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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29강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 (6:5-7)

제29강 예수그리스도와의 연합 (6:5-7)


어느 마을에 쌍둥이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한날 한시에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들입니다. 얼굴도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성격은 천지 차이였습니다. 형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선량했습니다.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전연 딴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망나니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깊은 밤중에 동생이 갑자기 형이 자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어왔습니다. 형이 보니까 동생이 입고 있는 옷에는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동생은 겁먹은 목소리로 형에게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형, 내가 어쩌다가 잘못하여 사람을 죽였어. 지금 경찰들이 쫓아오고 있어. 나를 좀 살려줘."
형은 그 소리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동생의 피 묻은 옷을 벗겼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옷을 대신 입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는 자기의 깨끗한 옷을 입혔습니다.
바로 그 즉시 경찰들이 뒤쫓아왔습니다. 형은 그 자리에서 살인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형이 입고 있던 피 묻은 옷이 증거물로 제시되었습니다. 또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서 얼굴이 같으니까 형이 사람을 죽인 범인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사자였던 형 자신이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애써 드려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형은 자기 동생을 대신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동생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양심의 가책을 이길 도리가 없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기 때문에 죄 없는 자기 형, 의로운 자기 형이 대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형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러나 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형이 자기에게 남긴 편지 한 장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우야, 나는 이 죽음에 대해서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단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입혀준 그 옷을 입고서 깨끗하고도 의롭게 살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사실 나는 네가 나보다도 훨씬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그래서 내가 이 땅에서 살아서 이 땅에 남길 수 있는 것보다도 네가 내 대신에 남길 수 있는 업적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이 죽음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단다. 사랑하는 내 아우야, 내 말을 부디 명심하거라. 어찌하든지 내가 너에게 입혀준 그 옷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부탁하는 마지막 소원이다."
동생은 그 편지를 읽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그때부터 동생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두 몫을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한 몫은 자기 대신 죽은 형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몫은 자기의 변화된 인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형이 자기에게 입혀준 깨끗한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일깨워주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더러운 옷, 피 묻은 옷, 추한 옷을 대신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끗한 옷, 예수님의 의의 옷, 거룩한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한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너에게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주었으니까 그 옷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아다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깨끗하고 의롭게 살아다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누구와 연합되었다는 것입니까? "그의 죽으심을"이라고 할 때의 그가 누구입니까? "그의 부활"이라고 할 때의 그가 누구입니까? 누가 죽으셨다가 부활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달랐습니다. 그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과 연합된 존재였습니다. 아담과 연합한 우리의 존재는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우리도 함께 따먹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 우리도 함께 범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아담과 인연을 맺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인연을 다 끊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서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과학자들이 병아리로 하여금 메추라기 울음소리를 내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메추라기의 뇌 세포 속에서 울음소리를 내도록 작용하는 부분을 살짝 도려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달걀 속에서 부화되고 있는 병아리의 두뇌에 이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병아리들이 부화되어 나와서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메추라기의 울음소리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우리에게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마음 속에 이식시켜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죄인의 소리를 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본받아서 거룩한 소리를 내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그 순간 우리는 의인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고 했는데 특별히 어떠한 점에서 연합이 되었는지를 두 가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이 되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떠한 죽으심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육체적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떠합니까?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으심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죄 값으로 인하여 마땅히 죽어야 할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의 차이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똑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저 본받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은 자 되면 우리가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도 본받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살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죽으라는 것입니다. 먼저 죽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너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맛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이 원리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신의 삶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이 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은 우리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을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둘째로 "죄의 몸이 멸하여," 셋째로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의 죽으심을 본받은 우리가 첫째로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때 여러분은 과연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냥 멀리 서서 쳐다보고만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제가 물어봅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서 갈보리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눈에 도대체 무엇이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피 흘리시면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또 무엇이 보입니까? 아담과 연합된 나의 옛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악과 정욕에 물들었던 나의 옛사람도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두번째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라고 했습니다. 옛사람을 죄의 몸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죄악과 정욕에 물들었던 우리의 옛사람, 불의의 병기로만 사용되었던 우리의 옛사람이 이제는 완전히 멸하여졌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땅 속에 완전히 묻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안다고 하면서 자꾸 왜 옛사람을 들먹거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그것을 파내면 냄새만 날 뿐입니다. 악취가 코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옛사람을 더 이상 들먹거리지 마십시오. 완전히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우리가 자꾸 옛사람이 구습을 쫓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와 관련이 없습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연합되었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악된 본능 때문에, 타락한 본능 때문에 우리는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자석 아시지요? 쇠붙이가 자석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석이 움직이는 대로 쇠붙이는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연합되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이미 다 지불해 주시고 우리는 죄에서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요,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죄라는 열차를 타고서 어쩔 수 없이 지옥을 향해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잖아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나오는 은혜라고 하는 열차를 타고서 천국을 향하여 올라가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똑바로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더욱더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이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의 죄의 몸은 완전히 멸하여졌습니다. 아울러 이제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게 되었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그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죽은 자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더 이상 들먹거리지 맙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으면 땅 속에 묻어 버립니다. 미련 없이 땅 속에 묻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옛사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죄씨 집안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의씨 집안의 사람으로 옮겨졌습니다. 여러분,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이제 한 번 일단 시집가게 되면 싫으나 좋으나 그 집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씨 집안에서 의씨 집안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만 나의 보배를 삼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의인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의인답게 살아야 하지요.
여러분,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탕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탕자를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탕자로 영접한 것이 아니라, 아들로 영접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를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아버지는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소리질렀습니다.
"얘들아,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비단옷을 입혀라. 금가락지를 그의 손에 끼워주어라."
물론 탕자가 처음 돌아올 때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가면 이렇게 말하리라. 아버지여. 나는 아버지와 하늘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도저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만일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그것만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기뻐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잘 헤아렸습니다. 아버지가 입혀주시는 대로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또 아버지가 베풀어 주신 잔치에도 기쁨으로 말없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뜨거운 눈물이 왜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아버지의 마음 아프게 하지 아니하리라. 이제부터는 내가 아버지의 아들 노릇을 한 번 잘해보리라. 그리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아들이 되리라."
이와 같은 결단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원래 자격이 없는 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너는 의인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이제 죄에서 벗어나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런 줄로 알아야지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지요. 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의인답게 살아가리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리라. 내가 하나님의 딸답게 살아가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은 자 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거룩한 성일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시고, 오늘은 특별히 성찬예식에 임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위하여 찢기어진 예수님의 살을 먹고, 나를 위하여 아낌없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마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게 해주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나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되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우리의 옛사람도 십자가에 함께 못박혔다는 사실 깨닫고 이제는 더 이상 옛사람의 구습을 좇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이 되었사오니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희들의 거룩한 모습 경건한 모습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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