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강 섬길 때도 기쁨으로(7:1-6)
잘은 모르지만 참 부르기 어려운 찬양 같은데 또 반주하시는 거 보니까 절로 막 신이나는거 같습니다. 잘 소화에 주셔서 참 귀한 찬송 불러주신거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벌써 6월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번 6월달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더 경건하게 예배드리기를 위해서 힘을 써 왔습니다. 특별히 이를 위해서 예배 시간에 늦지 않고 예배 시간을 잘 지키자. 우리가 이를 위해서 노력을 해 왔습니다. 오늘도 보니까 물론 좀 회개하셔야 할 분이 없지않습니다만은 특히 2층에 계신 분들 많이 좋아진게 사실입니다. 참 질서가 많이 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면은 우리의 마음도 기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더욱더 우리에게 크신 축복을 내려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저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실 것을 생각하면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일이 6월 한달 동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지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어떤 집사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일깨워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저만 에도 지금까지 그저 설교가 시작되기 이전에만 예배당에 올라오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5분 늦고 10분 늦어도 전혀 마음의 꺼리김이 없이 지금까지 예배에 늘 지각을 했는데 이제 깨우쳐 주셔서 감사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배가 뻔히 시작된 것을 알면서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교회 앞마당에서 다른 사람 붙들고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 였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달라졌데요. 예배 시간이 가까워지면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늦게 예배 참여했다가 망신당할까 이런 우려가 들어 가지고 부리나케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에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감사합니까? 달라졌지요.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만 예배당에만 올라오면 되는 줄 알고 의례 예배에 지각을 했다가 이제는 예배에 늦으면 큰일나는줄 알게되었으니까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근데 바라기는 생각이 조금만 달라지면 좋겠어요. 망신당하기 싫어서 잔소리 듣기 싫어서 마지못해서 얼른 예배당에 올라올려고 생각하지 말고 사모하는 심정으로 주님을 얼른 만나뵙고 싶은 그런 심정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참여하면은 얼마나 더 좋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전에 찬송을 불렀지요.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일세 좀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올라오자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이 시간을 사모하는 줄 아세요. 지난 일주일 내내 이 시간을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려 왔습니다. 주여 이제 저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주님 제 마음속에 들어와 좌정해 주시 옵소서. 주님의 얼굴빛으로 제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어두운 그늘들 슬픔 다시 다 살아지고 주님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제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 주이옵소서. 주여 이제 제 마음을 드립니다. 주님께 경배 드립니다. 주님 제가 드리는 이 예배를 기쁨으로 흠량하여 주이옵소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예배 드릴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시게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겠냐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속에서 일깨워주는 봐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법아래 살지 않습니다. 은혜아래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법에 억눌려가지고 마지못해서 억지로 할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저 두려운 생각에 떨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좀 기쁘게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섬기자는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더욱더 흐뭇한 표정을 짓지 아니하시겠냐하는 것입니다. 편의상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첫째로 사도바울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원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죽고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성경 보세요. 저번에 강사 목사님이 말씀했지요. 덮어놓고 성경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이왕이면 펴놓고 성경을 믿으시라 그랬는데 자 성경을 다 펴시기 바랍니다.
(롬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이제 절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엄한 법이라 할지라도 벌받을 사람이 살아 있어야 벌을 주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벌받을 사람이 죽어버렸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컨데 어떤 사람이 법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10년동안 감옥살이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5년동안 감옥에 갖혀있다가 그만 병이 들어서 감옥속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아직도 5년이 더 남아 있으니까 죽은 시체라도 감옥살이를 시켜야 된다. 이렇게 주장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에프 케네디 대통령 아시지요.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입니다. 근데 이분이 차를 타고서 평화스럽게 행진하다가 총에 맞여 죽었습니다. 암살을 당했습니다. 대통령을 죽인 범인은 24살난 오스왈더라고 하는 리하비오스왈더라고 하는 젊은이 였습니다.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대통을 총으로 쏴 죽였으니까요. 그러면은 이 오스왈더가 대통령을 총으로 쏴 죽인 죄 값으로 인해서 무슨 벌을 받았을거 같아요. 놀랍게도 이 오스왈더는 전혀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일 때문에 법정에 선 일조차도 없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와같은 일이 가능할수가있겠습니까? 왜그래요. 제판을 받기도 전에 오스왈드 그 자신이 암살을 당해 버렸습니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시체를 놓고 벌을 줄수가 있겠습니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그 원리를 2절과 3절에서 부부관계에다가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자 2-3절을 제가 읽어봅니다.
