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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16-34 예수믿는 이유 2012.10.21(일)

16:16-34 2012.10.21()

예수믿는 이유

가을새벽부흥회를 마쳤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아침, 사방에서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새벽 일찍 나와 주차봉사하신 분, 찬양대로 봉사하신 분, 자녀, 이웃들을 모시고 교회 나오신 분들, 모두 감사하고 수고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교회 나오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 믿는 일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 피곤한 새벽의 단잠을 깨고 교회로 나오게 하나?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끄는 어떤 힘이 있다고 가끔 느낍니까? 그 힘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교회앞을 지나가다가 에이, 이판사판이니 교회나 들어가보자하고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꼭 자기에게 한 말같이 들렸습니다. 가사내용은 모르지만 찬송을 부를 때 뭔가 가슴이 찡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자기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가면서 혼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상하다.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은 데 왜 나 한테 말 안했을까? 왜 예수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것을 나한테 말 안하고 혼자들만 믿을까?”

 

바울이 전도여행을 떠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믿어 좋으니까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전도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두 번째 전도여행의 도착지는 빌립보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인도로 루디아를 만난 바울은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전도하러 가는 데 귀신들린 여인 하나를 만났습니다. 옛날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바울이 가까이 가는 데 귀신들린 여인이 말합니다. 17, 16:17,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을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바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바울일행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직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는 알았을까요? 귀신은 영이기 때문에 사람의 정체를 잘 압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도 알아 보았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그러나 사람속에 들어간 귀신은 허가받지 않고 남의 집에 불법침입한 사람과 같습니다. 가끔 정원앞에 잔디에 들어가지 마십시오하고 써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써 붙였습니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그 잔디에 들어가 키타를 치며 캠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래를 불러서 기분도 좋고 사람들이 좋아도 주인이 볼 때는 불법침입자입니다. 주인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가라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은 예수님의 권위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권위로 쫓아냈다면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냈습니다. 18절입니다. 16:1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그 결과 귀신이 떠났습니다.

 

문제는 이 귀신들린 여인을 이용하여 장사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속에 귀신이 있게 해서 그 귀신이 사람들에게 미래를 예언해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의 아폴로 신전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의 주요 도시에 가면 아폴로신전이 있습니다. 아테네에도 있고 고린도에도 에베소에도 있습니다. 신전에서 점하는 여인속에는 퓨톤이라고 하는 신이 있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제사장은 그 여인안에 있는 신을 의지해 예언을 합니다. 바울이 만난 여인은 바로 빌립보 아폴로 신전에서 점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안에 있는 귀신이 나갔으니 신전 제사장은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고발했고 바울은 잡혀 깊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두 번 빌립보 감옥에 가 보았는 데 놀랍게도 지하감옥이었습니다(사진).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 장소에 멀지 않는 곳은 아폴로신전이 있고 감옥은 그 근처에 있었습니다. 지하로 되어 있는 이곳은 요즘과 같은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습기와 벌레가 우굴거렸을 것입니다. 그나마 바울은 착고에 채워져 있었습니다. 착고는 춘향이가 목에 쓰고 있던 칼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구멍이 모두 다섯 개입니다. 널빤지에 뚫린 다섯 개의 구멍에 목과 두 팔목, 두 발목을 끼웁니다. 얼마나 부자유하겠습니까? 그것은 불편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불법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 아닙니까? 당시 로마 시민은 정식 재판없이 누구도 구금하거나 구속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토록 엄청난 고난을 당했는 데 놀랍게도 바울은 이 고난속에서 예수믿는 것이 무엇인지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어둠이 깊을 때 별이 더 빛나는 원리일까요? 그렇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전도를 못했지만 감옥에 갇히는 일을 통해 역설적으로 예수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타난 예수믿는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믿으면 감옥에서 나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했지만 그 고난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바울이 결국 그 감옥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옥문이 그냥 열린 것이 아닙니다. 기적적으로 열렸습니다. 26절입니다. 16: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벗어진지라”. 바울을 가두었던 감옥이 열리고 바울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믿는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믿는다고 항상 좋은 일만 있고 행복한 일, 형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7:14절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라”. 우리에게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곤고할 때 반드시 도우셔서 건져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감옥 이야기는 고난속에서 있는 성도를 하나님이 건지시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갇혔습니다. 사자굴에서 바벨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결국 죽었으나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죽으시고 부활했습니다.

