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강 믿고 알고 여길지어다(6:8-11)
1815년 6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영국의 웰링턴이 이끄는 군대와 불란서의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는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영국 본토에서는 싸움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무선 전신이 발명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배에서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면 해안에서 그 신호를 육안으로 식별해서 내용을 아는 도리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해변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짙은 안개 때문에 행여 배에서 오는 신호를 놓칠세라 눈을 부릅뜨고 멀리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깜박깜박하면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맨 먼저 웰링턴을 가리키는 신호였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과연 그 뒤에 어떤 말이 이어서 나올 것인지를 기다렸습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배에서 신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뜻밖에도 패배를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웰링턴이 패했다는 것입니다. 영국 국민들은 낙심했습니다. 남편을 싸움터에 보내고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영국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육안으로 모든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에서는 계속해서 신호가 오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패전 소식이 아니라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웰링턴이 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웰링턴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신호였습니다. 그런데 짙은 안개 때문에 그 신호 가운데 "적"이라는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기쁜 소식은 삽시간에 영국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러니 영국 국민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손에 손을 맞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모두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2천년 전에도 이와 똑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날은 슬픔과 눈물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실 때 예루살렘 여인들은 가슴을 치면서 슬피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루살렘의 여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슬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사흘 동안은 참으로 비참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예수가 패했다! 예수가 죽었다!" 이와 같이 참담한 소식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창에 찔린 허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면서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가 패했다는 소식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패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치고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이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또 어떻게 여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 세 가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여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차례대로 간단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8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믿노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 믿음입니다.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나 혼자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나 혼자 죽으면 큰일납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활 신앙입니다.
왜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죽음을 생각해 봅시다. 돌이 날아옵니다. 그런데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스데반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아름답고 멋진 고백입니다.
초대 교회 때 어떤 여자 성도가 자기의 어린 아들과 함께 핍박자들에게 잡혔습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던져졌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성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엄마, 무서워!" 하고 어머니의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얘야, 눈을 꼭 감고 조금만 참아라. 잠시 잠깐 뒤면 우리의 눈앞에 밝고도 환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란다." 그러면서 저들은 담대하게 죽음의 관문을 뛰어넘었습니다.
2000년 2월 10일 12시 정각이었습니다. 함경북도 무산시에서 한 여인이 총살을 당했습니다. 리영희라는 37세의 여성이었습니다. 총살 책임자가 "발사준비!"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리영희는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
드디어 "발사!"라는 구령과 함께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리영희는 "주여!"라는 외마디 소리를 마지막으로 순교했습니다. 그 때 총살형을 지켜보았던 한 사람이 탈북해서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국 선교사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여 리영희의 죽음은 널리 알려졌습니다.
리영희와 그의 남편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습니다. 그들은 한국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던 처소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남편은 복막염을 앓고 있었습니다. 처소교회에서는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3개월 후 회복되었습니다. 두 부부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성경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자기 동네로 돌아왔습니다.
리영희는 그후 2년 동안 중국을 들락날락하면서 소형 성경책을 많이 가지고 와서 동포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리영희는 자기를 고문하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니 동무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는 극심한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자기를 도와준 선교사님의 이름과 처소교회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한국 선교사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도처에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99년 한해만 하더라도 400여명이 공개처형을 받았는데 그중 1/3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땅에 제2, 제3의 리영희가 양육되고 있으며 수십 개의 지하교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순교를 당하는 그날까지 이 일을 할 것이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는 2천년전 사자 밥이 되던 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살아도 좋고, 죽으면 더 좋고!"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살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스러운 손길을 붙들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는 어떠합니까?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저 하늘 나라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오면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까 죽으면 더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우리의 마음가짐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반드시 살 줄을 믿나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확실하고도 분명한 답변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이는 앎이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확고한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9절에서 세 가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9절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라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 것을 압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찬찬히 읽어보세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한두 사람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심지어는 5백여 성도가 보는 가운데 일시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 두 개인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환상을 본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사로잡히실 때만 해도 그들은 무서워서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렸던 베드로는 멀찌감치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차마 예수님을 시인하지 못하고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이 하루 아침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담대하게 나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칼로 목이 베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으로 던지움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처음부터 예수를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대적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모조리 잡아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얼마나 바뀌었습니까? 이제는 오직 예수만을 위해서 살고 예수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시 유대인들은 이레의 제일 마지막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레의 첫 날인 일요일, 곧 주일에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어졌습니까? 바로 주일 아침에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바뀌어서 주일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증명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지구상에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고,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몇 번 죽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여러 번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것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도 죽은 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또 육신의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한 번 죽으시고 영원히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5백여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람산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압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9절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사망이 다시는 예수님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비록 일시적이지만 사망의 영역에 들어오셔서 사망을 몸소 맛보셔야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망의 영역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이래로 이 땅에는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망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망의 종노릇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를 구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사망의 영역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적진에 아군이 갇혀 있습니다. 그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서 특공대가 투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사망의 사슬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망의 영역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셔서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나실 때 예수님의 품안에는 누가 안겨 있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품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아울러 이 사망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도 다시는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뜬히 우리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우리의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니다.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보면 우선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이 서로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그 대상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은 무엇에 대하여 죽으심입니까? 죄에 대하여 죽으심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살으심은 무엇에 대해서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살으심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간 면에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번에 죽으심입니다. 두 번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매번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속죄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살으심은 어떠합니까? 다시는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으심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원리가 11절에 보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은 다 암송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새기는 의미에서 11절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어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아주 강한 명령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인정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기라고 했습니까? 첫째로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는 더 이상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짓지 못합니다.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죄의 충동과 유혹이 놓여 있을 때 우리가 어떠한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살아야 합니까? "나는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몸이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일과는 상관없다. 사단아, 네가 아무리 나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몸이다!" 이렇게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는 달랐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오히려 죄에 대해서 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만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여길지어다." 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삐치기 잘하고, 화도 잘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이제 아버지 하나님의 슬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하나님께 매맞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일 수 없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슬하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여길지어다." 여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롬4:9∼11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계속 반복적으로 강조해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단어가 계속 강조되었습니까? 계속해서 롬4:22∼24의 말씀을 또 읽어봅니다. 여기서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무슨 말씀이 계속 반복되었습니까?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셨으면 그런 줄 알아야지요. 우리가 뭐 그리 똑똑하고 대단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여겨주셨으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줄 알고 살아야지요. "이와 같이 너희도 …여길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여기지 못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면서, 스스로 인정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는 승리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한 말씀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여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여기면서 살아야 할인지 말씀을 통하여 일깨워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놀라운 체험들이 저희들에게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몸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허락 받은 우리들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할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우리들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면서, 그렇게 인정하면서 죄를 멀리 하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매일매일 드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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