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지혜 그리고 선택의 능력
룻 1:1-14(설교자: 비전교회 마경훈 목사)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를 늘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의 결과를 내가 받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사업수안을 보여주는 예화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미국인과 프랑스인과 유태인이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감옥은 죄수가 원하는 것을 하나만 그 안에 넣어주게 되어 있답니다. 그래서 담배를 원하는 미국 사람에게는 담배를, 예쁜 여자를 원하는 프랑스 사람에게는 예쁜 여자를 넣어주었습니다. 유대인은 전화기를 원하니 그것을 주고 외부와 통화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삼년이 지나 그들이 출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은 양 귀와 코에 담배를 끼워 넣고 입에는 담배를 물고 뛰쳐나오면서 “불불불불” 했습니다. 담배만 주고 불은 넣어주지 않아 삼년 간 담배를 보면서도 피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사람은 미인과 함께 아이를 안고 나왔습니다. 그 남자와 여자가 각각 아이를 한 명씩 안고 나왔는데 보니 그 여자의 뱃속에 또 아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나오면서 간수에게 “전화기를 설치해 주어서 고맙소. 내가 회사와 전화로 통화할 수 있어서 그 동안에 우리 회사가 200%나 성장했소. 고맙소. 내가 그 보답으로 당신에게 롤스로이스를 선물하겠소.”라며 그 비싼 자동차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담배를 선택한 결과, 여자를 선택한 결과, 전화기를 선택한 결과가 이렇게 달랐습니다. 선택은 내가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 결과도 내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 중에는 우리의 인생에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선택도 많지만 어떤 선택은 인생을 좌우하고 심지어 영생을 좌우하기까지입니다.
진로의 선택은 인생을 좌우합니다. 종교의 선택은 영원을 좌우합니다. 요즘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은 시대이기 때문에 교회의 선택과 목회자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은 선택을 잘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선택을 잘못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선택해서 대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은 30을 선택했기 때문에 주님을 팔게 되었고 그 결과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했는데 줄이 끊어져서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선택과 관련된 내용들이 나옵니다.
선택과 관련된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선택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능력은 2가지입니다. 첫째,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선택하려면 어느 것이 진리이고 어느 것이 비진리인지 분별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둘째, 진리를 받아드리고 따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시험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6:41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음에는 원이로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분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이 약하도다’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를 분별할 줄 알지만 진리를 따를 수 있는 능력, 진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진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룻기의 내용은 사사시대에 있었던 내용입니다. 유다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흉년을 피해서 자신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지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엘리멜렉은 이민 후에 모압에서 죽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압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의 이름은 하나는 오르바였고 하나는 룻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생활한지 10년이 되었을 때에는 불행하게도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그 후에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모압에 남으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가도 그들을 통해서 후사를 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차라리 며느리들이 모압에 남아서 다른 남편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두 며느리 중에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대로 모압에 남았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와 입을 맞추고 시어머니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다른 며느리 롯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시어미 나오미가 룻에게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룻은 나오미를 따라 가기로 굳게 결심하고 따랐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선택의 지혜 그리고 선택의 능력’입니다. 선택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환경이나 물질 그리고 사람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 그런 것들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욕심 때문이고 당장은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저주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엘리멕렉은 물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엘리멜렉은 아무리 어려워도 약속의 땅에 거하겠다고 다짐하거나, 하나님께 “하나님,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흉년을 피하기 위해 모압 땅을 선택했습니다.
엘리멜렉은 환경 때문에, 물질 때문에 약속의 땅을 버리고 환경이 좋고 먹을 것이 풍성한 그러나 우상숭배가 가득한 모압 지방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원수의 땅입니다. 이스라엘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을 집요하게 방해했던 사람들이 바로 모압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은 그곳에 가면 양식을 얻을 수 있을까 그곳에 가면 경제적으로 좋아질 수 있을까하여 이민을 간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이민을 결심한 이유는 경제적으로 좀 더 풍성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환경과 돈을 좇아간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욕심을 좇아간 결과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먹을 것이 풍성하니 살 것 같아지요. 그런데 결론은 엘리멜렉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10년 쯤 되었을 때 그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결국 살려고 선택한 땅인데 죽음을 만난 것입니다. 환경을 선택하고 물질을 선택한 엘리멜렉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돈 때문에 주일을 범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성공과 출세를 추구하는 것이 당장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사망의 길입니다. 롬 8:6을 보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마귀가 주는 미끼는 달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덥석 물면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 55:8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 우리가 원하는 길이 다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주님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다릅니다. 죄에 대한 무게감도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돈 욕심을 큰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간음죄에 대해서 대단히 크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간음죄를 범한 목회자는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도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릅니다.
성경에는 간음을 했던 사람은 회복된 경우가 있어도 돈 때문에 시험든 사람이 회복된 일이 없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철저하게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고 그를 위대한 왕으로 남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돈 때문에 시험든 사람들 중에 회복된 사람들이 없습니다.
