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절망에서 소망으로(5:18-21)
모든 동물에게는 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능은 후천적으로 배워서 터득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오는 성질이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본능이 동물에게 얼마나 원초적이고, 뿌리 깊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험이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지방에 가면 멧새과에 속하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갈대 잎을 부리로 아주 가늘게 찢어서 그것을 얼기설기 짜서 둥지를 만듭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새는 둥지의 입구를 위쪽으로 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전후좌우 양쪽에 내는 것도 않습니다. 언제나 출입구를 아래쪽에다 구멍을 뚫어서 만들고 거기로 드나듭니다.
모리스라는 유명한 조류학자가 여기에 착안을 해서 실험을 했습니다. 둥지에서 새 알을 몇 개 끄집어내었습니다. 이 알을 환경이 전혀 다른 먼 곳으로 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공적으로 알을 부화시켰습니다. 물론 그곳에는 갈대가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그 뒤 그 새를 위해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로 된 새집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새집의 입구는 물론 앞쪽으로 뚫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새의 5대째까지 인공적으로 만든 집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대를 이을 때마다 알을 일부러 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마지막 5대 째의 새를 조상들이 본래 서식하고 있던 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새를 날려보냈습니다. 그 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스스로 집을 지어본 적도 없습니다. 갈대를 본적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갈대밭을 보는 순간 그 즉시 날아가서 부리로 갈대를 잘게 찢기 시작했습니다. 또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둥지의 출입구를 정확히 둥지 아래쪽에다 내더라는 것입니다. 동물의 본능이 얼마나 원초적이고 뿌리 깊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 실험이었습니다.
물론 동물에게만 그런 본능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이런 본능이 있습니다. 갓난아기에게 젖꼭지 빠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잘 빨지 않습니까? 본능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육적인 본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도 심리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키워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전자동입니다.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싸우고, 욕심부리고, 속이는 일등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린 아이들은 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락한 본능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신학적으로 "원죄"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은 어쩔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존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로 오염되어서 그것이 타락한 본능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 인간은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대로 지어진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그 원초적인 곳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다 자리잡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죄라는 더러운 껍질에 둘러싸여서 잘 나타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본능, 악의 본능과 같은 껍데기를 제거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일깨워주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절망하지 마십시다.
편의상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절망에서 소망으로 벗어날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18∼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절망에서 벗어나서 소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가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는 다섯 단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8절을 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첫째 "한 범죄로"입니다.
둘째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입니다.
셋째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넷째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입니다.
다섯째 "생명에 이르렀느니라"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범죄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류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과거에는 죄인이 되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가 과거에는 죽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조금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과거에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범죄의 본질과 의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아담의 범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것을 불순종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본문은 순종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을 것이다."
그런데 간교한 뱀이 하와를 꾀었습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어. 먹으면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같이 될 수 있어."
하와는 아담과 자신이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가 비로소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 일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엄청난 비극과 파멸이 인간 세상에 초래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순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2:6∼8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종처럼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순종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양을 복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원숭이를 복제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수년 내에 인간까지도 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 복제를 환영합니다. 그것으로 인류의 질병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내가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면 나와 똑같은 인간을 복제해서 그 복제 인간의 장기를 이식 받으면 불치의 병도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이 사람의 손으로 다른 사람을 복제한다는 것은 인간 생명의 기원인 창조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감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은 오만불손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반드시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악과를 따먹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엄청난 비극과 파멸이 인류에게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장난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아담처럼 창조 질서에 불순종하다가는 엄청난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는데 위치한 징검다리를 살펴봅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는데 위치한 하나의 징검다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해 봅니다. 여기에 아담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나아가는데 위치한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죄의 심각성을 더욱더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 그 자체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지는 않습니다.
