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11-16 2012.9.30(일)
사랑이 가능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는 무엇입니까?” 세 단어가 꼽혔습니다. 1위, mother, 2위, home, 3위, love, 사랑. 어머니도 집도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love입니다.
며칠전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 이런 사진을 보았습니다(사진). 한 어린 소녀가 바닥에 누어 자는 사진입니다. 그런데 그는 무슨 그림 속에 누어 있습니다. 무슨 그림인가 하고 보았더니 어머니 그림입니다. 내용을 보았더니 이 소녀는 인도의 어느 고아원에 있는 소녀인데 엄마가 없어 엄마의 모습을 크게 그려놓고 그 가운데 누워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붙었습니다.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으면”.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으면 어린 것이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서 잘까? 엄마의 품에 달싹 붙어 쪼그리고 자는 것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몰론입니다. 오늘 말씀 “에배소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쓴 말씀입니다. 에배소서 말고 세 권이 더 있습니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이 책을 주후 60년부터 63년 사이, 로마의 감옥에서 썻는 데 그 공통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이 그 많은 고난과 역경속에서 끝까지 버틴 힘의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15절, 1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엡5:15-16,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오직 사랑안에서”입니다. 다같이 “오직 사랑안에서”.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이 들어갑니다. 사랑이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은 사랑으로 무엇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 가지가 가능합니다. 사랑으로 자랍니다. 사랑으로 통합니다. 사랑으로 세워갑니다.
먼저 사랑은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다시 15절을 읽으시겠습니까? 엡4:15, “엡5:15-16,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으로 가능한 첫 번째는 사랑은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바울은 몸의 비유를 통해 사랑을 설명합니다. 보통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질소, 석회, 인산, 칼륨입니다. 네 가지 무기질이 균형있게 공급될 때 식물은 자랍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한 가지만 있으면 자랍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어느 아파트에 노인 부부가 살았습니다. 이 부부는 금술이 너무 좋아 알콩 달콩 살았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샤워하기 위해 웃통을 벗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야, 알통 좀 봐. 권투선수같네. 멋지부러”.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칭찬하자 할아버지가 샤워를 끝내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나간 할아버지가 점심때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이상하다. 이 영감이 어디갔나?” 하고 찾았습니다. 찾아도 없어서 지하 아파트 로 가보았는데 아, 이게 웬일입니까? 할아버지가 거기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아령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알통나왔다고 칭찬하자 할아버지가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더 잘 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15절, “오직 사랑안에서”, 16절, “사랑안에서”, 어떤 사랑을 말합니까? 아가페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을 아가페 사랑이라 합니다. 아가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보통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주기는 주되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이런 사랑입니다. 유대인중에 랍비 허버트 타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소설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있었는 데 부모가 일찍 죽어 삼촌 집에서 자랐습니다. 삼촌은 부모 이상으로 정성껏 조카를 키웠습니다. 소년이 자라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군대를 가려고 열차를 타는 데 소년이 말했습니다. “삼촌, 저를 키워줘서 감사해요.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어요”. 그때 삼촌이 말했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내려만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란다”. 조카가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삼촌. 제가 노략해서 꼭 갚을 거예요”. 삼촌이 말했습니다. “고맙다. 그러나 기억해다오. 큰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작은 사랑을 갚을 수 있습니다. 몇칠 신세 진 친구에게 밥 한 끼 사고, 나에게 친절을 베푼 직장 상관에게 추석때 사과 한 상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추석때 사과 한 상자로 충분합니까? 그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사과 한 상자, 고기 몇 근이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다 갚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큰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갈 뿐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럴까요?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가 갚으려고 한다면 무엇을 얼마나 갚아야 합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치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갚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레너드 스위트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갚을 수 없다. 다만 반응할 따름이다”. 13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성자가 하나 있습니다. 버나드라고 합니다. 이 버나드가 <하나님의 사랑>이란 책을 썻습니다. 이 책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했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버나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히 깨닫고 감격해서 유명한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4절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받기만 하는 것입니다. 되돌려 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헌금드리고, 전도하고, 직분받아 봉사하고 목회하고, 심지어 외국에 나가 선교하다가 순교하고, 내 몸을 불살라 줄지라도 그 사랑을 다 갚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을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욧점이 여기 있습니다. 사랑은 받을 수 있을 만큼 많이 받아야 합니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미안함을 주지만 주는 자에게는 기쁨을 줍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녀에게는 미안한 일입지만 부모에게는 기쁜 일입니다. 자녀는 받아야 살고 부모는 주어야 삽니다. 사랑을 받는 일은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을 주는 일은 행복한 일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아 많은 빚을 지는 것이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 갚지 못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기 원합니다. 그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많이 받으면 넉넉해지고 만족스러워 집니다. 어떤 사람의 품성이 좋습니까?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많이 받으면 불만이 없습니다. 적게 받으니까 컴프렉스, 불만, 열등의식, 상처가 생깁니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알도다”. 언제 자녀가 철이 듭니까? “아,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때 철이 듭니다. 어릴 때는 잘 모릅니다. 사춘기때도 잘 모릅니다. 그러다 나이 먹고 철들면 그때 압니다. 그때부터 부모에게 잘합니다. 언제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까?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때부터 믿음이 자랍니다.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알도다“. 받은 사람만 압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서로 통하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라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간다고 말합니다. 16절입니다.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여기 “마디”란 말이 나옵니다. “마디”는 우리 몸안에 있는 수많은 뼈와 신경조직, 근육같은 것입니다. 몸은 수많은 조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1센티 제곱 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신체조직안에도 수십억개의 세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1그램 무계의 뇌조직속에도 4천억개나 되는 신경세포가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은 어떤 부분도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조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세요. 16절,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연락하고 상합한다“는 이 말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어성경으로는 "being fitted and held together", 이 말은 공장에 있는 기계의 톱니바뀌들이 착착 맞아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섬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도 없고 혼자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족이 그렇고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연결합니다.