(롬7:2--3)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자 어떤 여인이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라고 하는 작자가 세상에 몹쓸 남편입니다. 자기 아내를 마치 노예처럼 부리기만 합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 어떻게 잘 아세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지만은 하이튼 이 남편은 사흘이 멀다 하고 자기 아내 마음에 안 든다고 두들겨 팹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련한 삶을 살아가는 여인입니까? 지긋지긋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에게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간음이 되잖아요. 음부라고 하는 낙인이 찍여버릴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지긋지긋하던 남편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얼마든지 다른 남자에게 개가해 갈 수가 있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남편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이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봐가 무엇입니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의 남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옛 남편인 율법의 속박에 떨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신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뻐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율법의 사슬에 매여가지고 법에 짓눌린 듯한 그런 듯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지않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얼마전에 어떤 분이 제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몇 달동안 십일조를 때 먹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는데 제가 십일조를 때 먹었으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을 해 왔습니다. 마음이 편치 아니했습니다. 제가 몇 달동안 내가 이러면 한 번 당하지 안그래도 마음속에 두려운 생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제가 이번에 이런 일을 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무슨 일을 당했습니까? 그랬더니 지갑을 송두리체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갑속에 수십만원의 현찰이 들어있었습니다. 신문증도 들어있었습니다. 신용카드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십일조 때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게 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음의 기쁨이 없습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벌 받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운 생각에 떨면서 살아갑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법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아래 살아가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은혜아래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가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 생명 주시고 제게 건강 주셔서 이와 같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잘라서 이것을 번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거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드릴 이어다 드릴 이어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은 이까지 물질뿐만아니고 내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이어다. 이게 바로 은혜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은 우리는 법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왜 괴롭고 답답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냐는 겁니다. 그럴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잖아요. 새 남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서 우리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제는 바꾸어져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4절에서 율법에서 자유함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이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법에서 벗어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잘라서 내게 무슨 힘이 있어서 율법의 사슬에서 벗어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사슬에서 벗어 났으면은 이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위해서 살아야 하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4절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자 4절 말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저와 여러분이 다 포함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는 옛 남편인 율법의 그 관계를 완전히 청산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율법에서 벗어남을 당했다고 했습니까? 너희도 누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렇다 그랬습니다. 절 보시기 바랍니다. 날 사랑 하사 날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에 힘입어서 우리가 율법에서 자 유함을 얻게 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서 율법의 그 모든 정죄를 다 받으셨습니다. 율법이 요구한 그 벌을 나 대신 우리 예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 주는 정죄감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대신해서 그 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두 번다시 그 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율법에 기록된 계명 범하고 허랑방탕하게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4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다른 이 옛 남편인 율법과 우리는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새 남편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 다른 이가 누구입니까?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계가해 가는 것입니다.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가신 이가 누구입까? 예수님이시지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새 남편이되시기 위해서 다시금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아내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릴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좀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런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하나님 만나뵙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사람이 무슨 불평불만이 많은줄 모르겠어요. 제 얼굴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입술이 얼굴 밑으로 축 쳐져가지고 목은 어깨밑으로 축 집어넣고 거기다가 눈까지 감고 있으면은 먼가 못마땅해가지고 하나님께 따지로 온 사람같아요. 하나님께서 그런 모습 보시고 기뻐하기겠냐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주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셨습니다. 나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면서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 주십니다. 앞으로도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영원로운 천국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가 도대체 불만입니까? 무엇이 부족합니까?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들고 괴롭웠다 할지라도 하나님 뵈로와서 만큼은 좀 인상을 바꾸어야 하지요. 좀 기쁘고 즐거운 모습으로 바꾸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인상좀 펴시고 예배 드리시기 바랍니다. 좀 기쁜 모습으로 예배 드려야 하지요. 자 절 봐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입술이 밑으로 축쳐진분이 계시면은 빨간 루즈 하나 준비했다가 여러분 나가실 때 예쁘게 칠해드려야 겠습니다. 괴롭고 답답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자 우리가 주님앞에 나왔으면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를 향햐신 하나님의 그 사랑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 생각하면서 기쁨이 충만한 표정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흐뭇하게 여겨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세 번째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5-6절에서 우리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서로 비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5절은 우리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 어떠했는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5절 말씀 보시기 바랍니다.
