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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28강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라(6:1-4)

제28강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라(6:1-4)  


19세기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글 가운데 「그 날 이후」라는 짤막하면서도 아주 교훈적인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잠시 이 땅에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나서 그 날 이후에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과연 예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일 먼저 한 술주정뱅이를 만났습니다. 술에 취해서 그의 코는 빨갛게 변해 있었습니다. 손발도 몹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골이 상접해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알아보시고 측은한 심정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물어보셨습니다.
"형제여, 어찌하다가 이 모양이 되고 말았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셨군요. 내가 앉은뱅이로 있었을 때 당신은 나의 두 다리를 고쳐주셨지요. 그런데 내가 앉은뱅이였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구걸을 하며 살았어도 별로 부끄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나의 두 다리를 성하게 고쳐주고 난 뒤에는 아무도 나를 동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방황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어떤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얼굴에 아주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알아보시고 물으셨습니다.
"자매여, 자매는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소?"
그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귀신 들렸을 때 당신이 내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내가 귀신이 들렸을 때는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불행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정신으로 온전히 돌아섰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외로웠습니다. 비참한 내 모습을 보고서 나도 모르게 점점 더 타락의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상념 속에서 이번에는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선창 가에서 어떤 청년 하나가 대낮부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다른 사람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라서 그를 붙들고 물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대낮부터 이게 무슨 짓인가?"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왈칵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내가 눈먼 소경이었을 때는 그래도 마음만은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더러운 세상 꼴을 두 눈으로 보면서 살려고 하니까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되는대로 분풀이를 하다 보니까 지금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유지하며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일깨워주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나라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은혜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은혜를 받은 자답게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1∼2절 상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집요할 정도로 믿음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반복해서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거기다가 바울은 5:20에서 하나의 폭탄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무슨 뜻입니까? 내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백이요, 천입니다. 내 죄가 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는 수십만, 수백만, 수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죄악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 현재, 미래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모든 죄악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욱 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듣게 될 때,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행위는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했으니까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사실 우리에게는 늘 이러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일이 나쁘다는 사실을 뻔히 압니다. 그런데 스스로 정당화시킵니다.
"괜찮아. 하나님은 너그러운 분이시니까 얼마든지 용서해 주실 거야. 죄짓고 또 회개하지 뭐. 그러면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 거야."
그러면서 죄의 유혹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분명하게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사도 바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 보내주셨습니다. 죄인인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화란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가 그린 그림 가운데,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렘브란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로마 병정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머리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셔야 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은 창에 허리를 상하셔야 했습니다. 내가 손으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손바닥에 굵은 못이 박혀야 했습니다. 내가 발로 짓는 죄 때문에 예수님의 발에 굵은 못이 또한 박혀야 했습니다. 우리가 이 엄숙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어찌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살펴봅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왜 우리가 죄에 더 거할 수가 없습니까?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몸인데 어찌 죄 가운데서 더 살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인연이 다 끝났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으면 땅에 묻어 버립니다. 미련 없이 묻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어떤 젊은 여인이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땅에 그 시체를 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리관을 하나 구해서 남편의 시신을 그 유리관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서재에 유리관을 보관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서재에 가서 죽은 남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물론 죽은 남편이 대답해 줄 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의 울적한 마음도 달랠 겸 멀리 구라파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을 하는 도중에 새로운 남자를 만났습니다. 데이트를 하다가 마음이 서로 맞아서 서로 결혼을 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이 자기의 새 남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일 먼저 남편의 서재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죽은 옛 남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여보, 나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왔어요. 나 없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어요?"
그 모습을 보고 새 남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새 남편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죽은 옛 남편과 계속해서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시체를 묻어 버리고 자기와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 시체와 한 집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죄가 왕노릇 하는 죄의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 대해서 죽은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와 세상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천국을 향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죄라는 열차를 타고 지옥을 향해 내려갔지만, 이제는 은혜의 열차를 타고 천국을 향해서 올라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는 썩어 냄새나는 몸을 들먹거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죄에 대한 유혹에 자꾸 빠집니까?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데 철저하게 죽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 전 참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니교에 완전히 심취해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에 힘입어서 그가 예수 믿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새 사람이 되고 난 뒤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옛날 술집에서 함께 어울리며 즐기던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호들갑을 떨면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어거스틴, 나 모르겠어요? 왜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우리 가서 함께 술 한 잔 나눠요."
