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6:11-15 2012.10.14(일)
루디아가 받은 은혜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여러분은 이 가을에 행복합니까?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인이 영국 왕을 방문했습니다. 둘은 인생 전반에 걸쳐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왕이 불쑥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믿음이 좋은 시인이 즉각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지요”. 왕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다음으로는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 같소?” 왕은 내심 자기가 그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되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사모합니까?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자신과 닮은 거룩한 사람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바울이 이를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을 보았습니다. 안디옥에서 출발해서 터키의 내륙지역을 지나 다시 돌아왔습니다(그림1). 사도행전 13-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이라 고생도 많이 했고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1차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합니다(그림2). 이번에는 좀 더 멀리 갔습니다. 역시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터키의 내륙 지역을 통과하여 갈라디아, 아시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무시아 지역에 이르러 바울은 터키의 북쪽인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고자 했으나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7절입니다.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여러분,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가고 안가고 지금 가고 나중에 가고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정합니다. 비두니아 지역은 지금 터키의 중심도시 이스탄불이 있는 지역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때 거기부터 갔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 지금의 터키가 유럽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앉아 있을 때 “가라”하고 명하시기도 하고, 우리가 움직일 때 “가지 말라”고 막으시기도 합니다. “가라”,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나옵니다.
선교의 역사를 봐도 선교의 주인은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도 본래는 중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으시고 그를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인도 선교사 윌리암 캐리도 본래는 남태평양 폴리네시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도로 보내 인도 선교의 아버지가 되게 했습니다. 버마의 선교사 저드슨 테일러도 처음에는 인도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버마로 갔습니다. 1885년 우리 나라에 온 선교사 언더우드도 본래는 인도로 가려고 했습니다. 신학교때 인도로 가기 위해 많이 기도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Korea Review라는 잡지를 보았습니다. 그 잡지의 표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Korea calls you”(한국이 너를 부른다). 동방의 한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생활과 문화와 선교의 필요성에 대하여 쓴 글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왔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잠16:9의 말씀과 같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아시니라“. 여러분도 하나님이 길을 인도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더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바다를 건너 지금의 그리스 북쪽 지역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그림3). 빌립보는 마케도니야의 중심도시로 주전 365~363년,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이 세운 도시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낯선 도시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며 마음으로 선교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토요일,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토요일이면 예배드리는 데 문제는 예배드릴 회당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으로 향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남자가 열명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장례식도 그렇고 결혼식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만일 남자 열명이 안되면 강가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곳으로 가겠습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강가로 갔는 데 거기 몇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도 두 번 그 강을 갔는 데 강이라기 보다 작은 시내였습니다(그림4). 그런데 그 강의 역사를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름이 “키르카스”, 이 강은 유럽 역사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주전 4세기, 알렉산더가 이곳에서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1세기, 시이저가 이곳에서 로마의 황제자리를 놓고 안토니와 목숨건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린 그 강가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사람들을 살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선교입니다. 바울이 그때 거기서 만난 여인이 자주 장사 루디아였습니다. 루디아의 고향은 빌립보가 아니라 터키의 두아디라였습니다. 그녀는 옷감장사하는 여자였는 데 사업차 빌립보에 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루디아를 통하여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유럽선교의 전진기지를 삼으셨으니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도 위대한 선교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루디아를 쓰시기 위해 루디아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먼저 (루디아의) 마음을 여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까? 