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강 이제는 달라집시다(6:19-23)
주님의 몸 된 우리 승동교회가 이제 21세기를 앞두고 새롭게 변화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저도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달라지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함께 손에 손잡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앞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이 고쳐야 할 것은 고쳐 나가고 또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 잡아야 할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 6월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잘 지키는 일에 힘을 쓰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 요시야의 임금의 개혁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혁은 언제나 예배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승동교회가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복을 받고 바르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배를 바르게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배가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마지막 때에 귀하게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 인간의 생명을 영원토록 살리시기도 하시고 죽이시는 하나님,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그분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꿇어 엎드려 경배 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5분, 10분 늦게 이 자리에 올라올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지난 주일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아직도 예배 시간에 늦게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경건한 태도입니다. 예배가 시작된 후에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있는데 어떻게 뚜벅뚜벅 걸어서 태연스럽게 나올 수가 있습니까? 오늘은 그런 분이 없었지만 예배를 돕기 위해서 세움 받은 헌금 위원들 중에는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그제야 가운을 입고 앞으로 걸어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불경건한 태도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이 일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입니다.
요한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벌이 날아와서 쏘더라도 꼼짝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 이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한 시간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왔습니다.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협조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우리 교회를 더 사용하시고 복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잘못된 것을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일깨워주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달라지자는 것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9절에서 이제는 우리의 삶이 지향하는 목표 자체가 달라져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논지는 간단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인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주인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입니다. 과거에는 사탄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 되었던 사탄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결한 삶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면서 더욱더 거룩한 자리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로마 성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로마 사람들은 본시 이방인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에 그 말씀에 마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아직은 영적 수준이 높지 못합니다. 영적인 수준이 낮습니다. 거기다가 육신이 연약합니다. 죄에 대한 유혹에 쉽게 빠질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알아듣기 쉽게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했습니다.
노예 시장에서 노예가 팔렸습니다. 그러면 이 노예에게는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첫째는, 주인이 바뀌게 됩니다. 두번째로, 주인에 따라서 종의 삶 자체가 달라집니다. 주인이 농사를 짓는 사람이면 종도 당연히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주인이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종도 주인을 따라서 장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에게는 절대적인 순종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우리의 영적인 삶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여러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여러분의 주인은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심히 죄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우리의 새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죄 짓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더 깊은 거룩함이 자리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9절 말씀 중반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에 너희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그때는 어떠했습니까?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내적인 죄, 마음으로 짓는 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외적인 죄, 겉으로 드러나는 죄를 의미합니다. 그때는 우리가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이끄는 대로 사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마음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또 겉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열심히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었던 사탄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더욱더 깊은 불법의 자리, 죄악 된 자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읽어봅니다. "이제는"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을 모시고 사는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새 주인이 되신 예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의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서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함에 이르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이제는 거룩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지요?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여러분 마음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어서 떵떵거리며 남 앞에서 잘 사는 것이 여러분의 소원입니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이르라." 찬송가에 보면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 그 자체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저를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중요한 사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19절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과거에는 너희가 열심히 죄를 짓고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선을 위해서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으면 이제는 주를 위해서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지요.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옛날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밤을 지새우면서 눈이 시뻘개지도록 화투장을 지고서 쪼면서 섰다를 하고, 또 고스톱을 해본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그 열심 가지고 새벽 기도회에 못 나오냐는 겁니다. 왜 그 열심 가지고 한 달에 한번 하는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탄을 섬기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냈으면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남자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술집에 가서 객기 부리면서 술 마시면서 수만 원, 수십만 원을 아까워하지 않고 펑펑 쓰지 않았습니까? 왜 그 열심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지 못하십니까? 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는 그렇게 인색하고 쩨쩨하냐는 것입니다. 왜 만 원짜리가 그렇게 커 보이세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를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하지요. 우리가 교회적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귀하게 쓰셔서 이번에 가평수양관을 짓게 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627명이 물질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400명이 이 일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물질의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다 참여해야 합니다. 어린아이 코흘리개가 백일 때 들어온 것, 돌 때 들어온 금반지 한 묶음을 어린아이 이름으로 수양관 건축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탑골 공원에서 오신 장년2부 할아버지께서도 자녀들이 주는 돈 용돈 꼬깃꼬깃 다 아껴서 5십만 원을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우리 교회에 형편이 어려우셔서 파출부 일을 하시면서 하루하루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가평수양관을 짓기 위해서는 한 사람 당 백오십만 원씩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에 드리면 되니까 1년에 5십만 원, 한 달에 4∼5만 원입니다. "좋다, 하루 품삯이 4∼5만 원이니까 내가 한 달에 하루만큼은 주를 위해서 값없이 일 하리라." 기쁜 마음으로 백오십만 원 헌금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동참하지 않은 400명 가운데는 집사도 있습니다. 제직도 있습니다.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면서 주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왜 그런 일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려고 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이제는 우리가 달라져야 합니다.
가평수양관을 짓고 만족을 삼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교육관이 없어서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교육 시설이 부족하다고 여러분 가운데서는 자녀들은 다른 교회로 보내고 부모만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세대가 고통 당했으면 그것으로 끝내야지요. 어떻게 다음 세대에 그 고통을 그대로 물려줄 수가 있겠습니까? 속히 교육관을 완공하고 본당도 새롭게 건축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앞을 바라보면서 손에 손잡고 열심히 뛰어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오늘 본문 20∼22절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지막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을 섬기고 있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망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우리는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열심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었던 사탄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한 일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 과거의 자기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뭐라고 했습니까?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과거에 착한 일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아닙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때에 우리가 무슨 열매를 얻었습니까? 부끄러운 열매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일만 생각하면 수치스럽습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릅니다. 그 마지막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죽을 일만 잔뜩 쌓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요.