존 번연이 쓴 책인 천로역정을 읽어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크리스천이 시온 성을 바라보면서 순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어떤 집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주인의 이름은 해설자(Mr. Interpreter)입니다. 해설자가 크리스천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을 어떤 객실로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그 객실은 한 번도 소제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방안에 얼마나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겠습니까? 해설자가 크리스천에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당신에게 아주 유익한 것을 한 가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해설자는 하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방안에 쌓여 있는 먼지를 털게 했습니다. 하인이 먼지를 털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먼지가 일어났습니다.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잠시 뒤에 해설자가 옆에 있는 소녀에게 물을 가져와서 뿌리라고 했습니다. 소녀가 물을 가지고 와서 뿌리기 시작하니까 잔뜩 일어났던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뒤에 방이 깨끗하게 소제가 되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해설자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해설자가 이렇게 풀이를 해 주었습니다.
"이 방은 인간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방에 잔뜩 쌓인 먼지는 인간의 몸을 더럽히고 있는 죄와 부패입니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것입니다. 먼지를 털기 시작했던 하인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을 갖다 뿌린 소녀는 복음을 상징합니다. 처음에 하인이 먼지를 털기 시작했을 때 먼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많이 일어났지요? 율법의 역할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물을 뿌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먼지가 가라앉고 깨끗하게 소제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복음만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때,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그 자체가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안내자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지고 있는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더러운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아무리 많고 많다 할지라도 더욱 크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죄를 다 덮어버리고도 남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믿음으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더러운 본능의 찌꺼기, 곧 죄와 악의 본능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치 않지만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괴롭습니다. 사탄이 옆에서 우리를 송사합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가 그 모든 죄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내 죄가 비록 주홍빛보다 붉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를 흰눈보다 더 희게 씻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사실을 명심하면서 절망 가운데 몸부림치지 마시고 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이제 절망의 나라에서 벗어나 소망의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1절에서 우리가 이제는 절망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소망의 나라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과거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했습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이전에 그 때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가 무슨 권세를 휘두르면서 우리 위에 군림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나라에 살지 않습니다. 절망의 나라에 살지 않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무엇이 더욱 넘쳤다고 했습니까?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우리는 은혜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소망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나 같은 죄인까지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살리시고, 믿음으로 의롭다고 해 주신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나같이 쓸모 없는 존재까지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만 해도 우리의 가슴이 감격스럽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나라에 살지 않고,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과 더불어 역사한다고 했습니까? 21절입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혼자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 말미암아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의와 더불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족할 수 있습니다. 범죄할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사탄은 옆에서 우리를 송사합니다.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더욱 넘치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가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보니까 큰 책이 마틴 루터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 속에는 루터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가 남김없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 옆에는 악한 마귀가 서 있었습니다. 악한 마귀가 음흉한 웃음을 띠고서 책 속에 기록된 루터의 죄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렇게 송사합니다.
"너 이럴 때 이런 죄를 지었구나. 여기 또 이런 죄를 지었네. 이렇게 비열한 죄도 지었어?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뭐 종교개혁을 감히 일으켜? 어림없는 소리 그만 집어쳐!"
그러니 루터가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풀이 죽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루터의 마음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의 마음 속에 솟구쳐 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일1:7의 말씀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이 떠오르는 순간 루터가 힘을 얻었습니다. 악한 마귀를 향해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말한 대로 그런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한 사실을 너는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렇게 외치자 그 순간 악한 마귀는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실족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넘쳐 흐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욱 큽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사망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망을 향해서 담대하게 호통을 칠 수 있습니다. 고전15:55의 말씀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빛과 사랑이 넘치는 저 하늘 나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세세무궁토록 왕노릇하는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절망의 나라에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소망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고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장차 예수님이 우리 머리에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다 벗어버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시는 그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시며, 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뜨겁게 헌신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놀라우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죄로 인해서 절망 가운데 빠졌던 저희들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구속해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삼아주신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사랑, 그 은혜에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충성을 다하고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는 우리 승동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쓸모 없는 죄인된 우리까지도 사랑해 주시고, 구속해 주셨사오니 저희들도 이 사랑과 은혜를 실천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나를 해코지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둠의 자녀가 아닙니다. 늘 빛 가운데 걸어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 주시고, 악한 죄의 길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복된 삶이 다 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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