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강 실천합시다(6:12-14)
요즘 들어와서 우리 기독교가 무기력해졌다, 힘이 없어졌다고 하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왜 우리 기독교에 이와 같은 자성의 소리가 높아져갑니까? 교회 수가 적어져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서 그렇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더라도 교회의 수가 우리나라만큼 많은 나라를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1980년 여의도에서 세계복음화 대성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열기는 정말 뜨거웠습니다. 1백만이 넘는 성도가 한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뜨겁게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놀라울 정도로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전세계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73년에 있었던 미국의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대성회, 1년 뒤에 있었던 엑스폴로 74, 그리고 3년 뒤에 있었던 민족복음화 대성회 등 굵직굵직한 대규모의 집회를 통해서 한국 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고 있다는 소식은 전세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1980년 여의도에서 있었던 세계복음화 대성회에 전세계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 참석했습니다. 일본에서도 대규모 복음 사절단이 우리 나라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세계복음화 대성회에 참석을 하고 나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 자기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발표했습니다. 그는 일백만이 넘는 성도가 한자리에 모여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고 대단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결국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깊이 실망했다. 왜냐하면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이겠습니까?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집회가 끝나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신문지 조각과 휴지들, 집회가 끝나자마자 너도나도 앞다투며 그 자리를 떠나겠다고 우왕좌왕하는 무질서한 모습, 특히 시내 버스에 먼저 올라타겠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밀고 당기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가 어떠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실천이 수반되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뭐합니까?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슴만 뜨거우면 뭐하겠습니까?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종교적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있고 힘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실천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천하는 믿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입으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두 어깨로 져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롬 6:8∼11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천천히 읽어볼 때에 각 절의 마지막에 나오는 동사를 여러분이 유의해서 잘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믿는다," "안다," "여긴다"는 동사들은 무엇을 뜻하는 동사들입니까? 교리적이고 신학적이고 이론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동사에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지 말아라," "드리지 말아라," "드려라." 우리의 결단과 행동과 실천을 촉구하는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교리적으로 깨달아 알았으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실천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해서는 안될 일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2절과 13절의 상반부에 있는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첫째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둘째로,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셋째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몸은 죽을 몸이지만, 잠시 잠깐 뒤에는 썩어질 육신 덩어리이지만 죄가 우리의 몸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에게 틈타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죄가 우리 몸을 틈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 우리의 몸에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말씀하고 있는 "몸의 사욕"입니다. 여러 가지 더러운 욕망들이 이것저것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더러운 욕구들을 갈 5:19∼21에서 열 다섯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죄에게 틈을 내주게 되면 이런저런 더러운 욕망들이 우리 마음에 절로 일어나서 나도 모르게 그것에 휩쓸리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세번째 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텐데 거꾸로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불의의 병기로 쓰이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한 마디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인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코끼리는 코만 들어오면 다다." 코끼리는 집에 조그만 틈이 있을 때 코를 내밀고 휘휘 저어봅니다. 그때 막아 버려야지 일단 코가 들어오면 그 큰 몸뚱이가 집을 부수고라도 들어오고 만다는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을 틈타고자 할 때 그때 아예 차단을 해버려야 합니다. 틈을 주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사업을 하시기 때문에 지방에 출장을 다닐 일이 참 많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강원도로, 전라도로, 경상도로 늘 출장을 다니십니다.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식사시간이 되어서 거래처 사람들과 식당에 갑니다. 그럴 때 이 집사님은 무엇을 제일 먼저 하느냐 하면 식당에 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일부러 한참을 고개 숙여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그렇게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일부러 길게 고개를 숙여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들면 상대편이 으레 이렇게 말을 한답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모양이지요?" "예. 저는 서울에 있는 승동교회의 집사입니다. 교회에 안 다니십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자기가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지만 과거에 주일학교 시절에 교회에 다녔다든지, 또 자기 친척 가운데는 장로도 있고, 권사도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거래가 다 끝나고 나서 그날 저녁에 술 마시러 가자, 고스톱 하자 이런 이야기가 쑥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아예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여관에 가면 종업원이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혼자 주무시겠습니까?" 그러면 이분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한답니다. "아니요. 같이 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잘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먼저 무릎을 꿇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잠을 청하면 그렇게 잠이 잘 온답니다. 이분의 마음에는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 속에 어떻게 더러운 욕망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악한 마귀가 틈을 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마음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점령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다른 분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텔레비전을 너무 좋아합니다. 토요일 밤이면 텔레비전에서 영화가 방영이 됩니다. 이 분은 한동안 여기에 맛을 들여서 이 채널을 틀었다가 저 채널을 틀었다가 하면서 영화를 밤늦게까지 봅니다. 그리고 난 뒤에 텔레비전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주일날 교회에 와서 앉아 있어도 그 영이 맑을 수가 없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힘이 없습니다. 기도 시간은 잠자는 시간입니다. 설교도 꼭 자장가처럼 들립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텔레비전을 안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습성을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려면 텔레비전을 한 시간 보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한 시간 읽어라. 텔레비전을 두 시간 보려면 먼저 성경을 두 시간 읽어라." 이러한 깨달음을 성령께서 주셨습니다. "좋다. 내가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그만큼 성경을 보고 나서 텔레비전을 보리라." 그리고 나서 텔레비전을 켜기 전에 먼저 한 시간 앞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영이 점차 맑아졌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 드리러 오면 절로 은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겠습니까? 거기다가 성경을 읽다보면 30분을 채 읽기도 전에 이미 꿈나라로 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읽다가 그냥 잠자리에 든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숙면을 취하게 되니까 그 다음날 얼마나 정신이 맑겠습니까? 텔레비전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뉴스를 보셔야지요. 