행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 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여기에 “마음을 열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이 강가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루디아의 마음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은 관심을 하나님께 두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가치와 방향을 하나님에게 두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까? 등록했다고, 교회나와 예배드린다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특히 새가족들이 그렇습니다. 이곳에 이사와서 새 교회를 나오면 여러 가지로 낯섭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같지만 예배스타일이나, 설교나, 교회의 방향과 분위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때 할 일은 전에 다녔던 교회와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도 완전한 교회는 없으며 똑같은 교회도 없습니다. 같은 교회도 작년 다르고 올해 다릅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제도요 이것 외에 다른 예배방식, 다른 설교방식, 다른 목회방식, 다른 교회 전통은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 외에는 모두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전통은 좋은 것이지만 전통주의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좋은 교훈을 찾는 것이지만 전통주의는 과거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전통주의에 매이지 말고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간 전통에 마음을 두지 말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기존신자는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마음을 열어야 하고 새가족은 하나님이 인도한 교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3년 정도 나온 분이 있습니다. 판교가 개발되자 마자 다른 교회 다니다 오신 분인데 최근에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양해를 얻고 소개합니다. “목사님, 제가 한신교회 온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는 관망만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와 교단이 다르기도 했지만 처음 온 사람이 너무 튀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믿음이 점점 수동적이 되고 자라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날 마16장을 읽다가 주님이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내 교회“란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때 저는 한신교회가 다른 사람의 교회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내 교회 곧 예수님의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에 제가 왔는 데 제가 왜 인간적인 생각으로 시간을 낭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한신교회에서 마음을 열고 봉사하겠습니다. 그동안 죄송했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중에 아직도 이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 교회가 여러분의 교회가 아닌 것 맞습니다. 동시에 누구의 교회가 아닌 것도 맞습니다. 이 교회는 “내 교회 곧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그래야 설교가 들려 옵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그래야 믿음이 자랍니다. 마음을 여십시오. 그래야 봉사합니다.
신앙은 교회에 대해 마음을 열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열 때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 애플사의 c.e.o인 고 스티브 잡스가 한 말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이런 축사를 했습니다. “항상 내가 마음에 있는 말를 소개하겠습니다. 두 마디입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에 머물러라. 그리고 어리석음에 머물러라”. 스티브 잡스는 갔지만 그 말은 제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창의적인 사업가가 되기 위해 늘 열정과 열망, 남들이 어리석다 말할 만큼 단순하고 우직한 마음을 소유하라는 말인지 모릅니다. 사업가의 이 말이 저에게는 하나님앞에 선 우리의 신앙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stay hungry”, 늘 배고파야 합니다. 삶의 불만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라 삶의 갈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말하면 요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로 와서 마시라”. 인생 광야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갈증의 문제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은 갈증, 그것이 인간의 고통이면서 또한 인간의 축복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타는 목마름이 신앙의 생명입니다. 그것이 “stay hungry”입니다. “stay foolish”는 어리석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보는 순진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천진난만합니다. 하나님앞에 우리가 서야 할 자세입니다. 내일부터 가을철 부흥회입니다. 정말 갈급한 심령으로 기다립니까? stay hungry? 영적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하나님앞에 섭니까? 기대하고 기도하고 기다립니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기도의 네 단계로 말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물동이로 물을 길어오는 단계, 아름답긴 하지만 힘듭니다. 두 번째 단계는 펌프질로 물을 얻는 단계, 조금 많이 얻지만 힘이 더 듭니다. 셋째 단계는 저수지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는 단계, 힘은 들지 않지만 적습니다. 넷재 단계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의 단계, 나는 가만히 서 있는 데 하늘에서 퍼붓습니다. 온 몸이 비로 적시고 충만하게 마십니다. 더 이상 갈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혼의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stay hungry. 