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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행14:19-28 믿음의 문을 열어 주소서 2012.10.7(일)

14:19-28 2012.10.7()

믿음의 문을 열어 주소서

추석 잘 보내셨습니까? 추석은 가족끼리 모여 사랑을 나누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이좋은 가족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가족도 있습니다. 한 가정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인의 생일날 무엇을 선물할까 하다가 마침 공원묘지 싼 것이 있어서 그것을 선물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생일선물로 공원묘지 하나 분양받았다”. 아내가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아니 날 보고 빨리 죽으란 말이야?”. 남편은 매우 서운했습니다. 돈 들여서 샀는 데 아내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또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선물할 생각도 않습니다.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생일인데 선물 안 줘요?” 그러자 남편도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선물? 당신 작년에 선물한 것도 안쓰고 있잖아?”. 작년에 선물했던 것은 묘지였습니다. 부부가 이래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나이먹으면 별 차이가 없어집니다. 남는 것은 부부만 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써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 나이가 40대가 되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50대가 되면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60대는 남편이 있으나 없으나 똑같아진다. 70대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아진다. 80대는 가진 사람이나 안 가진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90대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아진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합시다. “있을 때 잘 합시다”.

 

그러나 나이가 얼마든 배웠던 안 배웠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죽어 하나님 나라 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믿음은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첫 번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첫 번째 믿음은 영적인 믿음이요 두 번째 믿음은 생활속의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마치 문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 27절 보실까요? 14: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다같이 믿음의 문”. 왜 성경은 믿음을 문으로 표현했을까요? 예루살렘은 문이 많은 곳입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현재 8개의 문이 있습니다. 남쪽에 2, 서쪽에 2, 북쪽에 3, 동쪽에 1개입니다. 하나 하나가 다 역사성이 있는 문입니다. 저는 예루살렘에 있을 때 서쪽에 있는 욥바문을 지나 학교로 갔습니다(사진). 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요 출구입니다. 문은 사이에 있습니다. 문은 사이에 있고 중간에 있습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문은 목적지가 아니고 통과지입니다. 누구나 문을 통해 들어가지만 문으로 가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문을 통해 들어가려고 문으로 들어갑니다. 최종 목적지는 문이 아니라 따로 있습니다. 믿음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믿음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문이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듯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믿음 갖기를 원합니까? 여러분도 믿음을 통해 언제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오늘 말씀은 이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는 주후 46년에서 48, 사건은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 할 때 일어났습니다(지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터키 남부 안디옥에서 출발했습니다. 키푸로스 섬을 지나 지금의 터키 남쪽 버가에 상육하여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를 들려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온 코스였습니다. 성경으로는 사도행전 13, 14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전도여행은 처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3장에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받고 출발했지만 미신과 우상숭배로 쪄든 키푸로스 섬에서 첫 번째 시련을 당합니다. 마술사 엘루마가 바울 일행을 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고 육지로 올라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도착했는 데(사진1)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경을 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울이 이고니온으로 쫓겨납니다(사진2). 그런데 그 이고니온에서도 핍박합니다. 145절입니다. 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돌려드니”. 여러분, 바울의 고난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선교를 떠나는 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교하는 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선교하면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시련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요?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왔는 데 거기까지 사람들이 와서 괴롭힙니다. 오늘 말씀 19절입니다.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설령 종교가 달라 마음이 안 맞았다 해도 사람이 떠나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따라 쫓아 왔습니다. 요즘 원정 도박, 원종 출산 하는 데 원정 핍박을 한 것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트라까지 17km,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42km가 됩니다.

 

지금같이 교통이 좋은 때도 아닙니다. 터키는 산이 높습니다. 그 높은 산을 넘어 수 십킬로를 바울을 쫓아 왔다면 그들을 얼마나 악심을 품은 것입니까? 바울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결과 바울이 과연 죽었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이 죽었고했는 데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현재완료형입니다. 이미 죽은 것입니다. 폭도들이 돌에 보니까 이미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죽은지 알고 밖에다 버렸습니다. 결국 바울이 일어났지만 바울은 이 정도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이 칠흙같은 고난의 때에 바울이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27,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왜 바울은 고난의 한복판에서 믿음을 말합니까?