특히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몸이요 성도는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좋은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라 잘 통하는 교회입니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교회는 고향이 같고 취미가 같고 학교가 같고 사회적 신분이 같기 때문에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예수님의 피가 있기 때문에 잘 통하는 곳입니다. 교인은 누구하고도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은 당회와 통하고 당회는 교인과 통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장로와 통하고 장로는 신자와 통해야 합니다. 기존 신자는 새신자와 통하고 새신자는 기존신자와 통해야 합니다. 모든 지체와 다 통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요 모든 성도와 다 통하는 성도가 건강한 성도입니다. 가끔 어떤 교인은 통하는 사람과만 통합니다. 이것이 심하면 뇌경색이 되고 동맥경화가 됩니다. 교회안의 동맥경화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주 극소수의 신자와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지 않습니다. 항상 이야기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만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당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과 살다 보면 마음에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내가 마음에 들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고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사랑은 많이 받을수록 많이 줍니다. 그리고 사랑은 줄수록 더 많아집니다.
성품을 이야기한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녀중에서 큰 아들, 큰 딸이 비교적 성품적으로 원만하다. 왜 그러냐 하면 부모가 더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큰 아들, 큰 딸은 부모 입장에서는 첫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귀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온갖 사랑을 다 쏟아 붓습니다. 그래서 큰 아들, 큰 딸이 다른 자녀에 비해 성품이 온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입장에서 보면 큰 아들, 큰 딸은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동생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장자도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하고 영적 장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리더쉽을 가질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그런 연구를 했습니다. 교회 리더쉽 가운데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릴 때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반드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교회지도자가 될 사람은 상처를 치유하고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게 합니다. 교회안에서 영적 장자, 영적 장녀가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동생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또 하나 특징은 사랑은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자식이 하나인 부모와 자식이 여덟인 부모의 사랑의 총량은 누가 더 많겠습니까? 자식을 여덟 둔 부모입니다. 자식이 하나인 부모는 자식이 여덟이 부모보다 8배나 더 자식을 사랑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도 필요한 만큼 나타납니다. 자식이 하나면 하나에 맞게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여덟이면 여덟만큼 사랑이 나옵니다. 어느 사회복지 센터에 봉사하러 갔더니 다른 교회 교인들이 봉사하러 왔습니다. 봉사를 마치고 서로 인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여집사님이 아들 하나 데리고 봉사하러 왔습니다. “나는 아들 하나 둔 엄마입니다. 오늘 아들과 함께 봉사하러 왔지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엄마가 자기를 소개합니다. “나는 아들, 딸 여섯을 둔 엄마입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하나인 집사님이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어머, 아들 하나 키우기도 힘든데 어떻게 여섯씩이나 키워요. 힘들겠어요”. 그때 자녀 여섯 둔 엄마가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아홉을 낳고 카웠는데요. 뭘.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마침 식사시간이 되어 두 엄마가 제 옆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집사님들, 저도 아들이 다섯인 집에서 자랐는 데 부모의 사랑은 신기합니다. 아들이 다섯이라고 부모의 사랑이 1/5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아마도 사랑은 나눗셈이 아니라 곱셈인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곱셈입니다. 할수록 더 커지고 할수록 더 늡니다. 마치 시골 우물옆에 있는 펌프처럼 펌프질하면 할수록 물이 더 나옵니다. 자식이 하나일 때는 하나에 맞는 사랑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자식이 다섯이면 사랑의 용량이 다섯 배로 커집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이 많았나?“ 깜짝 놀랍니다. 왜 엄마들이 그렇게 자식들 키우며 힘들게 살면서도 오래 사는지 아십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오래 살고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에 오래 사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사랑을 많이 하고 부모가 되어서는 사랑을 많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자, 교회 나오는 신자중에 자기 혼자 교회 다니는 신자가 사랑이 많겠습니까? 목자로서, 교사로서 양을 일곱, 여덟, 열을 키우면서 신앙생활하는 분이 더 사랑이 많겠습니까? 교사로서, 목자로서 일하면 힘은 더 들 것입니다. 마치 아들, 딸 여섯. 일곱 키우는 엄마와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그 엄마가 훨씬 건강하고 더 행복합니다. 왜 그래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주고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사하라, 목자하라 합니까? 힘들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 교회에서 장로님 되면 믿음이 커집니까? 직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전에는 나만 혼자 믿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에게나 많이 주어야 합니다. 많이 주려며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더 예배하고 더 기도합니다. 사랑을 많이 주다 보면 사랑을 더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커지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사람에게는 사랑을 많이 주자“. 어떤 분이 그렇게 말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아무나 하고 잘 지내고 사랑이 많은 분으로 소문났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물었습니다. 