그것이 하나님앞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노력이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다시 14절을 보십시오. 행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 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주께서 여셨습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작은 노력은 우리가 합니다. 큰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열립니다. “stay foolish”, 말씀앞에 바보처럼 우직하게 서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 생각, 논리, 다 내려 놓고 그저 겸손하게 그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은혜의 소낙비가 임합니다. 평생 루디아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가족과 함께 사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신앙생활의 최고 행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족과 함께 하나님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것이 있다면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한번은 집사람이 유대인 시장에 장을 보러 갔습니다. 마침 유치원 다니던 딸이 마침 쉬는 날이라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나섭니다. 저는 학교를 가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집에서 옆집 친구 한나와 함께 놀아“. 그런데도 딸은 굳이 엄마를 따라간다고 우깁니다. 그러다가 시장에서 서로 길을 잃었습니다. 시장보는 것은 그만 두고 딸은 엄마 찾느라, 엄마는 딸찾느라 온 유대인 시장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야말로 ”엄마 찾아 3천리“가 예루살렘 시장 한 복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둘이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둘은 끌어 안고 울었는 데 그때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집에 있으라고 했지 않아?“ 그때 딸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난 엄마를 따라갈거야“. 이 세상 다 줘도 엄마 없이는 못산다는 아이들, 따라 하겠습니다. ”그래도 난 엄마를 따라갈거야“. 아빠들도 서운하니까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그래도 난 아빠를 따라갈거야“. 이 소중한 가족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소중한 가족이 다 하나님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어떻했을까요? 15절입니다. 행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루디아가 바울을 통해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영접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그의 가족들을 예수 믿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몇 명의 가족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먼저 루디아가 예수믿고 남편에게 “여보, 우리 세례받고 예수믿어요” 할 때, “애들아, 너희들도 엄마처럼 하나님믿고 세례받자” 할 때 모두 따라 세례받았습니다. 당시 세례는 지금과 다릅니다. 이방신을 섬기고 있던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다른 종교를 믿고 세례받는다는 것은 자기 믿음을 커밍 아웃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후에 올 모든 불이득, 핍박,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같이 세례받고도 교회 안 나오는 시대가 아닙니다. 일단 세례받았다는 겻은 자신을 예수믿는 사람으로 세상에 드러낸 것입니다. 보통 용기와 믿음이 없으면 이렇게 못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엄마가 그렇게 하자고 할 때 모든 식구가 따랐으니 이 가정은 평소에 얼마나 엄마를, 아내를 사랑하고, 대화와 소통이 잘되는 가정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운명공동체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입니다. 오직 가족만이 같은 무덤으로 갑니다. 제가 최근에 좋은 책 한 권을 읽고 감동받았습니다. 정정숙씨가 쓴 <아빠의 선물>이란 책입니다(그림5). 이 책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어느 교수 부부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미국에서 10년 이상 공부하고 한국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는 데 하루는 남편이 테니스 채를 들고 있다가 뚝 떨어뜨립니다. 커피 잔도 놓치기 시작하고 몸은 축 늘어졌습니다. 그래서 목 디스크가 아닐까하고 병원에 갔는 데 놀랍게도 “근위축증”이라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영국의 스티브 호킹과 같은 병이었습니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래서 8년간 투병생활하고 마지막 5년은 24시간동안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호흡기를 부착하고 튜브를 통해서 유동식 음식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두 남매를 둔 가정은 순식간에 어둠에 빠졌습니다. 어둠이 온 가정을 짙게 덮었습니다. 남편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며 안간힘을 썻지만 그는 매일 식물인간처럼 누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때 아들은 8세, 딸은 2살, 한참 아빠의 사랑을 받아야 할 때였습니다.
그 고통가운데 부부가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지만 애들은 결코 고통의 희생물이 되게 하지 말자”. 그래서 가족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몸이 아팟지만 아빠는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애썻습니다. 가족 은 각자가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매일 매일 감사할 내용을 일기에 썻습니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자기 죽음을 알고 유언을 썼습니다. 남편이 구술한 것을 부인이 대필했습니다. 죽기 전 자녀들을 불러 놓고 하나 하나에게 아빠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먼저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다음 어린 딸에게 물었습니다. “재인아, 혹시 아빠 때문에 속상하고 화난일 있으면 말해줄래? 사과하고 싶어.” 재인이 눈물 흘리며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아빠 때문에 너무 화 난적이 많았어. 중요한 순간에 아빠는 언제나 없었지. 한 번도 소프트볼 경기에 응원 오지 않은 아빠를 원망하기도 했어.” 아빠가 말했습니다. “아빠는 너무나 그곳에 가고 싶었지만 아파서 못 갔단다. 대신 언제나 너를 위해 기도했어. 그러나 너무나 미안하다. 용서해주렴.”
