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강 새로운 삶을 살자
우리 교회 제 8대 담임목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에 관한 일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에게서 피해를 입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보면 피해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된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자신의 부고장을 직접 작성해서 사람들에게 돌리기까지 했습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괴롭혀드렸던 것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같이 동네를 돌면서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놀라서 서로 묻습니다.
"아니, 저 사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깡패였지 않은가?"
그 소리를 들으면 김익두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습니다.
"그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저는 과거의 김익두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으세요."
한 번은 어느 집 괄괄한 아주머니가 김익두를 시험해 보고자 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중 김익두가 나타났습니다. 김익두는 부엌밖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주머니,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그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가지에 찬 물을 가득 담아 그의 얼굴에 확 뒤집어씌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 정말로 김익두가 죽었나 살았나 보자."
그때 김익두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내가 죽었으니까 아주머니가 그곳에 그대로 살아계시지요."
자기가 죽지 않았다면 그 길로 그 아주머니는 장례식을 치르고 말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김익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으니까 당연히 우리의 삶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의 주인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사탄이 이끄는 대로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피 값으로 사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사단이 원하는 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지 말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의 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죽어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을 때 이러한 반문을 했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서 그저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면,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면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의 대답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해서 어떻게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은혜 받은 자가 어떻게 함부로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논리가 맞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제까지는 방탕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속된 말,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하면서 살았더라도 이제는 거룩한 말, 긍정적인 말, 감사하는 말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꼭 앙갚음을 하면서 살았더라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를 베풀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여기에 보면 "종"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는 종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시대입니다. 노예 시장에 가면 노예가 마치 물건처럼 사고 팔리던 시대였습니다. 노예는 전쟁의 포로에 의해서 생기기도 하고,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노예의 수는 점점 많아져 기록에 의하면 바울 당시 로마제국 인구의 1/3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일단 노예가 팔리면 그에게는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첫째로, 주인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옛 주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이제는 새 주인에게 종속됩니다. 둘째로, 주인에 따라서 종의 삶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농사짓는 사람이면 종도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주인이 고기 잡는 사람이라면 종도 역시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우리의 영적인 삶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주인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립도 없고 제 삼자도 없습니다. 한쪽은 사탄입니다. 또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의 주인은 사탄이었습니다. 사탄이 이끄는 대로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우리를 사 주셨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 의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의의 종이 되라고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신분을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주인이 누구냐?" 사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옛 주인의 지시에 따라서 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해서도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한 여자가 두 남자를 동시에 섬길 수가 있습니까? 한 신하가 두 임금을 동시에 섬길 수가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하나가 349장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우리가 언제까지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저 눈물이나 흘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제는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208장의 가사처럼 이제는 변해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204장의 가사처럼,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의 찬송이 우리의 간증이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변화된 신분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졌습니까? 우리가 잘나서입니까?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읽어보면 이러한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의 주위에는 24명의 장로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자기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을 다 벗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들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은 우리의 머리에 빛난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저 당연한 듯이 면류관 받아쓰고서 뻐기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면류관을 다 벗어서 주님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 수정 같은 길에서 면류관 벗어서 주 예수 앞에 바치며 늘 찬송하겠네." 왜 그렇습니까? 내 공로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사탄이 이끄는 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우리가 달라졌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의 종에서 이제는 의의 종으로 완전히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졌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사탄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다스리려고 할 때마다 사탄을 향해서 호통치시기 바랍니다.
"사탄아 썩 물러가라! 나는 더 이상 너와 상관이 없다. 나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나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마귀야 썩 물러가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신분이 변했습니까? 본문에 보니까 "너희에게 정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고 했습니다. 로마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때 저들이 무엇으로 순종을 했다고 했습니까? 겉으로 순종했습니까? 겉으로 순종하는 것은 외식 주의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억지로 순종을 했습니까? 억지로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벌 받을까봐 마음에 두려움으로 벌벌 떨면서 순종하는 것도 올바른 순종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순종을 했습니까? "마음으로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순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진정 어린 순종이 바로 의의 종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마음으로 순종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체면 때문에 위신 때문에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 주실까봐 두려움에 떨면서 참석을 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를 기쁘게 흠량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순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신부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자기 신랑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이제 내가 당신과 결혼을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친정에 가서 편하게 살래요. 내가 당신에게 연락하면 즉시 필요한 돈을 보내 주세요. 그리고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살더라도 당신은 간섭하지 마세요."
세상에 이런 신부가 어디 있냐고 아마 반문하실 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반성해 봅시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피 값으로 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리어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혹시 그와 같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내가 기도할 때마다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본래 살던 세상에서 어떻게 살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렇게 요구하지는 않습니까? 내 방식대로 내 마음대로 살더라도 은혜로 그냥 덮어달라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져야 합니다.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의 병기로 바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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