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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1002]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민수기 35:9-34

설교자: 비전교회 마경훈 목사

 

어느 역사학자는 유대인을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유대민족이 그토록 혹독한 시련을 당하면서도 망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들에게 비록 나라가 없었고 영토가 없었어도 신앙으로 하나된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나라 없이 이 천년을 여기 저기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천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 신앙, 유대인 문화, 유대인 전통을 그대로 가지고 남아 있습니다. 가정을 경건하게 세웠더니 그 가정이 다시 저들을 이 천 년 동안 지켜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가정의 붕괴 때문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가정이 세워지려면 특히 어머니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어머니가 정직하고 믿음으로 살면 자녀들은 어머니의 믿음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19세기 보스턴에 성공회 감독으로 필립스 부룩스 라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기 어머니가 세상 떠난 다음에 비석에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성경구절을 새겼습니다. 15:28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한 말씀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얼마나 위대한 어머니입니까?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중학생들이 수련회를 갔습니다. 며칠 동안의 수련회를 마치고 짐을 싸서 돌아오려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학생이 과일 통조림 버리고 있었습니다. 인솔한 전도사님이 물었습니다. “. 너 왜 그것을 버리니? 버릴 것 같으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주었으면 좋지 않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아무도 주지 말고 나 혼자만 먹으라고 그랬어요.”나중에 버리더라도 내 자식 혼자만 먹도록 가르치는 어머니 때문에 그 학생은 극도록 이기주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진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진리에 서게 됩니다. 어머니가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지혜를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의 지혜는 음식문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음식은 대부분이 웰빙음식입니다. 요즘 웰빙 웰빙 하는데 우리나라 음식만큼 웰빙음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한글입니다. 우리글은 표현 못할 말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글이 없는 민족들이 글을 만들 때 한글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도피성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나와 있는 도피성제도의 지혜를 우리 민족에게 주셨습니다. 삼한시대부터 아질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질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오살자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가혹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나 그런 형벌을 피하고자 어느 일정한 장소에 숨어 있으면 법적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신성한 도피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도피성과 같은 역할입니다.

마한(馬韓)에는 나라마다 별읍(別邑)이란 게 있었습니다. '별읍'을 다른 말로는 '솟대'라고 했는데,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서 그 영역을 표시하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이나 쫓기는 이웃 나라 사람이 이곳에 숨어들면 보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수를 피해서 아질이나 별읍에 숨어 시간을 벌면, 그동안에 보복자의 화도 가라앉고 또 속죄금(贖罪金)으로 흥정을 하는 등 화해의 시간을 벌어서 극악한 살상을 면케하는 사법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도피성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도피성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축원합니다.

 

1. 도피성이란 무엇인가?

이스라엘에서 부지중의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를 보복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성읍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도끼질을 하는데 날이 빠져서 옆에 있는 사람 머리에 맞았는데 맞은 사람이 죽었다면 죽은 사람과 가까운 사람이 보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과실치사자는 도피성으로 도망을 쳤습니다(19:5). 그가 일단 도피성에 들어가면 보복자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부지중 살인자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지내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에게 총 48개의 성읍을 주었는데 그 중에 6개를 도피성으로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6개의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 3, 요단 서편에 3개씩 있었습니다.

도피성제도는 아주 중요한 제도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중에서 모세오경에만 도피성제도가 4곳이나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35, 20, 4, 19). 그만큼 도피성제도를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2. 도피성제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6개의 도피성을 만드신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도피성제도는 과실치사자의 생명을 보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보복을 당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도피성제도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한 사람을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 사람과 동일하게 다루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관대함을 배워야 합니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이해하고 품어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 관대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2) 도피성제도는 과실치사자에게 정확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도피성에 들어갔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과실치사자는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재판을 통해서 자신의 과실을 밝혀서 보수자로부터 생명을 보호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실치사를 한 사람은 도피성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자기가 저지른 사고를 고했습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그의 말을 듣고 도피성에서 한 곳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먹을 것을 주었고, 보복자가 와서 그 사람을 내어놓으라고 해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회중 앞에서 살인자에 대해 자세한 재판을 합니다. 회중들이 배심원이 되어 재판하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과실로 살인했다는 것이 인정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3) 도피성제도는 약속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저는 34절 말씀이 크게 은혜가 됩니다. 그 말씀에 보면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거하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도 거하시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들과 약속의 땅에서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33, 34절에 보면 하나님은 약속의 땅이 피로 인하여 더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수자가 피를 흘려 땅을 더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피성제도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3. 도피성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 도피성은 사람의 생명이 귀중함을 보여준다.

실수로 살인한 사람이 도피성에 들어가면 보복자가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과실치사자가 비록 사람을 죽인 사람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명이 귀중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귀중합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모두 다 귀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생명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절대로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요즘 자살율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자살공화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살을 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으나 살인한 자가 지옥에 들어간다는 말씀은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영역을 침범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귀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 도피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배분해주실 때 요셉에게는 두 몫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몫씩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대신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서 48개의 성읍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느냐? 그 이유는 첫째, 이스라엘 모든 지파 모든 백성에게 영적인 부분을 지도해줄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레위인들의 죄 때문입니다.