그 때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과거의 당신 그대로이지만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오. 그 때의 나는 벌써 죽었소."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지으래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왜 우리가 이런저런 죄의 유혹에 빠집니까? 아직도 철저하게 죽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에 대한 충동과 유혹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을 때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몸입니다. 그 가운데 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단호하게 죄에 대한 충동과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세례를 비유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3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세례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 속에 푹 잠겨서 예수님과 하나되고, 예수님과 일치하는 것이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특별히 어떤 점에서 예수님과 연합이 되는 것인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깊은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의 무엇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까? 그의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실 때,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우리들도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똑같은 사실을 다시 한 번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중요한 말이 덧붙여졌습니다.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장사되었다고 했습니다. 장사되었다는 말은 땅속에 파묻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삼일장을 지냅니다. 오일장을 지내는 집도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일수록 그 날수가 길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행여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보고서 땅에 파묻는 것을 잠시 보류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완전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 버린 것이 아닙니다. 4절 말씀을 계속해서 보시겠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우리들도 함께 예수님과 더불어서 다시금 새 생명을 입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는 아담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우리도 함께 따먹었습니다. 아담과 더불어서 범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는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아담과 연합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죽게 되었고, 예수님과 더불어 장사지낸 바 되었고, 예수님과 더불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떠한 삶이 되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4절 제일 끝 부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의 옛사람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옛사람을 더이상 들먹거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죽어 냄새나는 썩은 시체를 자꾸 파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의 자녀가 아닙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가문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해서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해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믿음으로 의롭게 해주셨으니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보답하는 심정으로 의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107년 역사 동안에 13명의 담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물론 다 훌륭하신 목사님들이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유명하신 분이 있습니다. 제8대 당회장이었던 김익두 목사님입니다.
김익두는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 시험에 응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 뒤에 장사에 손을 댔습니다. 희한하게도 하는 장사마다 되지 않습니다. 홧김에 술집을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마셨습니다.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이 되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게 만드는 아주 불량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김익두가 시장 바닥에서 어린 아이가 건네주는 전도지 한 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근의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그 난봉꾼이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 날 밤 몰래 부흥사경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김익두는 세례를 받기까지 약 10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두 백 번 통독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1년에 성경을 한 번 읽기도 힘이 듭니다. 그런데 10개월 동안 신구약 성경을 백 번이나 읽었으니까, 그 열심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친구들이 그에게 술 마시러 가자고 권합니다. 그럴 때마다 김익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돼. 내가 지금 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어."
"무슨 약을 먹고 있는데?"
"신약과 구약을 먹고 있어. 그렇게 좋은 보약이 없지. 너희들도 한 번 먹어봐. 달라질 거야."
드디어 그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김익두는 자기의 옛사람이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입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익두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부고장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김익두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부고장을 받아들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에이, 그놈 잘 죽었다. 속시원하다. 이제 발 쭉 뻗고 편안히 잘 수 있겠구나!"
김익두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의 장례식 날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죽었다고 하던 김익두가 맨 앞자리에 딱 버티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저놈은 너무나도 지독해서 염라대왕조차 데리고 가기 싫어하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김익두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과거에 알고 있던 김익두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김익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김익두입니다."
그 뒤 그는 평양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6.25 동란 당시에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원이 무차별 난사한 총에 맞아 순교하기까지, 그는 참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2만8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면서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전국에 150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통해서 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깡패 김익두가 변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의 역사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비단 김익두 목사님 한 분의 체험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우리는 아담과 연합해서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해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놀라운 고백이 이 시간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아담과 연합해서 죄와 허물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놀라우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갖게 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몸입니다.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을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어둠의 일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빛 가운데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보답하는 심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과거에는 죄와 세상을 향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예수만을 나의 보배로 삼고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의의 면류관을 쓰는 그날까지 허락하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서 주님의 뒤를 겸손히 따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해 주옵소서. 매일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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