 

믿음은 고난속에서 생겨납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은 고난속에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아무데서나 생기지 않습니다. 고난속에서 생깁니다. 우리 중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지만 고난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까?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기 환란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환란의 헬라어는 들립시스입니다. 이 말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고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 심적, 육체적 고통, 영적 고통,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환란은 밖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을 통과해야 합니다. 환란을 통과하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 불가항력적 고통이 오면 누구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때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을 절대 자기가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하지 하나님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고난을 통해 믿음를 갖게 하는 방법입니다.

 

한번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가장 좋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고난당할 때입니다. 제가 제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믿음이 좋았던 때는 역시 고난당할 때입니다. 한번은 고3때 연탄가스 먹고 병원에 있을 때입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데 자취방에서 가스를 먹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먹었습니다. 뒤늦게 친구들이 송장을 메고 병원으로 갔는 데 얼마 있다 제가 깨어났습니다. 내일 모레면 시험보는 데 시험도 못보고 병원에 누어 있으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때는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시험만 보면 일류대학에 붙는다고 할 때입니다. 사람의 미래가 사람 마음대로 됩니까? 마음대로 안됩니다. 처음엔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의 폭풍이 지난 후 깨달았습니다. “, 인생이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제가 하나님께 부름받는 방식이었습니다. 좋은 말로 불러서는 안되는 고집센 사람인 것을 알고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저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한 문을 막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또 한번 역시 병원에 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교통사고로 입원했습니다. 사실 그 정도 사고를 당했으면 죽었어야 합니다. 지리산 골짜기 낭떨어지 위에서 두 자동차가 충돌했습니다. 설날, 부모님 뵈러 고향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저 뿐 아니라 네 식구가 다 차에 탓었습니다. 사고 나기 10분전까지도 가족끼리 웃고 떠들었습니다. 누가 인생의 10분 후를 압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아버지 제사지내고 밤새 못잤던 한 남자의 차가 골짜기 저 쪽에서 죽음의 질주를 하고 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차를 보았지만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죽음을 알고도 피하지 못합니다. 몰라서 못 피한 것이 아닙니다. 알아도 못 피합니다. 평소에 운전 잘한다고 큰 소리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결국 병원에 입원해서 몇 달을 있는 사이에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때는 제가 목회할 때고 그나마 한참 잘 나갈 때입니다. 누가 막습니까? 누가 인생에 불쑥 찾아오는 환란을 막습니까? 못 막습니다. 그러나 막을 수는 없어도 받기에 따라 유익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익입니다. 자기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유익입니다.

 

제가 작년 안식월에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목사님 몇 분과 유대 광야를 횡단했습니다(사진). 사실 유다광야는 제가 오랫동안 횡단해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유다광야는 이스라엘 한 복판에 남북으로 90킬로, 동서로 20킬로 되는 작지 않은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영적 훈련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도 다윗도 에레미아도 아모스도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이곳에서 훈련받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다윗이 숨었던 지역을 중심으로 샅샅이 뒤지지 시작했습니다. 엔게디. 하길라, 마온, 성경에는 다윗이 광야에서 겪었던 이야기가 15개 나옵니다. 삼상에서 삼하까지 다윗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피해서 숨었던 동굴 이야기만 네 번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죽을 뻔한 이야기도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시편이 모두 150편인데 그 중 1/3이 다윗이 광야에서 체험한 고난을 배경으로 쓴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다윗을 오랫동안 광야에 두셨습니까? 다윗이 미워서 그랬겠습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그랬습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시편의 그 많은 고백은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안정되고 다윗은 편안해졌습니다. 그때 그 편안한 왕궁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두 가지 다 안 좋은 사건이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둘 다 다 다윗이 편안할 때 일어났습니다. 편안하면 다툽니다. 편안하면 범죄합니다. 그 중에서 밧세바 사건은 다윗을 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하면 망합니다. 편한 데도 하나님도 잘 섬길 수만 있다면 최고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에 믿음의 다섯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 신뢰입니다. “여혼아를 신뢰하라”. “신뢰몸을 기댄다는 뜻입니다. 어린아기가 엄마품에 몸을 기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몸을 기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둘째 의지입니다. “의지는 지팡이나 보조기를 몸에 끼고 걷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두번째입니다. 신뢰와 의지는 갖되 갖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명철입니다. 명철은 우리의 지적 능력입니다. 지식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지식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입니다.