온 가족이 울었습니다. 남편이 죽기 3일전 한국에서 온 형님에게 부탁했습니다. “형님, 내일 저녁, 재인이 소프트볼 경기가 있는데 저 대신 참석해 응원 해주고 사진도 찍어 주세요.” 형님은 죽음을 앞둔 동생 대신 소프트볼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눈물 흘리며 조카를 응원했습니다. 아빠는 죽어가면서 아이들을 축복했습니다. “애들아,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천국서 만나자. 아빠는 천국의 삶이 정말 기대가 된다. 천국에서 너희들을 지켜보고 기도할께.” 그 어린 딸이 작년에 하버드 대학에 4년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공부도 잘했지만 그가 쓴 엣세이, “아빠의 눈물”이 입학 사정관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입학사정관들은 죽어가면까지 딸에게 용서를 빌고 축복하고 간 믿음의 아버지가 대견하다며 “너는 정말 좋은 아빠를 뒀구나.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너를 축복하고 가다니. 우리가 너를 뽑은 것은 하늘나라에 있는 네 아빠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서야”. 아빠의 마지막 신앙의 모습이 결국 딸이 하바드 대학에 들어가게 한 감동의 스토리가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다 교회 나옵니까? 말을 안 듣는다고요? 같이 예배드립니까? 같이 일기씁니까? 부모가 힘들어도 자식들에게 만큼은 좋은 신앙적 영향력을 끼치려고 노력합니까? 자녀들을 위해 아빠의 눈물, 엄마의 눈물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가을 부흥회때 데리고 나오십니까?이번 새생명축제때 데리고 나오십니까?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함께 살아야 하고 교회도 함께, 하나님도 함께, 믿음도 함께, 그래야 그 아빠, 엄마의 눈물 때문에 자식들이 하바드들어가고 잘됩니다. 15절에서 루디아를 보십사요. 행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아멘. 이번에 이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새벽부흥회, 나도 나오고 자녀들도 다 디리고 나와 말씀듣게 하세요. 기도하게 하세요. 아빠의 눈물, 엄마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루디아에게서 배울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온 가족을 세례받게 한 후 그가 마지막으로 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자기 집으로 모신 것입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행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루디아가 바울을 자기 집에 모셨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모든 가족이 세례받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세례받 이후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세례보다 더 긴 것이 세례이후입니다. 우리의 긴 인생에서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루디아가 바울을 집에 모시고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울과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겠습니까?
기도가 무엇일까? 어쩌다 한번 소리지르는 절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평생을 건 교제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처음부터 “구하라”가 아닙니다. “구하라” 전에 “거하라”가 있습니다. 거하면 자동적으로 얻습니다.
루디아는 바울과 함께 어떻게 매일 하나님과 동행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기도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침마다 기도로 눈을 떳을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 진심으로 감사했을까요? 물론입니다. 식탁에 오른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식사한 후 혹시 일터로 나가다가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직장에서 근무하다 동료가 다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했을까요? 일터에서 어떻게 사장님을 대했을까요? 예배하는 것과 일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골4:23절대로 했을 것입니다. 골4:23-24,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직장인 여러분, 기업인 여러분, 여러분도 직장에서 주 그리스도를 섬깁니까? 여러분이 하시는 그 일이 무엇이든지 주께 하듯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일터에도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일하는 사이에도 예수님께 마음으로 기도하시나요? 정말 아름다운 표현 하나 보실까요? 14절입니다. 행16:14, “두아디아에 사는 자색 옷감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분당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김집사입니까? 여러분도 오포에서 공장에서 기사로 일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박집사입니까? 그냥 하나님을 섬기기는 누구나 쉽습니다. 주일날 교회나와 예배 한번 드리기는 누구나 쉽습니다. 그러나 최집사가 공무원으로, 박집사가 회사원으로, 박장로가 학교 교수로, 김집사가 영수 아빠로, 명희 엄마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루디아가 받은 은혜를 우리도 받읍시다. 마음을 열어 교회 참여하는 은혜를 받읍시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갈급한 마음과 단순한 마음으로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단비를 사모하는 은혜를 받읍시다. 이 땅에 함께 살고 함께 죽을 가족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잘 믿는 은혜를 받읍시다.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와 교재하고 사는 은혜를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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