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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강해/제35강 율법이 있기에! (7:7-12)

제 35 강  율법이 있기에 (7:7-12)


어느 마을에 C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L씨였습니다. 이 L씨는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집안의 규칙을 정해놓고 자기 아내에게는 절대적인 순종만 요구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정해놓은 법대로만 처리했습니다. 법에 어긋나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가련한 여인 C는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남편 L씨의 요구에 만족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여인의 마음에는 늘 깊은 절망감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괴로웠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두 눈을 부릅뜨고 멀쩡히 살아있는데,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음부라는 낙인이 찍혀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지긋지긋하던 남편 L씨가 죽었습니다. 그 여인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허전하기도 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여인 C앞에 J라는 새로운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J는 C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결혼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C는 J의 사랑에 못이겨서 그와 결혼을 했습니다.
새 남편 J는 옛 남편 L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옛 남편 L은 매사에 법대로만 처리하려고 하던 냉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남편 J는 그 자신이 한 번 사고로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매사에 이해심도 많고, 동정심도 많았습니다. 그의 아내 C가 실수를 하더라도 따지기보다는 괜찮으냐고 되물으면서 오히려 따뜻한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인 C는 생전 처음으로 마음의 평안을 회복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처럼 그의 남편은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C라는 여인은 Christian,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옛 남편 L씨는 Law의 약자입니다. 곧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새 남편 J씨는 Jesus의 약자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옛 남편 율법 아래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율법이 주는 정죄감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법아래 얽매여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살아갑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이란 무조건 나쁜 것입니까? 우리를 못살게 굴고 괴롭게 만드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바울의 대답은 간단 명료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도 거룩하며, 율법 속에 기록된 모든 계명들도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허락하신 율법에 무슨 불의한 것이 섞여있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은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율법은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이기에 그 안에는 반드시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편의상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봅니다.
첫째로, 율법은 죄의 척도가 됩니다.
7절 하반부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전연 죄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보면 죄로 판명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은 그 한 가지 실례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 열번째에 해당하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빌3:6에 기록한 대로 본시 그 자신을 가리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딤전1:15에서 무엇이라고 외쳤습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바뀌었습니까? 바울은 과거에 아마도 자기가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생각해 왔을 것입니다.
첫째로,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물론입니다.
둘째로,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셋째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라! 당연하지요.
넷째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섯째로, 부모를 공경해라! 아멘!
여섯째로, 살인하지 말아라!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
일곱째로, 간음하지 말아라! 그런 짓을 어떻게 합니까?
여덟째로, 도적질하지 말라! 그렇고 말구요.
아홉째로, 거짓 증거하지 말아라! 그래서는 안되지요.
열째로, 탐내지 말아라! 이제 다 되었습니까? 제가 열 가지 계명을 별문제 없이 다 지켰네요!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계명들을 철저하게 잘 지켜왔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했던 바울에게 어느 날 마지막 열번째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 바울은 이 계명을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하!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탐하는 것, 곧 탐심 자체가 죄이구나!" 바울은 이 사실을 비로소 깊이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큰 소리쳤지만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했었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장담했지만 마음으로는 음심을 품었었고, 도적질하지 않았다고 자부했지만 마음으로는 욕심을 품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살인자요, 간음자요, 도적질한 자요, 거기다가 겉으로만 거룩한 체했던 위선자였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교만했던 바울,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큰소리치던 바울이 결국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철저하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해서 우리의 영적인 교만을 깨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아울러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한 젊은 부인이 매 시간마다 눈에 뜨일 정도로 울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 교회 목사님께서 그 사유를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이미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아이가 생겼습니다. 두 부부가 함께 열심히 일해야 될 형편인데 또 아이가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상의한 결과 병원에 가서 아이를 떼버리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것입니다. "뱃속에 있는 어린 생명을 죽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 부부는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최선을 다해서 키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비록 한 순간이었지만 그 불쌍한 어린 생명을 죽이려고 했던 자신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칫 했으면 죽을 뻔했던 그 어린 생명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계속 울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죄의 척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무엇이 죄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줍니다.