여러분,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어떤 분을 흉을 좀 봐야겠습니다. 제가 이름을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면 어떤 분인지 절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분은 본시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이 삐딱해졌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증오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는 우리 승동교회 앞을 그냥 지나가지 아니했습니다. 바지 자크를 내리고 담벼락에 한번 쉬!하고 나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교회 다니는 친구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담배 태우는 거 다 가르쳐주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불러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유혹해서 산, 들로 다니면서 교회 나가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두 손 들고 막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결국은 그러다가 낙제했습니다. 1년을 더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직업은 완전히 내팽개치고 도박판에 쫓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밤새워 도박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술집에 가서 밤새도록 술을 퍼 마셨습니다. 매일 술에 취해서 곤드레만드레 되어서 밤 깊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조용히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18번으로 잘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신고산 타령"입니다. 돼지 멱따는 소리로 멀리서부터 신고산 타령을 부릅니다. 내가 왔으니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창피해서 아파트에서 살다가 더 살지 못하고 지금 있는 외딴 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몸을 혹사하고 술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가 보니까 위장이 펑크가 나 버렸습니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원에서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이 사람이 두 손 들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하나님께 철저하게 항복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아껴 주셨습니다.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그제서야 이 사람은 "나의 생명이라고 해서 내 것이 아니구나. 내가 가진 물질이라고 해서 내 것이 아니구나. 내가 가진 건강이라고 해서 내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주를 위해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세상을 위해서 열심하였지만, 죄 짓는 일에 열심이었지만 그후부터는 달라져서 주를 위해서 열심을 내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충성스럽게 잘 받들어 섬겼습니다.
안수 집사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따금씩 술을 만드는 양주 회사에서 VIP 취급을 하면서 새로 술이 나오면 자그마한 병에 샘플로 넣어서 이것 좀 마시고 시험해 달라고 온다는 겁니다. 그것만 받으면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고 합니다. 과거에 자기가 쌓아 놓은 수치스러운 일들 생각하면 얼굴이 뜨끈뜨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지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합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불러 가실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합니다. 자기의 물질을 투자하면서, 자기의 시간을 투자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먼저 구하는 자에게 왜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지난 6월 6일 원로 목사님의 생신이었습니다. 그 전날 제가 전화해서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병원에 세 건의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은 요즘 불경기여서 환자가 없어서 문을 닫아야 될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그분 병원만큼은 환자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엄청나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복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달라졌는데 왜 하나님께서 복 주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도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왜 우리가 늘 형편이 쪼들리면서 돈 때문에 고생을 합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2절 보시기 바랍니다. 22절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네 가지 단계로 설명해주었습니다.
첫째로,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과거에 사탄을 주인으로 섬길 때는 사탄이 그것을 원했으니까 열심히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죄 짓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죄를 짓지 않고서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하나님께 종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우리의 주인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세번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과거에 우리가 어떤 열매를 얻었습니까? 부끄러운 열매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네번째로,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알기 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는 그날, 우리는 영화로운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새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더욱더 충성하고 생명 다해서 충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3절에서 우리를 달라지게 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피 값으로 사 주셨습니까? 누가 우리를 죄의 종에서 해방시켜서 의의 종으로 만들어주셨습니까?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하시라도 그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조금 더 크게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요절과 같이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성경 보지 마시고 한번 같이 암송해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단거리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단어 하나 빼먹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다시 한번 암송해보십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토시 하나 틀리지 말고 잘 하셔야지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죄 짓다 보면 당연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단순한 육체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사망입니다.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열심히 사탄을 위해서 섬겼으면 사탄과 그 졸개들을 위해서 예비된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옥이라고 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유황이 타는 곳입니다. 영원히 불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최대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지옥의 최대의 고통은 그 고통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일정 기간만 계속 된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 밤낮없이 세세토록 그 고통을 당해야 한다고 할 때 얼마나 두렵고 떨립니까?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은사"라는 것은 영어로 free gift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값없이 주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게 무슨 대가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영생이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장막을 벗는 그날 저 영화로운 천국에서 빛과 사랑이 넘치는 그곳에서 우리 주님과 더불어서 영생 복락을 누리면서 영원토록 왕 노릇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만 영생이 주어진다고 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만이 영생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율법의 의로서는 우리의 죄를 사함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죄의 수치를 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확실히 받겠네. 확실히 받겠네." 어떤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제일 끝을 꼭 세 번 반복한답니다. 그래서 제가 세 번 반복했습니다. 영생 복락 면류관을 확실히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남은 생애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여러분이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가 몇 시 였습니까? 언제 만났습니까? 예, 정오였습니다. 낮 12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인 오전 시간과 예수님을 만나고 난 오후 시간은 천지 차이였습니다. 그에게 극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보면 언제나 그의 시간은 그때와 지금으로 나누어집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세요. "전에"라는 말이 있지요? 그리고 "이제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을 보세요. "그때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이라는 말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22절에도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세상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죄를 짓고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는 의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주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달라지십시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십시다. 주를 위해서 열심을 내봅시다. 일어나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힘차게 달려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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