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0. 9. 영역 4/토라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7
웃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선물입니다.
우리말에 “웃음보가 터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을 때 쓰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 몸 안에 웃게 하는 어떤 장기가 있는 것처럼 비유로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우리 몸 안에 웃음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한 부분이 발견됐다는 것입니다.
1989년 미국 UCLA 대학병원의 이차크 프리드 박사는 인간의 뇌 안에 웃음을 관장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왼쪽 대뇌의 사지통제 신경조직 바로 앞에 표면적 4㎠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프리드 박사는 간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발작을 일으키는 뇌의 부위를 찾는 실험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뇌의 바로 이 부분에 전기 자극을 주자 환자는 주체하지 못하고 웃었다는 것입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연구해 보니 이 부분이 웃음을 관장하는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뇌 안에 웃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두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웃으며 살도록 특별한 선물을 만들어 두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웃음의 효능에 대해 다각적으로 연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웃을 때 면역 호르몬 분비가 증가 되어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인답니다. 웃을 때 긴장됐던 혈관이 이완되어 혈액순환과 심장 박동에 큰 도움이 된답니다. 웃을 때 우리 몸에 ‘NK 호르몬’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돼서 진통에 큰 도움을 준답니다. 이렇게 웃음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잘 웃는 사람들이 학업 성적이 더 좋게 나타났고, 또 다른 연구 결과를 보면 스포츠나 사업에서도 잘 웃는 사람들이 더 좋은 실적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웃는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우울감을 쉽게 털어냈고, 스트레스도 잘 극복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이렇게 웃음은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데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웃음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면 웃으며 즐겁게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웃음이라는 선물을 잘 활용하여 건강하게 살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웃음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최근 초음파 기술이 발달하면서 엄마 자궁 속의 태아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놀랍게도 태아가 자궁 속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은 이미 태아 시절부터 웃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일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 의과대학 연구팀이 웃음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400-500번 정도를 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랄수록 점점 웃음의 횟수가 줄어들고 어른이 되면 하루에 15-20번 정도 밖에는 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웃음이라는 선물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나와 살면서 점점 그 선물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웃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라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사라는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다가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게 하시면서 비로소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라는 어떻게 웃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성경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가지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이유가 대체로 사람들이 웃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반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삶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원래 ‘여주인’이라는 뜻의 ‘사래’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름만 보면 유복한 집에서 남부럽지 않은 환경 가운데 자랐을 것입니다. 이복오빠인 아브라함과 결혼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나름대로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65세, 그러니까 노년기에 접어들 때 하란을 거쳐 머나먼 가나안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려 할 때 기근이 들어 멀리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거기에서 자칫 바로 왕에게 곤욕을 치를 뻔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돌아와 살면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랄 땅에서 아비멜렉에게 또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힘이 들었습니다. 노년에 머나먼 타국에서 이민 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노년기에 감당하기에는 그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점점 웃음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6년 행복지수가 발표됐습니다. 1위가 덴마크입니다. 10점 만점에 8.09입니다. 2위가 호주로 8.02, 3위가 노르웨이로 7.87입니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될까요? OECD 34 국가 중에 32위로 행복지수가 4.20입니다.
왜 우리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이렇게 낮을까요? 한 마디로 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고, 아이들 키우기 힘들고, 노후 준비가 안돼서 걱정스럽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불안하고... 특히 청년들은 그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웃을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웃는 것이 비정상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 때문입니다.
사라는 결혼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65세까지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마음에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 4000년 전 고대시대에는 여인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사라는 늘 마음을 짓누르는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65세 이민을 떠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들을 얻게 될 것이고, 그 아들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75세가 되던 때 더 이상 자녀가 없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가실 줄 알았던 마음의 고통은 또 다른 고통으로 자신을 짓누릅니다.
그리고 또 15년이 흘렀습니다. 그녀가 거짓말처럼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는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에 시달려왔습니다. 그러니 어찌 웃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도 참 많은 사람들이 말 못할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근자에 정신의학이 주목하는 질병이 소외 ‘가면 우울증’이라는 것이랍니다. 자기 스스로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면서 겪는 우울증이랍니다. 지속적인 마음의 고통, 과도한 스트레스를 겪어오면서도 겉으로 볼 때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몸에 여러 가지 이상증세가 나타나는 마음의 병이랍니다. 이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웃을 수 있겠습니까?