이러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저 누가 나를 미워 하거 험담하면 찾아가서 선물을 주었죠. 혹시 멀리 사는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욕하면 사람을 통해서 선물을 보냈죠. 그렇게 오래 살다보니 모두가 저를 좋아하게 되었죠. 그것 뿐이예요“.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사랑은 많이 베풀수록 많이 받는다. 사랑을 소모품 아니다. 쓸수록 더 많아진다. 안 쓰면 없어지고 쓰면 더 생긴다“ 아멘. 교회안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더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비결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세웁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16절 다시 봅니다.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해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세우는 능력입니다. “세우라”라는 말을 들을 때 생각나는 것이 나무의 받침대입니다. 나무를 심으면 받침대를 받쳐줍니다. 흔들리지 말고 올바로 자라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도와 세워줍니다. 나무는 세워서 자라지 스스로 자라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세워야 합니까? 14절을 봅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베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속임과 유혹과 온갖 잡다한 풍조속에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느 집에 사이가 좋지 않는 집사 부부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예배에 아내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하고 남편만 다녀왔습니다. 남편이 혼자 교회에 갔다 오더니 그동안 안 하던 행동을 하였습니다. 늦도록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열렬히 사랑해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기분이 흡족해진 부인은 대견한 눈초리로 남편을 보면서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웬일이유?” 남편이 말없이 웃기만 하였습니다. 틀림없이 목사님의 설교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한 아내는 비싼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고마워요. 그리고 지난번 설교 참 좋았다죠.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설교였는가요?” 그러자 목사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닌데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였는데요.”. 원수도 사랑하면 세워집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이 있습니다. 악기 회사를 하는 이 장로님은 본래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집사때 제가 하는 성경공부반에 들어왔습니다. 1년 이상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분이 하는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너무 세게 불이 나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탓습니다. 때마침 금요일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저와 함께 목회자 몇 명이 달려갔습니다. 공장은 다 타고 잿더미가 되었는 데 그 위에 장로님이 혼자 고개를 숙이고 있고 서 있었습니다. 평생에 이루어놓은 사업이 하루 저녁에 타고 그는 정망 견디기 힘든 밤을 맞이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누구도 그런 장로님에게 위로의 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손 한번 잡아 주고 기도해주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금요일 심야 기도가 열렸습니다. 설교를 하려고 단에 섰는 데 장로님이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금 공장이 불나서 정신이 없을텐데 공장을 어떻게 하고 왔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과 공장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장로님이 일어나더니 ”목사님, 짧게 간증하면 안되겠습니까?“ 해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더니 ”우리 공장이 오늘 저녁에 불이 났습니다“라고 말문을 여시면서 그러나 하나님께 세 가지로 감사한다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첫째 낡은 공장에 불이 난 것을 감사합니다. 둘째 인명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을 감사합니다. 셋째 이런 나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싶은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때 교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공장이 탓다는 것보다는 감사한다는 말에 교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후 이 회사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장로님이 평상시 얼마나 성실하고 인정을 받았든지, 여기저기 거래처에서 위로 전화가 쇄도했습니다. 밀린 외상값을 갚아 주고 밀린 미수금 보내고, 반드시 재기하라는 격려하고. 결국 주위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문이 열려 큰 호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공장짓고 많은 축복을 받고 그것으로 직원 복지용 아파트를 5백 채나 지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가 하나님을 몰랐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어도 주일날만 왔다 갔다 했다면 이런 일을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골1:6절을 보시겠습니다.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날로부터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듭니다.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붑잡히면 그때부터 우리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살인자 모세도, 청년 여호수아도, 여성 지도자 드보라도, 소년 다윗도, 겁많던 기드온도, 핍박자 바울도, 방황하던 어거스틴도, 로마의 군인 고넬료도, 프란치스코도, 루터도, 주기철도, 조용기 목사도, 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냥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운동장에서 김들이 달리기 시합을 했답니다. 그 중에는 돌김도 있고 구운 김도 있는데 유독 한 김만 어그적 어그적 걷고 있었답니다. 놀란 심판관이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 물었습니다. “야, 너는 애 안 뛰니? 넌 누구니?” 했더니 그 김이 말했답니다. “저는 양반 김인데요.” 교회안에서 양반김처럼 앉아 있어서는 믿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아름다운 추석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이 하나되고 믿음이 자라고 13절,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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