여리고 전쟁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니 아무것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숨겼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물질적인 욕심 때문에 건강한 양과 소들을 남겨두고 약한 짐승들만 죽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무서운 말씀하셨습니다. 삼상 15:23입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의 뜻이 아닌 물질의 욕심을 선택한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 가룟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등이 물질적인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내용들이 나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돈이나 환경 그리고 사람이나 육신적인 편리함 때문에 중요한 선택합니다.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먼 선택을 합니다. 그런 선택을 하면 그 당시는 좋은 것 같지요. 그러나 결과는 비참하게 되는 것이고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이 그랬습니다. 흉년이든 가나안에 있다가 모압 땅에 가니 처음에는 먹을 것도 많고 좋았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신앙생활은 욕심을 내려놓아야 잘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을 죄와 사망이라는 줄에 묶여서 개줄에 묶인 개처럼 끌려 다니게 됩니다. 약 1:15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잠 28:25을 보겠습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욕심을 내면 잘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잘 되게 하셔야 잘 되는 것입니다.
딤전 6:9-10에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말씀합니다. 부하려고 하는 자들은 시험에 걸립니다. 올무에 걸립니다.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결국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미혹을 받아서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근심이 생겨서 그 근심이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주님을 만나면 아주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마귀가 신자들의 마음에 욕심이라는 가라지를 뿌립니다. 신앙생활은 마귀가 뿌린 욕심의 가라지를 분별하고 뽑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욕심을 품고 잘못된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많은 돈을 버는 것, 더 큰 집에서 사는 것, 더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더 큰 일을 성취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그 착각이 확신이 되어서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성취되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욕심이 성취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에서 벗어난 종교생활입니다.
본질을 놓친 왕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왕이 사랑하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무덤을 정성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왕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집도 지었습니다. 그 앞에 호수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잔디도 잘 심었습니다. 좋은 나무들을 심었습니다. 멋진 정원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곳을 방문한 왕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곳에 무덤이 있으니 보기 싫다. 무덤을 없애버려라” 신하들이 왕의 명령대로 왕비의 무덤을 없앴습니다. 무덤 주변을 아름답게 만든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왕비를 사랑해서 왕비를 그리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왕비의 무덤의 경치에 취해서 봥비의 무덤을 치워버렸습니다. 본질을 놓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면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합시다. 주님의 뜻을 살핍시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다하여 살아갑시다.
환경이나 물질 그리고 사람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맙시다. 그런 것들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욕심 때문이고 당장은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저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 그것이 진짜 복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의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고, 좁은 길을 걷는 삶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꿈도 없이 인생의 목적도 없이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욕심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꿈을 찾고 내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꿈을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나오미의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권면을 듣고 모압지방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로 갑니다. 16-17절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의 말을 들어보면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는 것은 효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룻에게는 여호와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룻은 자신의 신앙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백순화 집사님이 간증하며 고백했던 내용입니다. 백순화집사님이 그런 고백을 한 것은 제가 훌륭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나온 간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룻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효심을 다해서 시어미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가 룻 4:21-22에 나옵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 말씀에 보면 보아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다윗을 낳은 이새의 할아버지고 다윗 왕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이방인이었고 여자였던 룻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보니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조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님의 족보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마 1:5-6을 보겠습니다. 그 족보에 룻이 나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환경이나 물질 그리고 사람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욕심을 따라 살면 그때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망하는 길 저주 받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것이 복이 되고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창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창 12:1-3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타지방에서 이사를 오면 텃세를 하기는 지방도 있다고 하는데 고대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고대에는 힘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종으로 삼았고 심지어 남의 아내도 예쁘면 빼앗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아브라함이 죽을 수도 있었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길 수도 있고 아니면 거지가 되거나 노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했습니다. 창 12:4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모험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가정적으로, 물질적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자신의 세대에도 복이 넘쳤고 오고 오는 세대에서 높임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자 가족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간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세상을 선택한 교인들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에서 ‘엘리’는 “나의 하나님”, ‘멜렉’은 “왕”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부모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너의 삶에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신다.”는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그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약속의 땅에 흉년이 불어 닥치자, 그는 자신의 이름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욕심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중심에 항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하는 선한 소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물질을 선택하면 물질을 얻지도 못한 채 망하지만, 신앙을 쫓아가면 신앙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을 여러분들의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마십시오. 육신의 자리로 내려가지 말고 영적인 자리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일까요? 좁은 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좁은 길은 실패의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승리의 길입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마 7:13-14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러분,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엘리멜렉은 넓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룻은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넓은 길을 선택한 엘리멜렉은 망했고, 좁은 길을 선택한 룻은 승리했습니다.
좁은 길은 내가 죽고 너를 살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군대는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정신으로 싸웠습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그랬습니다. 비행기를 몰고 적의 함대와 부딪혀서 자기도 죽고 적도 죽이는 작전이었습니다.
공산당은 “너 죽고 나 살자”라고 말합니다. 공산당이 말하는 자유 평등은 다 거짓말입니다. 공산주의는 결국 개인의 우상화입니다. 모택동이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고, 김일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우상화하기 위해서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잔인한 사상입니다. 마귀사상입니다.
상식적인 사람들은 “너 살고 나 살자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윈윈하는 것입니다. 나도 승리하고 너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좋은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너 살고 나 죽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어지므로 네가 사는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우리 주님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자신을 희생하셔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범사에 욕망의 길을 선택하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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