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마서 1:16~17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기쁨은 때에 맞추어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나서 10년이 지난 후 그돌라오멜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전쟁에서 승리해 조카 롯을 구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아브라함은 10년 동안 기다려도 자식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기 집의 종을 아들 삼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이 네 자식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자식이 될 것인데, 왜 그 약속을 믿지 않느냐?” 하시며 아브라함을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으로부터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버립니다. 주인이 와서 셈을 할 때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책망하며, 한 달란트 받은 것 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준 후 그 종을 내쫒아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현실에 안주해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더 굳건해지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심을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 는 말씀으로 여러분과 나누려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찰스 홀스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는 말은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된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C. H. 도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캘빈은, 저는 이 해석을 따르고 싶은데,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는 말은 구원받은 믿음의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단계에서 한층 더 성숙한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 됨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첫째 단계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받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믿음은 산을 움직이며, 기적을 행하며,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은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우상이 많은 그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에게 상상력과 비전과 꿈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부르신 것도 아버지 야곱의 아들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꿈을 주심으로 구원받은 아들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핍박하던 바울을 부르신 것도 그를 통해서 이방인의 구원을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뒤돌아봅시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어떤 댓가를 치룬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리에서 얼마만큼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까? 아직도 믿노라 하는 우리의 신앙은 처음의 단계를 유지할 뿐 앞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요한복음 14장 12~14절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리라.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합니다. ‘나를 믿는 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 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게 되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현실에서 안주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저 구원받은 믿음안에서만 “이 믿음 이대로 좋습니다.” 하면서 ‘나는 대강 살면서 죽을 때 천당만 가면 된다.’ 는 식으로 일주일에 한번 유지하는 차원으로 교회에 나오며, 기도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와 알버트 까뮈는 동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슈바이처는 박사는 다섯 개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아프리카에 가서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섬겼습니다. 반면 철학자 알버트 까뮈는 노벨문학상으로 받은 상금으로 외딴 섬에 자신을 위한 커다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인데, 그저 믿음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 위에 믿음을 더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생명을 얻은 양에게 풍성한 삶을 주려 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은 풍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은 쪼들린 삶이 아닌 말 그대로 풍성한 삶입니다. 비겁한 삶이 아닌 용감한 삶입니다. 두려워하는 삶이 아닌 담대한 삶입니다. 그리고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이 아닌 남에게 베푸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상력과 꿈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사실은 어려움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바울의 고생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내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먹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1차 선교지에서 핍박이 있었지만 2차에 그곳을 다시 방문하고, 2차 선교지에서 핍박이 있었던 그 곳에 3차 때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불굴의 신앙으로 인내를 가지고 모험을 결단하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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