시다. “제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은 말씀의 영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제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받고 세움받아야 합니다. 골2:7절입니다. 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다같이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대로”. 직분과 지도력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직분은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은 받는 것입니다. 직분은 임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은 세워지는 것입니다. 직분은 사람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력은 하늘이 주는 것입니다. 직분은 position이고, 리더는 influence입니다. 교회안에서 position을 얻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포지션이 리더는 아닙니다.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리더입니다.
교회안에서 어떻게 좋은 리더쉽을 키워갈 것이냐 하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돌아가신 고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공예배 참석과 십일조 하는 사람, 교회 하나를 개척하는 사람, 유산을 남기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 죽은 후 시신을 기증하는 사람, 목사님은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준이 보통 사람에게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세울 때 10가지 항을 객관화하여 당회에서 점수를 주고 선발해서 교인들이 결정하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10가지에 각 10점씩이고 100점 만점입니다. 첫째 예배입니다. 주일예배, 수요예배등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입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금요기도, 새벽기도등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입니다. 셋째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넷째 전도입니다. 불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다섯째 봉사입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삶의 실천입니다. 여섯째 목장입니다. 주어진 소그룹 목장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생활입니다. 일곱째가 훈련입니다. 교회에서 정한 커리큐럼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태도입니다. 여기까지는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여기까지는 자료가 다 나와 있습니다. 나머지 세 개는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그래서 당회원, 목회자가 함께 평가하여 합산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성품입니다. 다른 사람과 잘 조화를 이루는 균형잡힌 인격입니다. 아홉째는 리더쉽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이끄는 영적 영향력입니다. 마지막이 청지기입니다. 가정, 직장, 세상등에서 덕을 이루며 청지기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가의 평가입니다. 이렇게 해서 점수가 나오면 점수가 높은 사람순으로 교인들 앞에 내고 투표를 받습니다. 이렇게 몇 번 지도자를 뽑는 동안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은 다 되어도 이것 안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 참석하고 기도하는 생활이 되지 않으면 다른 것 다 좋아도 교회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 지도자는 세상 지도자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가 생명입니다.그 예배와 기도를 하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성령님입니다. 2-3절입니다. 행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3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님은 기도하게 합니다.
2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했습니다. 여기 “섬겼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일하다, 봉사하다”라는 뜻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레이투르기야”, 곧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안디옥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3절로 가면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자, 순서가 있습니다. 기도가 먼저가 아니고 예배가 먼저입니다. 순서는 예배하고 다음 기도합니다. 왜 이 순서가 중요합니까? 예배와 기도는 둘 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특징이 다릅니다. 예배는 공동체적으로 하고 기도는 개인적으로 합니다. 예배는 일정한 시간에 하고 기도는 아무 때나 합니다. 두 가지 다 하나님과의 관계안에 있지만 먼저 예배가 있고 다음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의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혼자 드리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같이 드리는 예배가 더 중요합니다. 예배가 되어야 기도도 됩니다. 예배는 공동체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요 기도는 개인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두가지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나 기도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목적입니다. 2절, “주를 섬겨 예배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예배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3절, “금식하고 기도할 때“ 또 성령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예배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 감정을 발산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예배드립니다. 내 소원 성취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예배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강원도 태백에 가면 “예수원”이 있습니다. 미국의 토레이 신부가 세운 것입니다. 원래 이 토레이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부흥사였습니다. 그가 약 100여년전 무디를 도와 성령운동하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했던 좋은 기도가 있습니다. “성령님, 하나님이 만일 제가 좋아하는 일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주신 일을 제가 좋아하게 하옵소서”. 그 토레이의 손자가 1965년에 한국에 와서 예수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토레이는 하루 24시간, 365일을 성령을 의지했답니다. 토레이는 너무 성령을 의지한 나머지 설교도 원고를 쓰지 않았답니다. 설교의 윤곽만 잡아 놓고 늘 성령님께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설교시간이 되었는 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아 서재에서 계속 무릎꿇고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모시러 와서 할 수 없이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준비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아직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설교단에 막 올라 갔는 데 그때부터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설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설교를 마치자 교인들이 악수하면서 말합니다. “오늘 설교에 너무 은혜받았어요. 혹시 설교 원고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설교 메모라도 있나요?” “그것도 없는데요”. 그는 철저히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가 원장으로 있으면서 항상 괴로웠던 것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원장님, 이것은 어떻게 할까요?” 하면 토레이 신부가 말했답니다. “나에게 묻지 말고 성령님께 물어 보세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기도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그가 하루 10시간동안 기도실에 앉아 있었답니다.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일을 낳습니다. 그래서 공식이 있습니다. “먼저 예배하고 기도하라. 함께 모여 예배하라. 무릎꿇고 기도해라. 그때 성령님이 말씀하신다. 그 음성을 들으면 산다. 그 음성을 들으면 승리한다“. 아멘.