 

네 번째가 있습니다.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 주어지는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네 길을 지도하리라”. “지도란 말은 길을 곧게 한다는 말입니다. “ I will make straight your paths”. “내가 지그 재그로 난 네 길을 반드시 펴주겠다“. 이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인생 광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계 3대 종교가 광야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십니까? 유대교는 모세를 통해 시내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기독교는 세례요한, 예수님을 통해 유대광야에서 나왔습니다. 이슬람교는 모하멧을 통해 아라비아 광야에서 나왔습니다. 광야는 고난을 의미하지만 거기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만 광야에 있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믿음의 요소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말씀속에서 자라납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이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엄청난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박해당하고 돌에 맞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고난은 바울과 그 일행으로 하여금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자체가 자동적으로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면 그 음성에 순종하게 됩니다. 141-9절에 구원받은 앉은뱅이가 그랬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기자 일어라 걸으라소리쳤습니다. 일어나 걸으라 소리치자 일어났습니다. 9-10절입니다. 14:9-10,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많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여기서 들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들었다는 말은 듣다의 미완료과거로서, 단지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들려온 내용을 잘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뜻입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온 그가 이제 막 살 기회가 생겼는 데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살고 죽는 순간인데 대충 듣겠습니까? 집중해서 들은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의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13장과 14장에서 자주 나온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주님의 가르침”, “율법과 선지자”, “복음입니다. 모두 15번 나옵니다. 13장에서 10, 14장에서 5번 나옵니다. 바울은 다른 말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주님의 가르침”, “율법과 선지자”,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능력이고 그 말씀이 들려올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오래전 교회에 한 신자가 나왔습니다. 세상 일로 고난을 많이 당하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돈도 많이 벌고 학벌도 높은 여성이었습니다. 이 분이 하도 인생고가 많고 되는 일이 없으니까 누가 교회나 나가보라고 해서 자기 발로 교회 나왔습니다. 얼마동안은 잘 나왔습니다. 얼굴도 밝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자 한 두 번 빠지더니 점점 안 보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무 어려워 누가 교회나가보라고 해서 교회 나왔는데 나는 하나님이 금방 나에게 행복과 마음의 기쁨을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가도 그저 그렇고 마음의 기쁨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종교를 믿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모든 종교가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혹시 제가 성경을 펴고 말씀드려도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4장을 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서 시험받으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두어번 읽은 후에 물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머리가 좋은 그 분은 금새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시네요”. “그래요. 세 번 유혹받았죠. 한번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또 한번은 높은 산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내가 받아주겠다. 마지막은 나에게 절해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네게 주겠다”. “이 모든 유혹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잘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지요. 돌이 금방 떡이 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금방 받아주고 절만 하면 천하의 모든 영광 금방주고. 마귀는 뿔달리고 삼지창들고 서 있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빨리 성공하는 길로 유혹하는 그 무엇이죠. 지금 성도님이 서 있는 자리는 인생 광야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 있었죠. 누구나 광야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 있을 때 우리가 받는 유혹은 있죠. 그것은 제발 빨리 이 광야에서 자유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성도님이 지금 그렇지 않습니까?“ 그 분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앙의 세 요소가 있습니다. 우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했어요, 마귀의 지름길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아요. 예수님이 마귀에게 했던 세 마디는 모두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복종했죠.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께 복종하고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을 이르셨죠. 성도님은 교회 나오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6개월이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마음에 담았나요?” 아니요.“ ”말씀을 모르니 순종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니 믿음이 안 생긴 것이죠“.

