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9. 25. 영역 4/기타
고난 어떻게 받을 것인가?
벧전 4:12-19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들어가게 될 저 천국과도 다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에덴동산과 저 천국과 다른 결정적인 점은 고난이 있다는 점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에는 고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들어가게 될 저 천국에도 고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고난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그 많은 고난들은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겪는 고난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생존을 위해 일하며 갖가지 고난을 겪습니다.
또한 사람은 늙어갑니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집니다. 병에도 걸립니다. 갖가지 질병의 고통에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죽어갑니다. 이 모두가 또한 고난입니다.
그리고 풍파 많은 세상을 살면서 갖가지 사건 사고에 얽히고 설키며 고난을 겪습니다. 때로는 천재지변을 겪습니다. 전쟁이나 사변에 휘둘립니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과 상황의 고통에 연루되어 갖가지 고난을 겪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입니다. 본문 4:16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을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고난입니다. 한 마디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서 겪는 고난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와 황제숭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소극적 고난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으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에 연루되지 않으려 애씁니다. 음란한 풍조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러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고난입니다. 한 마디로 무엇인가를 해서 겪는 고난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유대교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습니다. 결국 저들이 모진 박해를 받고 쫓겨나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시절부터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적극적 고난입니다.
벧전 2:20과 3:17을 보면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입니다. 선을 행하는 중에 고난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 같은 분은 자신의 부와 명예 그리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달려갔습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을 행했습니다. 오늘도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제 2, 제 3의 슈바이처들이 많습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적극적 고난입니다.
셋째, 사탄의 시험으로 겪는 고난입니다. 벧전 5: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탄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을 노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공격해서 믿음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대표적인 예로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 1:8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한 마디로 말하면 욥이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풍성한 소유를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가진 소유를 다 잃게 만들었습니다. 욥이 재산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일곱과 딸 셋이 모두 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욥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었습니다. 욥이 흔들리지 않자 사탄의 2차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온 몸에 질병의 고통이 찾아들었습니다. 욥의 믿음을 흔들기 위해서 사탄이 욥에게 고난을 퍼부은 것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이런 공격을 쉬지 않습니다. 믿음을 흔들기 위해 갖가지 시험으로 성도들을 공격해 옵니다. 때로는 하는 일이 어려워지게 만듭니다. 때로는 건강을 무너뜨립니다. 때로는 가정의 불화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왜 하나님을 잘 믿는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시는가? 이런 의문을 갖게 만들면서 믿음을 흔듭니다. 이것이 사탄이 시험하여 겪게 되는 고난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의 고난입니다. 고후 12:7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자기에게 질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주의 일을 하면서 갖가지 큰 고난을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몸까지 아파서 주의 일을 하는데 큰 지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질병의 고통을 안고 사역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후 12:10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이렇게 고난을 겪으면서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저마다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성도들을 멸망토록 주신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연약함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주신 고난입니다. 더욱 연단 받고 큰 일꾼으로 세우시려고 주신 고난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고난이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어진 고난을 받아야 할 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고난과 맞서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난이 찾아 올 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암환자의 심리 5단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퀴블러 로스 모델(Kübler-Ross model)이라고도 합니다.
1단계가 ‘부정’(Denial)단계입니다. 처음에 암 판정을 믿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진단이 잘못됐을 거야”라며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진단을 다시 받아봅니다.
2단계가 ‘분노’(Anger)단계입니다. 진단이 최종확인이 되면 “왜 나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며 분노를 폭발합니다.
3단계가 ‘타협’(Bargaining)단계입니다. “아이가 결혼할 때까지 아니면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4단계가 ‘우울’(Depression)단계입니다. 패배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급격하게 우울감을 느끼게 됩니다.
5단계가 ‘수용’(Acceptance)단계입니다. 모든 것을 체념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이런 단계적인 설명은 전형적으로 고난이 다가왔을 때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을 당하는 것 같이 이상하게 여기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고난과 맞서라는 것입니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자세로 피하려고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욥 1:12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시험하려할 때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욥에게 고난을 퍼부으려고 할 때 한계를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고난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결코 그 고난으로 우리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하에서만 고난이 찾아오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고전 10:13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결국은 그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길을 걷는 동안 견딜 수 있는 힘과 능력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겪지만 주님과 함께 고난을 겪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 두시지만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다가올 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고난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 4:15-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두 종류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고난을 받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답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악을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동안 고난을 받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부끄럽게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선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고난을 겪을 때 그리스도인답게 살면서 고난을 겪게 됐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살면서 고난을 겪게 됐는지 살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면서 고난을 겪게 됐다면 그 고난은 징계의 성격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빨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주신 고난일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악을 저지르다가 고난을 겪게 됐다면 이것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동안 고난을 당했다면 그 의미를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베드로 사도는 당시 초대 교회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당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이라는 뜻이고,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며 겪어낸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지체된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당한 고난이니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고, 이것은 처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겪어내신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며 고난을 겪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선교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겪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고하며 고난을 겪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며 고난을 겪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믿음의 가정으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며 고난을 겪는 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고난을 겪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의 어떤 고난인지를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의 열매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나옵니다. 4:13 전반부를 보면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되어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고난을 받을 때 즐거워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고난을 받으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4:13 후반부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한 마디로 오늘 고난을 겪어낸 사람들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영광을 나타낼 때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의 열매가 있고 그 열매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입니다. 힘들지만 오늘 고생을 견디는 이유는 장차 낙이 올 것을 내다보기 때문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농부가 봄철부터 여름 내내 농사를 짓느라 그토록 애쓰고 수고하고 이유는 가을철 추수의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진학의 열매, 취업의 열매, 성공의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의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장차 우리가 이 고난의 열매를 반드시 맛보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고난을 겪으며 그 고난 이후 일어날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고난의 열매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겪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닙니다. 이 고난이 복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장차 저 천국에서 큰 기쁨을 누리게 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일부러 고대하며 당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찾아왔을 때 피할 일도 아닙니다. 당당하게 맞서십시오. 그 뜻을 깨닫고 그 열매를 소망하며 견뎌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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