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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1016]하나님과 동행하기

하나님과 동행하기

창세기 5:21-24

설교자: 비전교회 마경훈 목사

에녹은 아담의 7대 손입니다. 에녹의 뜻은 하나님의 신임을 받았다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창세기 5장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므드셀라로 969세를 살았습니다. 두 번째 오래 산 사람은 야렛으로 962세를 살았습니다. 세 번째가 노아로 950세를 살았습니다. 창세기 5장에 수명이 기록되어 있는 족장이 10명입니다. 에녹 빼고 그들의 평균 수명은 912세였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오래 살았느냐? 그 이유에 관해서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1:7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궁창 위의 물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것이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이나 방사선 등을 막아줬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 수 있었다고 봅니다. 실제로 햇볕에 오래 노출되어 있는 사람은 노화가 빨리 오고 대체로 수명도 짧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남태평양 피지에 선교를 간 적이 있는데 거기는 햇볕이 무척 강합니다. 그래서인지 피지의 20세 청년이 우리나라 60세 노인처럼 늙어 보인답니다. 홍수 이전에는 궁창 위에 물이 있어서 자외선과 방사선을 막아줬는데 창 7:11을 보면 홍수가 나면서 궁창 위의 물이 터져버립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사람의 수명이 120세로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모세시대 이후에는 80세로 줄어든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912세이니 에녹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에녹은 365세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을 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길이가 아니라 인생의 질입니다. 에녹은 365세를 살면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으신 만물 속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물을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교회에 계십니다. 우리가 가정에 가면 하나님은 가정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직장에 가면 하나님은 거기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동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교제하며 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을 찾으며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과 교제하시며 에녹의 생활 속에 깊이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녹은 늘 하나님을 불렀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과 에녹의 동행을 분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동행하는 것이다.

동행의 조건이 있습니다.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있지 않는데 어떻게 동행하겠습니까? 서울에 있는 우리가 부산에 있는 사람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부산에 가든지 그가 서울로 와야 하지요. 그래야 동행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든지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지 않는 이상 하늘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하여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은 동행을 멍에를 함께 매는 것으로 표현해주셨습니다. 11:29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주님과 동행하려면 주님의 멍에를 함께 매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경험이 없는 소를 훈련할 때 경험이 많은 소와 함께 멍에를 매게 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소는 멍에를 단단히 매어 짐을 더 실리게 하였고, 경험이 없는 소는 경험이 있는 소와 함께 멍에를 매고 가지만 짐이 가벼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가지만 짐은 예수님이 지고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들과 아빠가 함께 무거운 짐을 듭니다. 그 짐은 아들이 들기는 불가능한 무게입니다. 어린 아들은 자기가 힘을 쓰기 때문에 자기 힘 때문에 짐이 들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짐이 들리는 것은 아빠의 힘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가지만 주님이 짐을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고 가볍게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은혜요,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도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도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주의 일을 할 수 없고 혹 한다 하더라도 열매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지 않으시면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깨어있음도 허사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동행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 구원을 받고, 믿음이 있을 때 기도응답도 받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실천할 수 있고, 믿음으로 병고침도 받고, 믿음으로 축복도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11:5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에녹은 믿음으로 승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승천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말씀인 히 11:6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통해서 에녹이 어떻게 믿음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에녹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하나님하며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생활입니다. 1:20-21에 보면 어디서나 우리를 부르는 지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성경을 깊이 보게 되면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에서만 우리를 부르시고 교회에서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도, 광장에서도, 시끄러운 시장에서도,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도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에게 반응하면 우리는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박종렬목사님이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전도사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박종렬전도사가 충청북도 고향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 밤에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를 하시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멀리 어둠 속에서 종렬아~ 종렬아~”부르며 누군가가 좇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네에 박 전도사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교인들 밖에 없는데 그들이 종렬아~ 종렬아~”라고 부르며 좇아 올리는 만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굴까? 도둑놈일까? 도둑놈이 박 전도사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굴까? 귀신일까? 박 전도사는 너무 무서워서 속도를 내어서 더욱 빨리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인지 귀신도 그만큼 더 빨리 따라오면서 더욱 더 크게 종렬아~ 종렬아~”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10리 이상을 계속 뛰어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는데도 내복이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건이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그 동네 사는 친척 아저씨가 마침 처가에 다니러 갔다가 박 전도사가 설교를 마치고 밤늦게 혼자 집으로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걱정이 되어서 동행해 주려고 좇아 왔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친척 아저씨가 박 전도사를 찾아와서는 종렬아, 너 걸음이 왜 그렇게 빠르냐? 네 걱정을 하면서 계속 좇아왔는데 너를 따라 잡지 못했다.”라고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려고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반응한다면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믿음으로 동행합니다. 우리는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3. 변함없이 동행해야 한다.

