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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9. 18. 성숙한 신앙 성숙한 기도

16. 9. 18.                                           영역 4/케투빔

 

성숙한 신앙 성숙한 기도

 

대상 29:10-19

 

  어린 시절 대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부모님과 형님들과 누나 그리고 큰형님 부부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느 날 조카가 태어났습니다. 막내로 제일 어렸던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 어린 조카와 함께 지냈습니다.

  아기가 너무 예뻤습니다. 안아주고 함께 놀았습니다. 아기가 천사 같았습니다. 남을 미워할 줄도 모르고 거짓말 할 줄도 모르고 남을 속일 줄도 몰랐습니다. 정말 순진하고 깨끗했습니다. 때로는 아기를 보며 부끄럽기도 했고, 보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기를 보고 실망했습니다. 아기는 자기 밖에 몰랐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상황이나 형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배고프다고 떼씁니다. 조금 뒤에 주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달래도 보고 얼려도 보지만 막무가내입니다. 울고 또 웁니다. 어쩔 줄 몰라서 쩔쩔맨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전 그때 아이는 어쩔 수 없는 아이로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깨끗하고 정직한 일도 중요하지만 성숙해야 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시각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이기적인 것을 극복하고 이타적인 것까지 나아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자리에서 벗어나서 이타적인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성숙입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 이기적인 기도를 드립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는 잘 돼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이야 어떻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소원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이기적인 기도요 성숙하지 못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기적인 기도를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내 소원, 내 욕심, 내 뜻을 이루려는 기도에서 벗어나서, 이웃도 챙기고 공동체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도 헤아리며 기도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숙한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는 결단코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가 진실 된 기도,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는 있어도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성숙한 기도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게 됩니다. 바로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일생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할 준비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자기는 성전건축을 위한 준비라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가 가진 거의 전 재산을 성전건축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성전건축을 위한 헌금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성심껏 봉헌했습니다. 다윗이 볼 때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풍성하게 봉헌했습니다. 다윗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가 얼마나 성숙한 기도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도야 말로 성숙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성숙한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가 평생 주님과 동행하면서 신앙이 깊어졌고 무르익은 신앙에서 깊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 있는 기도도 중요하고 간절한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 성숙한 기도도 중요합니다. 다윗의 이 말년에 드린 기도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본문의 다윗의 성숙한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송축으로 시작되는 기도

   본문 10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이르되” 역대기를 기록한 역대기 저자는 다윗이 드리는 이 기도를 한 마디로 송축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 하반절을 보면 실제로 다윗의 기도는 송축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이 말씀은 다윗의 기도가 송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송축’(頌祝)이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원어로는 ‘바락’(barak)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이중적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송축한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송축이라는 말의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내리신 복을 기억하고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 103편을 흔히 ‘다윗의 송축시’라고 부릅니다. 2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이 말씀은 송축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우리에게, 우리 공동체에게 베푸신 그 모든 은택을 기억하고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이 세상에 증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를 송축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그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송축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상 17:16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보잘 것 없는 목동이었던 자기를 왕으로 세워주시고,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의 가문을 왕가로 높여주신 것을 생각할 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송축하는 신앙입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절반이라 할 수 있는 73편이 다윗이 쓴 시입니다. 이 다윗이 쓴 시의 대부분은 바로 송축시입니다. 이 송축하는 신앙이 다윗의 신앙의 기초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은 기도를 송축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기도의 양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진 기도 시간을 가졌는지 그렇지 못한지, 어느 정도 이상의 시간을 기도하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보면 신앙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 기도 시간을 갖고 있고, 매일 30분에서 1시간 이상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질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송축과 감사가 있는지 여부, 기도 순서가 송축과 감사로부터 시작하는지 여부를 보면 신앙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송축과 감사로부터 기도가 시작되고 또 송축과 감사가 기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송축으로부터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송축과 감사가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바로 성숙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신앙이 성숙해져야 하겠습니다.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본문 14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 성전 건축을 준비하기 위해 헌금한 뒤에 그리고 백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헌금한 뒤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도드리며 하나님께 고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셨기에 드릴 수 있었고, 또한 즐거이 주께 드릴 마음도 주셨기에 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드릴 재물을 주신 것 감사하고, 또한 하나님께 드릴 마음 주신 것도 감사하다는 기도입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헌금한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이 액수를 환산해 보았습니다. 1달란트가 34kg입니다. 금이 삼천 달란트니까 100톤이 넘습니다. 금시세가 1톤에 약 550억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건축 헌금한 액수가 금만 따져 봐도 현재 시세로 5조 5천억입니다. 그리고 은은 계산해 보니 2380억입니다. 다 합해보면 현 시세로 5조 7천억이 넘습니다.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헌금한 액수의 총액은 다윗이 헌금한 액수의 1.5배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약 8조 상당의 액수를 헌금한 것입니다. 물론 당시 물가와 오늘의 물가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오늘 이정도 헌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일 그가 이렇게 헌금했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자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께 이렇게 고했습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라고 고했습니다. 자기와 백성들은 원래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색하고 완악하여 자발적으로 기쁨 마음으로 드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다 하나님께서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겸손함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했고, 자기 백성들이 했지만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괜히 하나님 앞에서 인사치레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다윗의 성숙한 신앙 때문에 이렇게 겸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다윗은 자기에게 그럴 만한 힘이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기에 그렇게 하게 됐다는 것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입니다. 넘치도록 헌금할 수 있도록 재물을 주신 하나님, 그럴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입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서서히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갑니다. 빠른 곳에서는 이미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황금 빛 들녘을 보면 벼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그렇게 치켜들었던 고개를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숙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머리가 무거워졌기 때문입니다. 벼 알 하나하나가 탐스럽게 영글면서 묵직해졌기에 더 이상 고개를 치켜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면 겸손해 집니다.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고, 사람들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기도도 고개 숙인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헌신을 위한 간구

   다윗은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자기의 소원을 아룁니다. 10절 가운데 송축이 4절이고, 감사가 4절이고, 그리고 간구가 2절 뿐입니다.

   간구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봉헌했던 그 즐거운 마음 그리고 그 정직한 마음을 잊지 말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늘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셔서 주의 말씀을 잘 지키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 따라 성전 건축을 잘 완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기도는 헌신을 위한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자기들이 힘을 다해서 준비한 성전건축이 잘 마무리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지금 기도하는 다윗의 자리에 서보았습니다. 전 재산을 다 바쳐서 건축헌금을 드렸습니다. 이제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웠습니다. 만일 내가 이 자리에서 기도를 드린다면 무슨 기도를 드렸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내 남은 생애를 주께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자식들과 후손들 먹고 살 걱정 없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두고두고 명예를 보존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달리 보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오직 성전건축만을 위한 기도를 드린 것이 달리 보였습니다. 자기의 미래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도를 드린 것이 달리 보였습니다. 자기 자손들이 복되게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잘 지어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도를 드린 것이 달리 보였습니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기도는 나 자신과 세상 나라에 초점을 맞춥니다. 성숙한 기도는 헌신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기도는 소원 성취에 초점을 맞춥니다.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기도는 나와 세상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간구를 드릴 때 헌신을 위한 간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기도에 대해 주옥같은 가르침들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까를 생각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도는 어떻게 기도하느냐 그리고 무엇을 기도하느냐 보다 누가 기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드릴 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 받을 것인가, 무엇을 기도하면 응답 받을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응답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소원하며 기도할 때 그 기도는 그 자체가 이미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 대행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승리해야 기도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고, 기도해야 하나님을 우군으로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승리하려면 우리가 성숙해 져야 합니다. 우리가 성숙해 질 때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