둘째로, 율법은 죄에게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할 때 율법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악이용한 사탄이 문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악이용하는 죄가 문제이지,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을 이용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좋지 못한 욕구들을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바로 이 계명을 이용해서 기회를 삼았습니다. 사단은 아담의 아내 하와에게 접근해서 말했습니다.
"하와야! 하나님이 정말 너희더러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를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괜찮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더라도 아무 일 없어. 오히려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그러니 먹어봐!"
하와가 그 말을 듣고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먹음직했습니다. 보암직했습니다. 먹기만 하면 지혜가 절로 생길 것처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마음 속에 온갖 탐심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따먹었습니다.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싶고,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그릇된 심리입니다.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이 있고, 금단의 열매는 이상하게 더 따먹고 싶은 법입니다.
어느 교회의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늘 입버릇처럼 아담과 하와를 원망했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우리를 이렇게 고생시키나?"
그 교회 목사님은 그 장로님의 험한 입을 좀 다물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그 장로님과 다른 제직들을 목사님댁으로 초청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장로님에게는 6시에 오라고 하고 다른 분들은 6시 반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 장로님은 6시에 목사님 댁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다른 분들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음식상은 다 차려져 있었습니다. 음식을 담은 그릇 위에는 뚜껑이 모두 덮여져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 제가 장로님과 단둘이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서 장로님을 남들보다 한 30분 정도 먼저 오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사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장로님에게 한 가지 당부했습니다.
"장로님, 이제 손님들이 오실 시간이 되어서 잠시 문밖에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다른 것들은 다 뚜껑을 열어보셔도 괜찮지만 여기 한 가운데 있는 것은 절대로 열지 마십시오. 이것은 손님들이 다 오고 난 뒤에 열도록 합시다."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자, 장로님은 궁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왜 다른 것은 다 열어보아도 괜찮은데 이것은 열어보지 말라고 했을까?"
장로님은 결국 참지를 못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살짝 열었다가 다시 닫지 뭐!"
그러면서 장로님은 그 접시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그 속에 들어있던 참새 한 마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참새는 방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은 그 새를 잡으려고 허둥지둥 움직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 장로님도 틀림없이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 말라는 일은 이상하게 더 하고 싶지 않습니까? 금단의 열매에 더 손이 가는 것입니다.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법이 있으면 마음 속에서 죄가 살아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담의 원죄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8절 속에는 "죄"가 있고, "율법" 곧 "계명"이 있고,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제일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도 문제이지만,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나를 공격해 온다해도 내 마음을 바르게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죄가 내 마음 속에 들어가서 활개치면서 다니도록 내버려두니까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죄에게 빼앗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십시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면, 자연적으로 죄가 우리의 마음을 침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율법은 죄인을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갑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의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준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율법 앞에 서게 될 때 깊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 의로서는 안되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실 구세주가 절대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습니다. 자기는 율법에 관한 한 전혀 흠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그의 마음 속에 이르렀을 때, 다시 말해서 율법의 참된 뜻을 그가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과거에 자기가 자랑했던 그 모든 육신적인 모습들이 냄새나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줄로 알았던 죄가 살아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살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은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바울도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세리처럼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체험이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알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라고 탄식했던 바울처럼 이왕 깨어지려면 철저하게 깨어지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율법에 기록된 계명들을 지킴으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율법의 참뜻을 깨닫게 되고, 계명이 그의 마음 속에 강하게 부딪혀왔을 때 그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계명을 지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율법대로 살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더 깊은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고 말았던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에게 속았습니다. 죄가 어떻게 바울을 속였습니까? 계명을 이용해서 속였습니다.
"그래. 너는 의로운 자야! 너는 살았어."
바울은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는 살았고 구원을 얻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뿐입니까? 다메섹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숨어산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도 뿌리뽑겠다고 다메섹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래도 내버려 두었더라면 바울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멸망의 자식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죽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할 때 바울은 결국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24의 말씀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율법 앞에 설 때 우리도 절망감을 떨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계명이 우리에게 이르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도 바울처럼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탄식이 탄식으로만 끝나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캄캄한 밤하늘에도 소망의 별이 반짝이듯이 절망감에 몸부림치며 탄식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있습니다. 마 11:28 30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이렇게 해서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이 있기에 우리는 죄를 알고, 그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기에 우리는 영적인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더욱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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