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10. 30. 영역 2/종교개혁주일
예수님의 종교개혁
요 2:13-2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특히 롬 2:28-29을 보면 ‘할례’라는 기준으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육체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육체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이란 그저 육체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고 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을 때 그것을 자기의 의로 여기고 자랑합니다.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켰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런 사람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이런 상태는 타락한 인간 본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를 위해 믿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쉽게 다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상태로 돌아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훈련받고 노력해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믿는 상태로 나아갔지만 이것을 유지하려고 힘쓰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팽이를 돌리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실로 팽이를 감싸고 나서 땅에 던지면, 팽이가 오뚝하게 서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힘이 빠져서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버립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비틀거리는 팽이를 칩니다. 그러면 계속 돌아갑니다.
저는 우리 믿음 생활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상태는 팽이가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내버려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팽이가 쓰러지듯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상태로 되돌아가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합니다. 계속 자기 개혁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다가 유월절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멀리 예루살렘까지 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시면서 성전 안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보시고는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15절을 보면 채찍으로 양과 소를 성전 밖으로 내쫓으셨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성전 안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 보다 자기의 잇속을 챙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을 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이용해서 잇속을 챙기려는 사람들 즉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상태로 주저앉은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는 주님의 강력한 채찍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상태로 회복시키시려는 주님의 준엄한 채찍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이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처음 성전 제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격적으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감격, 속죄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은 감격, 제사를 드리며 누리는 하늘의 복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가득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 제사 드리러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편을 덜어주려는 뜻에서 여러 가지 서비스들이 생겨났습니다.
제물을 준비해서 먼 거리를 와야 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성전 뜰에서 제물을 파는 일이 시작됐습니다. 양, 소, 비둘기 같은 제물을 파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쓸 수 있는 돈을 환전해 주는 일도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거래다 보니 돈 벌이가 됐습니다. 너도 나도 여기서 장사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권한을 행사하며 잇속을 챙기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말처럼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보다 잇속 챙기는 일에 더 관심을 갖는 일들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순전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 마음 상하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정성껏 키워서 준비해 온 제물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퇴짜를 맞습니다. 시장에서 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제물을 사야했습니다. 환전 역시 과도한 수수료를 뗍니다. 이러면서 하나님께 감격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왔던 사람들의 마음이 불평과 분노로 가득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 제사가 제대로 된 제사가 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제사가 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서셨습니다. 분노하시며 성전을 더럽히는 것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러 온 사람들과 성전을 섬기려는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제물을 팔고 환전하는 상인들은 돈 벌 생각에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사장들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권한을 행사하며 얻게 되는 이권에 눈이 멀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사 드리러 온 백성들은 눈 꼴 사나운 광경에 분노하고 억울해 하면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이 변질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타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 안에도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설교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교인들이 큰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설교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교인들에게 우리 목사님은 정말 설교를 잘한다 라는 칭찬을 듣고 싶은 생각이 마음을 가득 채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제 마음에 가득 차면서 제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은 교인들이 얼마나 올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주 보다 예배 인원이 얼마나 늘었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새가족은 얼마나 왔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꼭 와야 할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 사람은 왜 안 왔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마음속에 하나님 아닌 것들로 가득 차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 서 있다면 어떻게 다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올라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종교개혁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기까지 누구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예수님의 이 문제제기를 정당한 것을 받고 문제를 해결하려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말씀은 시 69:9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성전을 성전답게 지켜가려는 그 열심 때문에 큰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죽이려고 한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잇속 챙기는 일을 방해한다고 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고 지금 그 잘못을 지적해 주셨는데 오히려 저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을 돌아보는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마 7: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필 수 있는 눈이 멀었다는 점을 신랄하게 지적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즘 ‘몰카’라는 것이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몰카란 남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몰래 카메라에 담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몰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의 티가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셀카’도 대단히 유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셀카란 자기 스스로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카메라 하나를 제안해 보고 싶습니다. ‘몰셀카’라는 것입니다. 몰래 자기 자신을 카메라에 담아보는 것입니다.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그 자체를 잊고 있다가 나중에 카메라에 찍힌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낱낱이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을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나이 30이 갓 넘은 청년입니다. 그 어떤 직함도 권한도 없는 그야말로 자연인이었습니다. 왕족이라든지 실세 권력자들의 후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예수님을 막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일을 살펴보면 당시 기준으로 불법이요 범법입니다. 세를 내고 정식 허가를 받아서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을 내쫓으신 것입니다. 당시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성전제사 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님을 막아 설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권위 때문입니다.
눅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39절을 보면 주목할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1절을 보면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높은 권위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귀신도 꾸짖으사 내쫓으시고, 심지어 질병까지도 꾸짖으사 몰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주여 오셔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꾸짖어주시고, 네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을 꾸짖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귀신을 내 쫓아주시고, 열병을 떠나게 하신 것처럼 내 안에 남아있는 이기심, 마음의 우상, 세속적인 것들, 정결하지 못한 것들 다 내쫓아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나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셋째, 계속 개혁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전에서 쫓겨난 상인들은 그 다음날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하게 회개한 뒤 장사를 접었을까요? 성전에서 특권을 행사하던 제사장들은 이 사건이 있고난 다음날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철저하게 성전을 새롭게 개혁해 나갔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성전을 떠나시자 저들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습니다. 상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저들에게 와서 제물을 사고 환전을 했습니다. 제사장들도 언제 그랬느냐 싶게 원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관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롭게 했지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악한 것들을 몰아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것들이 다시 우리의 마음속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을 또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모토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reformata Ecclesia reformanda) 그래서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혁교회는 늘 자신을 계속해서 개혁하려는 노력을 해 오고 있습니다.
개혁교회의 후예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계속해서 개혁해 가야합니다. 목욕하고 얼마 안 가서 또 목욕을 하듯이 개혁하고 머지않아 또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종교개혁 499주년이 되는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잘못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새로운 개혁교회를 세우게 된 것을 기념하는 복된 주일입니다. 오늘도 종교개혁자들의 본을 받아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고 또 교회를 새롭게 해 가야 하겠습니다. 성전을 깨끗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에서 다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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