 

그때부터 그 분이 마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좋아하는 조급증을 버리고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그 말씀으로 믿음을 키워갔습니다. 그 분은 후에 권사님이 되었고 새가족 양육, 일대일양육등에 큰 힘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최고 유혹은 한번에 모든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으나 그렇게 되면 망합니다. 쉬운 길, 지름길을 좋아하지 말고 정도로 가야 합니다. 정도는 이것입니다.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리고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나니”. 하나님의 아들도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복숭아, 사과나무도 3년은 자라야 열매맺고 중국산 대나무는 5년 되기 전에는 아무 변화도 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5년동안 쉬지 않고 거름주고 물주면 5년이 된 날, 갑자기 2주만에 15미터가 자랍니다. 믿음은 말씀속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보여준 믿음의 세 번째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선포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바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니 어디를 가서도 전도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믿음은 점점 자라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정체적인 것이 아니라 성장지향적인 것입니다. 4:13절에서 바울이 말한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최고로 믿음이 자랄 때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믿음은 어떻게 자랐습니까? 사용함으로 자랐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사랑도 사용하면 커지고 믿음도 사용하면 자랍니다. 천하의 바울이라도 선교여행을 떠나지 않고 안디옥에만 앉아 성경을 연구하고 있었다면 그는 좋은 믿음의 사람을 되었겠지만 위대한 순교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시인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시인입니다. 내가 수백개의 진리들을 알고 있어도 그렇게 말할 때 까지는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사람의 말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믿는대로 말하고, 둘째 말한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말은 반드시 표현되고 표현하면 그대로 됩니다. 사랑은 사랑한다 말하게 하고 사랑한다 말하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망설임은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자신없슴의 표시입니다. 부끄러움을 이기고 말하면 부끄러움이 사라집니다. 우연히 시편을 읽다가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아무에게나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아의 속량을 받은 자”. 속량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말해야 합니다. 말하면 좋은 것은 우선 자기 자신입니다.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 장애물을 뚫고 나오는 비결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말씀했습니다.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내가 아는 진리를 나만 알고 있으면 나만 살립니다. 한 불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나와 구원받았습니다. 그가 구원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예수믿고 구원받고 보니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다. 왜 예수믿는 사람은 자기 혼자 믿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작년 영국 런던에 갔을 때 세인트 폴 성당(St. Paul Cathedral)을 방문했습니다. 그 성당에서 홀만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입니다(사진). 이 그림은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을 그린 것입니다. , 보십시오. 예수님은 문밖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문은 여태껏 열린 적이 없습니다. 문앞에는 잡초가 자라고 손잡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있고 손에는 못이 박혀 있습니다. 옷은 제사장의 옷을 입었고 초를 들고 계십니다. 이 그림을 한참 바라보는 데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눈입니다. 그 눈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입니다. 이 발을 자세히 보면 방향이 돌려져 있습니다. 마치 지금 떠나려고 몸을 돌린 모습입니다. 충분히 기다린 것입니다. 오래 기다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잡초가 무성한 우리의 심령앞에서 주님은 너무 오래 기다린 것 아닙니까? 문을 여십시오.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교회 나와 몸만 앉아 있지 말고 예수님을 향해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믿음의 문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족의 믿음의 문은 열렸습니까? 여러분 아파트의 믿음의 문은 열렸습니까? 판교 영혼들의 믿음의 문을 열렸습니까? 이번 가을이 바로 그때입니다. 이번 새생명축제가 바로 그때입니다. 107: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문들아, 열릴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