(롬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을 때에는 우리는 육신에 있었습니다. 육신 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그랬습니다. 절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 율법이 오히려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선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충동질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고 또 하라 하면 하기 싫은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드리라. 그러면 꼭 눈감고 있어요. 또 일찍 일찍 자라 하면 자기 않고 눈뜨고 텔레비전 보잖아요. 참 이상해요. 이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원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는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의미로 다 따먹어도 괜찮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너가 반듯이 죽으리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탄이 하와를 유혹을 했습니다. 괜찮아 일없어 따먹어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는거야 괜찮으니까? 따먹어 하와가 그 사탄의 소리를 듣고 나서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먹음직하게 보입니다. 먹기만 하면 지혜가 똑똑 떨어질 만큼 탐스럽게 보입니다. 따먹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보니까 따먹고 싶은 생각에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의 심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에 율법이 하라 하지 말라 그랬으면은 그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욕구를 충동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도록 만든것입니다. 그래서 죄 짓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을일만 잔뜩 지금까지 쌓아놓은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6절 말씀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자 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율법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까요.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의문이라고 하는 것은 모형의자에다가 그를 문자를 쓰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형태가 있는 법 그러니까 율법 우리가 과거에는 법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법을 어기면 벌받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면서 우리가 마지못해서 억지로 섬기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잖아요. 우리는 어떻게 섬깁니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존재가 되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요. 영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마음속에 내조하는 예수 그리스도 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기쁨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제가 물어 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 역사 하실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하리라.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거가 우리 마음속에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이 충만한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넘치게 되는 겁니다. 그리해서 영으로 섬기는 사람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부득이하게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섬기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나 하고 오늘 말씀을 끝맺겠습니다.
어떤 분이 낯선 도시에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그 날이 주일이라서 이제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호텔 문을 나섰습니다. 근데 교회를 찾으려고 하니까? 교회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때마침 길가에 서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순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순경에게 가서 이 근처에 좋은 교회가 있으면 하나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순경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저렇게 가면은 괜찮은 교회가 있을 거라고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순경이 소개해 주는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그런 모습으로 호텔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다가 그 순경을 다시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서 그에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내가 그 교회를 찾아가는 도중에 보니까 여러 개의 교회가 그 중에 있던데 왜 그 교회들은 나에게 소개를 해주지 않고 하필이면 멀리 떨어진 교회를 내게 소개해 주었습니까? 그랬더니 그 경찰관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서가지고 일요일마다 교통정리를 하다 보니까?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내가 보는데 그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가장 밝고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 그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인거 같아서 선생님에게 소개를 해 드렸습니다. 중요한 일깨움을 주는 말인 줄 압니다. 이제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나서 나가잖아요. 인사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얼굴을 쳐다 볼 것입니다. 교회 들어오실 때는 괴롭고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왔다 할 지라도 나가실 때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나가서는 안돼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전도의 문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어려운 문제 가지고 나왔는지는 모르지만은 다 예수님에게 내려놓고 나가실 때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요. 무언의 전도가 되는 길임을 아셔야 될 줄 압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법아래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에 주님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한 네 가지 "쁘다"를 늘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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