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경 : 마태복음 13:31~32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영원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에이지 골든이라는 신학자는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성령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을 논할 때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가 갖겠다고 해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종종 믿음을 크기로 말하지만 믿음은 크기가 아니라 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에서 깨닫게 됩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하지만 이 겨자씨가 땅에 심겨져 자라게 되면 나무가 되고, 많은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보잘것없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산 아래 내려오셨습니다. 어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이 산들을 옮겨 저리로 가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이 말씀에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겨자씨만한 믿음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는 번역상의 잘못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because of 그 이유가 뭐냐? You're unbelieve 너희가 믿음이 없다.” 이 말은 믿음이 작고 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크고 작음을 말하는 양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신의 종이 병들었으니 고쳐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따라 나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명령만 하시면 내 종이 나을 줄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향해 “내가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백부장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귀신 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개들도 자녀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삽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합니다.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던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100% 예수님을 믿도록 역사하십니다. 80%만 믿고 20%는 우리의 지혜대로 산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을 향해 믿음이 작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반면 100% 예수님을 믿으면, 백부장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네가 믿음이 있다.”고 축복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저희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해라.” 이렇게 용서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더 커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크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너희 마음속에 있는 미움, 원한, 시기, 이 모든 것이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지듯이 뿌리째 뽑혀져서 저 바다에 던져질 것이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하며 산다는 것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원한의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의 쓴 뿌리, 원한의 쓴 뿌리, 미움의 쓴 뿌리는 성령의 역사로 뿌리째 뽑혀져서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미움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겨자씨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큰 나무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큰 나무가 될 줄을 믿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산이 움직여질 줄을 믿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져질 줄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님 나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겨자씨 한 알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실 때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삶 속에 임하며 하나님께로부터 귀히 쓰임받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역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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