그러나 그것 보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나서 텔레비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언제나 맑아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틈타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13절 중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까? "너희 마음대로 죄를 지어라"고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새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죽은 몸이지만, 잠시 잠깐 뒤면 썩어질 육신의 몸이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우리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눈감고 다른 생각하면서 속으로 죄 짓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우리 몸을 드리는 동안에는 마귀가 우리 몸을 더럽게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하나님께 써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서 써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옛날 미국 필라델피아에 존이라고 하는 열 세살 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우리말 이름으로는 요한입니다. 집안이 참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인근에 있는 벽돌 공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신앙심은 남달리 깊었습니다. 열심히 주일학교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기도 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요한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 앞에는 골목길이 있었습니다. 그 골목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질퍽질퍽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그것 때문에 비가 오면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는 어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로님들도 있었고, 권사님들도 있었습니다.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좋은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책을 세우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하루는 요한이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교회의 골목길을 벽돌로 포장하겠다." 그 당시 요한이 벽돌 공장에서 받는 임금은 하루에 7센트였습니다. 그 중에서 식대를 떼고 최저의 잡비를 제하고 나면 벽돌 딱 한 장을 살 돈이 남습니다. 그 돈으로 요한은 매일 벽돌을 한 장 사들고 교회에 와서 골목길을 포장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골목길 포장이 끝나려면 적어도 2년이 걸립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2년이라고 하는 세월은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이 지났습니다. 두 주일이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교회의 어른들이 어린 요한의 헌신을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을 부끄럽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어른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른들이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교회 앞의 골목길은 깨끗하고 아름답게 포장이 되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낡았던 예배당 건물도 어느덧 깨끗하게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요한을 축복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엄청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물질적인 복을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좀이 먹지 않는 곳에 투자했습니다. 동록이 슬지 않는 곳에 투자했습니다.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는 곳에 투자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고 불리는 요한 와나메이커입니다. 요한 와나메이커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가지고 전 세계에 수많은 YMCA 건물을 지어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우리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종로2가 YMCA 건물도 이 요한 와나메이커가 돈을 내서 지어준 건물입니다.
그는 일평생 동안 세 가지 생활 신조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모두가 "T"자로 시작합니다. 첫째로, "Think,"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Try,"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셨으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로, "Trust in God!"입니다.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한없이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우리는 주인되신 하나님을 위해서 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기꺼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색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인색하면 하나님도 인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낌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는 귀한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4절 말씀은 모두 암송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12절과 13절의 말씀만 듣게 되면 마음 속에 낙심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 번번이 죄의 유혹에 빠져 버리고 말아. 하나님께서 내 몸을 의의 병기로 쓰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런지 불의의 병기로 내 몸을 내맡길 때가 많아. 나는 구제불능이야." 이런 식으로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때도 있고, 때로는 실수할 때도 있지만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과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죄의 종이 되어서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해주셨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라가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 다음을 보세요.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도 결국 그는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율법의 조항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이야기입니다. 사탄이 경기가 나빠서 하던 사업을 중단하고 정리하기로 작정했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자기가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데 사용했던 연장과 도구들을 양탄자 위에 늘어놓고 경매에 붙였습니다. 거기에는 시기심이라는 도구도 있었고, 고집, 교만, 혈기, 음행, 외식 등등 인간의 영혼을 미혹하는 데 사용했던 온갖 도구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보니까 특별한 연장이 하나있었습니다. 은색으로 빛나는 쐐기 모양의 도구였습니다.
구경꾼 하나가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보았습니다. "저것은 무엇을 하는 도구입니까?" 사탄이 대답했습니다. "저것은 내가 제일 아끼고, 제일 즐겨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낙심이라고 하는 도구입니다." "어떻게 사용합니까?" 사탄이 설명을 합니다. "나는 낙심의 쐐기를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가장 열심이 있는 사람들을 공략할 때 저것을 사용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섬기다가, 자기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고민을 할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실망이라는 쐐기를 깊이 박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 속에 틈이 좍 벌어지면서 그 속으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가면서 결국은 그 사람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또 다른 구경꾼이 물었습니다. "그 낙심이라는 도구를 가지고도 넘어지지 않은 기독교인이 있습니까?" 사탄이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예,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언제나 깊이 생각하면서 가슴속에 감사를 품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낙심의 쐐기를 아무리 깊이 박아도 그들의 신앙은 오히려 더욱더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사탄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 있고 멋있는 성도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마음 속에 늘 감사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귀가 감히 대항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를 품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들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모든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까? 마음대로 죄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의롭게 값있게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잠시 입고 살아가는 육신 덩어리지만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니까 더 이상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실 때 기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머리로만 알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실천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 있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실천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어서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의 자손이 복을 받고, 우리의 생업이 놀라운 축복 속에 일취월장 부흥하고 발전하는 귀한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 생명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세상의 헛된 욕망을 다 떨쳐버리고 주님을 위해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인색한 저희들 되지 않게 해주시고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 물질, 재능, 건강과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아낌없이 기쁘게 사용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를 머릿속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이 늘 일치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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