49장에 보면 야곱이 자기의 아들들에게 예언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49:7을 보겠습니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레위에 대한 예언입니다. 레위는 자신의 동생 디나가 세겜에게 겁탈을 당한 일 때문에 크게 보복을 했습니다. 그는 세겜 남자들에게 사기를 쳤습니다.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누이를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례를 받고 아파서 힘을 못 쓸 때 찾아가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레위의 노여움이 혹독해서 저주를 받아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약 50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48개 성읍에 흩어져서 살게 된 것입니다.

 

3)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고의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는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도피성 안에 있으면 안전했습니다. 보복하는 자가 와서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피성 밖으로 나가게 되면 보복하는 자의 손에 죽게 됩니다. 그는 도피성을 통해서 안전을 보장 받았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총 6개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과실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해야 할 경우 하룻길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습니다. 19:3에 보면 일 년에 한 번씩 모든 백성들이 나와서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닦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그곳으로 피할 수 있게 했고, 가장 짧은 시간에 도피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도피성이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도피성'을 잘 보이는 높은 산지에 두게 하셔서 누구나 도피성이 있는 곳을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 도피성의 문은 과실로 사람을 죽인 사람이 언제나 들어갈 수 있도록 24시간 열려있도록 했습니다. 과실치사자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우리는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4) 도피성은 참된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신약은 실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우리의 참된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 더 좋은 도피성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피난처에 피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 중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죄가 있지만 피난처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도피성이십니다.

노다지라는 말 아시죠. 보배로운 것이 많을 때 노다지라고 합니다. 노다지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한 글을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옛날 금광에서 서양 사람들이 금을 캐서 상자에 넣고 이렇게 써 붙였다고 합니다. ‘No Touch’ 그 말을 들은 한국 사람들이 노다지, 노다지 이렇게 부르다가 금 같이 귀한 것을 노다지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노다지는 No Touch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크리스천은 주님 보실 때 노다지입니다. 광부들에게 금이 귀중했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귀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광부들의 금을 누구도 터치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주님은 누구도 우리를 터치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악한 자들과 세상의 위험이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도피성이 되셔서 우리는 주님의 노다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도피성보다 더 좋은 도피성입니다. 그 이유가 세 가지입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과실치사자가 이동하여 찾아들어가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 가까이 계신다.

앞에서 이스라엘 전역에서 도피성은 32km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룻길만 걸으면 도피성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32km를 걷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제가 앞으로 걷는 기도를 하면서 국토 순례를 할 것인데 하루에 40km 정도를 걸을 생각합니다. 제가 이번에 제주도를 돌아보니 충분히 가능한 거리입니다. 그러나 32km는 만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저는 제주도 걷는 기도를 하기 전에 걷는 훈련을 했습니다. 하루에 20km~23km까지 미리 걷는 훈련을 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도피성이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는 사람은 하룻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14:17에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어디로 가면 될까요? 어디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도피성이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부르면 주님은 그곳에서 들으시고 그곳에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도피성보다 더 편리하고 좋은 점입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과실로 죄를 지은 사람의 도피성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과실로 죄를 범한 사람만 아니라 고의로 죄를 범한 사람까지도 피할 수 있는 도피성이다.

구약의 도피성제도는 과실로 죄를 지은 사람만 받아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의든 과실이든 죄를 범한 사람을 다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은 큰 죄든 작은 죄든, 알고 지은 죄든 모르고 지은 죄든, 드러난 죄든 숨겨진 죄든 주님 앞에 나와서 용서를 구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줍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으시지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다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임페리얼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소중하게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그림입니다. 로마 황제가 교회에 들어가려 하는데 주교가 문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이 그림의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A.D. 390년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진압한다고 데살로니가 시민을 1,500명이나 학살하였습니다. 이 일로 교회는 로마 황제를 엄히 정죄하였습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예배당에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암브로시우스였습니다. 성 어거스틴을 모니카와 함께 기독교로 개종시킨 주교입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 분과 밀라노에서 마주친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당 정문 앞에 버티고 서서 황제를 단호히 가로막았습니다. “못 들어갑니다.” 이는 생명을 건 선언입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이러한 자세 앞에서 황제는 얼떨결에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 왕도 죄인이 아닙니까?” 황제는 변명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가 말했습니다. “다윗의 죄를 모방하시렵니까?”암브로시우스는 황제의 말문을 막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참회도 모방하셨야지요. 다윗처럼 회개를 하십시오!” 황제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이 그림의 배경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해주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죄는 어떤 죄든지 용서해주십니다.

 

구약의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어야만 완전 자유를 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도피성이신 주님에게 피하는 순간부터 자유하게 된다.

본문 28절을 보면 도피성에 피했던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과실치사를 범하고 도피성에 피했습니다. 그가 피한 후에 대제사장이 하루 만에 죽었다면 그는 하루 만에 자유인이 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이 10년 후에 죽으면 그는 10년 후에 자유를 얻습니다. 만약 50년 동안 대제사장이 죽지 않는다면 그는 50년 동안 도피성에서만 지내야 합니다. 감옥 생활을 50년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그가 대제사장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는 평생 감옥 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써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구약의 도피성보다 더 좋은 도피성이신 것입니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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