여러분도 예배하고 기도하기를 원합니까? 교회는 본질적으로 일하는 곳이 아님을 아십니까? 욥33:31절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교회는 내가 말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계2:11,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모두 17번 나옵니다.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평생 예배와 기도와 힘쓰시기 바랍니다.
안디옥교회가 그렇게 기도하자 드디어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2절 다시 보면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다같이 “따로 세우라”.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고 계속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했습니다. 행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셋째. 성령님은 선교하게 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최종적인 선교인 것을 아십니까? 성령님이 하시는 최종적인 일은 내가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해지고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일이 선교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님은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교회나와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예배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우리의 삶이고 목적은 선교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꼭 외국에 선교사로 가는 것만이 선교가 아닙니다. 선교의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고 하는 일은 다릅니다. 교사, 공무원, 주부, 직장인, 하나님이 보낸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것이 선교입니다. 전문선교사로 가면 복음선교입니다. 일반직장으로 가면 평신도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선교사입니다.
어떤 선교든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합 니다. 은혜가 기본적인 동기입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으로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능력입니다.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은혜와 능력입니다. 은혜는 선교의 이유요 능력은 선교의 동력입니다. 마18장에 탕감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요즘 돈으로 약 10억쯤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주었습니다. 요즘 돈으로 약 천만원쯤 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이 와서 10억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받은 그 날 그는 자기에게 천만원 빚진 사람에게 가서 빚을 갚으라고 욱박지르며 멱살을 잡았습니다. 이때 주인이 말합니다. 마18:32-33,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모두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한국교회 교인가운데 은혜를 안 사람이 참 많습니다. 1900년대 경기도 강화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강화 홍의 마을에 종순일 이라는 교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부자여서 그의 돈을 빌려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마태복음 18장에서 탕감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빚을 탕감받고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를 감옥으로 끌고 간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그는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다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을 다 자기 집으로 불렀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또 빚독촉하는가 불안한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때 종순일은 마태복음 18장 이야기를 들려준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 바로 나요. 내가 주님의 은혜를 1만달란트나 받았는 데 여러분에게 쥐꼬리만한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안 갚는다고 악한 짓을 했으니 나는 죄인이요. 그러다가 내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 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 준 돈은 모두 없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모든 빚문서를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에 따라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하고 아내와 함께 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라고 강화, 석모, 주문, 웅진 등의 섬을 돌며 수 십개 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은혜의 원리, “아, 나는 받은 은혜가 많구나. 이 은혜를 어찌할꼬?” 그래서 전하고 나누고 말하고 용서하고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가는 것, 종순일은 목회자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었지만 은혜의 정신으로 강화지역의 위대한 선교사 되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1900년 이전, 평양에 김씨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았는 데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라는 여종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40이 넘어 혼자 된 후 예수 믿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교회 나가 마태복음 18:18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가 여종을 부리고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여종을 다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니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 자매라고 했소. 그런데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복섬이를 부리는 것은 마치 땅에 매는 것과 같은즉, 그러고서야 어찌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겠는가?” 그리고 김씨 부인은 종문서를 가져가 다 불태우고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종이 아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내 집을 나가도 좋다”. 그러자 복섬이가 말했습니다. “마님, 제발 저를 떠나라 말하지 말아주세요.” . 그래서 김씨 부인은 그를 양녀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인이 죽은 후 딸에 많은 재산을 상속했습니다. 그 후 복섬이는 너무 김씨부인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가 받은 재산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 땅이 바로 평양신학교의 부지였습니다. 훗날 그 땅에 신학교가 세워져 수많은 영혼들을 살린 영혼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은혜, 은혜가 선교의 시작입니다. 은혜, 은혜가 전도의 시작입니다. 은혜, 은혜가 영혼구원의 시작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받았으니 백 데나리온을 거저 주는 것입니다. 은혜로 전도하고 은혜로 선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 3절에서 12절까지 이야기입니다. 2천년 전 안디옥교회에 역사하여 사람을 키우고 기도하게 하고 은혜로 선교하게 하신 성령님, 그 분이 우리 교회에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금식하다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서 하나님의 일로 쓰임받은 바나바와 사울처럼, 우리의 일생도 성령의 도움과 은혜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나바와 사울이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가득한 구브로에 가서 성령의 도움으로 마술사를 이기고 우상을 악한 신을 제압한 것처럼 우리도 험한 세상, 우상을 이기고, 세상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을, 영혼의 추수기에 우리가 기도하는 부모, 형제, 자녀, 친구, 이웃들을 마귀에게서 되찾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좋으신 성령님이 일마다 때마다 이 가을에 여러분과 함께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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