웃게 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라가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그가 평생 잃어버리고 살았던 웃음을 되찾은 것입니다. 정말 마음껏 속 시원하게 웃을 일이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본문 6절에서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아온 자기를 하나님께서 다시 웃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90살의 할머니가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평생소원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살던 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웃어도 보통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 웃음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는다는 ‘박장대소’로도, 얼굴이 엉망이 될 정도로 크게 웃는다는 ‘파안대소’로도, 그리고 배를 잡고 뒹굴며 웃는다는 ‘포복절도’로도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웃음이요, 웃다가 죽어도 좋을 웃음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셨다”는 사라의 고백입니다. 이 말은 사라의 깨달음을 표현해 놓은 말입니다. 사라는 단순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웃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셔서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웃은 것입니다.
우리가 웃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얕은 웃음입니다. 웃음치료사들이 억지로 웃음을 이끌어냅니다. 따라하다 보면 배가 아플 정도로 웃게 됩니다. 개그맨들이 “빵!” 터지도록 웃깁니다. 보다보면 깔깔거리고 웃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웃음은 안개 걷히듯 잠시 후 사라집니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이런 웃음은 마음속의 슬픔과 고통을 어루만지지는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깊은 웃음입니다. 깊은 깨달음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입니다. 이런 웃음은 배가 아플 정도로 깔깔거리고 웃게 하는 웃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 속 전체에 울림이 있는 웃음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마음속에 가득했던 우울감을 날려버립니다. 마음속에 행복감이 가득하게 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이 바로 이런 깊은 웃음입니다. 사라가 깨닫고 이 깊은 웃음을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라를 웃게 했던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사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한 뒤 깊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이것은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된 것이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멀리 25년 전 고향 갈대아 우르에 살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약속하셨던 그 말씀대로 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5년 전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 재차 확인해 주셨던 그 말씀대로 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작년 찾아오셔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대로 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라는 아마도 소름끼치도록 놀랐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 말씀을 잊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비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사라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그것이 너무 기뻐서 웃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참 많은 사람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기뻐서 웃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발견하고는 놀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기뻐서 웃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마음 깊이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사라는 하나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느꼈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사라를 돌보셨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돌보셨다라는 말은 원어로 “파카드”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으로 기억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라는 이삭을 낳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셨고 자기를 기억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사라를 웃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1절을 보면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해 놀라운 이적을 나타내셨다는 말씀입니다. 나이 90이나 된 할머니가 아들을 낳는 일은 그 자체로 이적입니다. 나이 40만 넘어도 노산이라 하여 아이를 낳는 일이 쉽지 않은데, 90이 된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일은 인간 육체의 실체 그 자체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그 일을 해냈습니다. 사라는 결코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일임을 너무도 분명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사라를 웃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잊으셨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까지 기억하고 계신 줄 미처 몰랐다고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이렇게까지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전히 여러분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사라는 눈에 보이는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3절을 보면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고 자신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고, 모든 가족들이 웃었기에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제 친구들 가운데 손주를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손주 자랑입니다. 손주 사진을 핸드폰 표지 사진으로 걸어놓고는 핸드폰 볼 때마다 싱글벙글 입니다. 제가 적당히 좀 하라고 핀잔을 주면 한다는 소리가 “박목사도 손주 생겨봐 더 할 껄!” 그럽니다. 저는 이 친구들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왜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었을지 이해가 됐습니다.
사라는 어땠을까요? 매일 이삭을 보며 싱글벙글 했을 것입니다. 이 아이를 보기만 해도 늘 웃음이 샘솟듯 솟구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이렇습니다. 그것을 볼 때 늘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역사하십니다. 그 일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웃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살이에 힘들어 웃음을 잃어버리며 살아가던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름대로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웃음을 잃어버리며 살아가던 우리를 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처럼 주님 때문에 웃으시고 기뻐하시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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