에녹이 몇 년 동안 주님과 동행했습니까? 300년입니다. 3년이 아닙니다. 30년도 아닙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3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환경의 변화가 있었겠습니까? 몸이 아플 때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1년에 1번씩만 감기에 걸린다고 해도 300번입니다. 300년 동안 감기만 걸렸겠습니까? 나이 50만 넘어도 무릎이 약해지고 디스크에 걸리고, 혈압도 올라가고, 눈도 침침해지는데 300년 간 얼마나 많은 질병을 경험했겠습니까. 에녹이라고 300년 동안 성공만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실패도 했을 것이고, 마음이 슬플 때도 많았을 것이고, 마음이 답답할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에녹은 날이 맑든지 흐리든지 비바람이 치든지 눈보라가 내리든지 언제나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에녹처럼 변함없이 해야 합니다. 잘될 때는 하나님 찾다가 좀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것이냐?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 신앙으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어느 분은 미스코리아 진 출신하고 결혼하려고 벤츠 자동차를 사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업이 어려워지니 미스코리아 진 출신인 여자가 아이들 두고 도망을 쳤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예쁘면 뭐합니까? 돈이 많을 때는 남편 옆에서 돈 쓰는 재미로 살다가 돈이 없어지니 남편도 버리고 아이들도 버린 여자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8:35-36을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사도 바울은 마치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후에 믿음의 길을 가면서 환난도 당했고, 곤고할 때도 있었고, 박해나 기근을 만날 때도 있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적신이 되기도 했습니다. 적신이 뭡니까? 옷도 빼앗겨서 벌거벗은 몸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 가지 위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도 에녹처럼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도 많이 만나지만 어려운 일도 많이 만납니다. 우리의 신앙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바뀌는 신앙이 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변함없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동행할 수 있다.

14-15입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은 마지막 때를 바라봤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주님의 심판을 바라봤습니다. 에녹은 노아시대에 있게 될 홍수 심판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시대를 보았습니다. 에녹은 주님의 재림을 보았고 주님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에녹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이 원하는 대로 막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종말론적인 신앙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나이 65세에 아들 무두셀라를 낳을 때 쯤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므두셀라라는 문자의 뜻은 창을 던지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더 깊이 해석을 하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입니다. 창을 던지는 자라고 하는 의미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의미입니다. 독특한 말입니다. 창을 던지는 자라는 말은 군사적인 언어입니다. 고대에는 전쟁할 때 군사들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성문에 창 던지는 사람을 한 사람 세워 놓았습니다. 군사들이 밖에서 싸우다가 지게 되면 적들이 성으로 몰려옵니다. 그 때 창던지는 자가 마지막으로 죽으면 전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창던지는 자가 죽음으로 전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환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적에게 짓밟히고 포로로 잡혀가고 집은 불태워지게 됩니다. 창던지는 자의 죽음은 환란의 시작입니다. 에녹은 65세에 아들을 낳고 창을 던지는 자라는 뜻을 가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종말의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 예언은 아들 므두셀라가 죽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던지는 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에녹은 종말을 바라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한 인식이 생겼습니다.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대한 개념이 없이 노아의 때처럼 롯의 때처럼 육신적인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가는데 종말을 인식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말에 대한 인식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스스로 대환란의 때에 피할 피난처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붉은 용이 나타나서 해를 입은 여자인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때 교회는 피난처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난처는 지금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12:6을 보겠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여자가 광야로 도망을 합니다. 여기 여자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광야에서 1,260일 동안 양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도망가는 예비처는 사람이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준비합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을 잘못 이해해서 일상생활을 중단하고 산이나 기도원에 칩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학교나 직장도 가지 않고 신부단장한다고 영적인 것만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생활입니다.

에녹을 보십시오. 에녹은 65세에 종말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300년간 수도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사명 중에 하나인 생육하고 변성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처럼 감당했습니다. 종말이 다가온다고 자녀출산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5장에 기록된 다른 사람들처럼 장가가고 자식 낳고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학고생활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종말론적인 생활입니다.

성경을 보면 지금이 마지막 시대인 것이 분명합니다. 지구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예언을 하나하고 죽었습니다.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한다.” 그런데 지금 지구상에 꿀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꿀벌의 개체수가 36%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양봉하는 사람들도 꿀벌이 줄었다고 야단입니다. 미국에서도 꿀벌이 사라지니까 아몬드 농장에서 아몬드가 열리지 않는 답니다. 그래서 어떤 아몬드 농장에서는 120만 마리의 꿀벌을 사서 농장에 풀어 놓았다고 합니다.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 저와 여러분은 휴거되어 공중에서 주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5. 뜻이 일치해야 동행할 수 있다.

3:3입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두 사람이 동행하려면 뜻이 맞아야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뜻이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인간의 뜻은 비진리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조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부부가 동행하려면 뜻의 조정을 통해 서로 맞추어 나아가야 합니다. 결혼생활은 서로의 뜻을 맞추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부들이 결국 파경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성 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드리신 기도였다고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이 복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13:36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저는 이 말씀을 자주 묵상하고 설교시간에 자주 인용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감탄이 됩니다. 다윗에 대해서 존경심이 생깁니다. 다윗은 정말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우리교회 모토는 위대한 비전이 위대한 인생을 만든다입니다. 제가 늘 설명 드리듯이 여기서 위대한 비전은 큰 비전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10대손까지의 족보입니다. 아담 창조부터 홍수가 날 때까지 시간을 계산해보면 1,656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죽었더라인데 총 8번 나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누구든지 개인적인 종말을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인생의 질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생은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에녹처럼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고차원적인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변함없이 동행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글쓴이 : 마경훈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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