 

감옥 이야기는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사의 대가들도 감옥에서 고난받고 승리했습니다. 존 번연이 영국의 베드포드 감옥에 13년이나 갇혔습니다. 거기서 유명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마틴 루터가 독일 바르트부르크 성에 갇혔습니다. 거기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태리의 단테가 10년동안 추방되고 사형선고받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신곡>을 썻습니다. 존 밀턴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실락원>을 썻습니다. 이들이 겪은 감옥은 고난에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까? 믿는 우리에게도 고난이 오지만 바울처럼 감옥문을 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감옥이야기는 다만 고난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히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베다니로 갔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어 무덤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을 돌을 깍아서 만듭니다. 무덤은 삼중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덤을 이루는 바위와 그 안의 현관, 그리고 무덤 깊은 곳에 있는 납골실입니다. 시신은 가장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시신은 깊은 곳에 있을 뿐 아니라 묶여 있습니다. 깊은 곳에 있으니 어둡고 묶여 있으니 부자유합니다. 그나마 헝겊과 밧줄로 꽁꽁 묶여 있습니다. 죽음은 곧 어둠이요 부자유입니다. 밧줄로 묶이고 동굴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덤에 도착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돌을 옮겨놓으라”. 이렇게 말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11:43, “나사로야, 나오라”. 11:44,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믿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죽음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의 감옥에 갇히지만 우리는 오래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예수믿는 것은 죽음의 감옥에 갇히지만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 우리는 죽음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는 것은 죽음뿐이 아닙니다. 우리 과거의 실패와 상처의 감옥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실제적인 감옥은 실패와 상처로 얼룩진 과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랬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르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에게 다가갔을 때 마르다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11:21,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만약 그랬었다면은 우리 인생을 과거로 후퇴시키는 부정적인 시각을 말합니다. “그때 잘했더라면”, “그때 결혼안했더라면”, “그때 술먹지 않았더라면”. 회개는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회한은 우리에게 불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회한이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해 우리가 받은 아픈 감정을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없어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렌즈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렌즈는 하나님의 은혜의 렌즈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 자체를 바꿀 수 없습니다. 다만 보는 눈을 바꿈으로 과거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해석의 안경은 하나님의 은혜의 안경입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감옥은 단순히 과거 자체의 감옥이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는 감옥입니다. 과거는 잘했든 못했든 지나갔습니다. 우리 과거는 예수님안에서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과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현재뿐입니다. 성경이 좋아하는 시제는 지금입니다. 고후6:2,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 은혜받는 것이 중요하고 지금 이미 받은 구원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믿고 달라진 변화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감옥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건지실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죽음의 감옥에서 나사로처럼 풀려나 영원한 자유를 얻은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과거 실패와 상처의 감옥에 더 이상 붙잡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십니까?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이 놓였듯이 우리는 이미 감옥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것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두 번째 바울에게 예수믿는 것은 이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을 얻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나온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감옥에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25절을 보십시오.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기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했다고 말합니다. “기도하고 찬송했다는 말을 문법적으로 보면 기도는 지금 하고 찬송은 이미 하고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문법적인 용어로 기도하다는 현재형이고 찬송하다는 현재완료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시점으로 볼 때 찬송이 먼저 시작되고 나중에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무엇을 먼저 했어도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찬송을 먼저 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대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탄식이요 호소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글자 그대로 노래입니다.

 

그마나 한밤중에했으니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어떻게 됩니까? 지난 밤, 바울과 실라는 아폴로 신전 제사장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 왔습니다. 감옥에 와서 신분이 누구냐를 묻지도 않고 그들은 바울의 옷을 찢어 벗기고 몹시 때렸습니다. 그리고 착고를 채웠는 데 착고는 쇠고랑입니다. 그것도 다섯 개입니다. 목과 두 팔목, 두 발목입니다. 춘향이는 목에만 착고를 찼는 데 바울은 목, 두 손, 두 발, 다섯 군데에 찼습니다. 거기다 간수가 문앞과 뒤에서 단단히 지킵니다. , 그런데 어떻게 찬송이 나옵니까? 혹시 미쳐서 노래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정신인데 노래가 나옵니까? 그나마 속으로 조용히 한 것이 아닙니다. 밤중에 죄수들이 다 들을만큼 크게 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석방에 대한 약속이나 보장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무 보장도 약속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이지만 그것을 이야기한 것도 아닙니다. 미리 이야기했으면 곧 석방될 희망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석방될 가능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25절 볼까요?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왜 바울은 그 칠흙같은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했을까요? 바울이 찬송했던 시점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지금 안전하게 석방되어 자기 집에서 찬송한 것이 아닙니다. 석방되기는커녕 석방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데도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빌립보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기뻐하라라는 말인 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 말은 바울이 모질게 고난당하며 찬송하고 기도했던 감옥이 있던 바로 도시라는 것도 아십니까? 어느 신학교에서 교수가 한 학생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빌립보서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보세요”. 학생이 대답했습니다.“항상 기뻐하라”. 교수는 너무 짧으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학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는 9번이나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현재 명령형입니다. 지금 기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면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서 기뻐하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병 낳은 다음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번 후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에도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기쁨은 자기속에서 생기는 기쁨입니다. 공급원이 세상이고 내 마음이 받습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공급이 중단되고 내 마음이 불안하면 또 못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기쁨은 다릅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기쁨입니다. 공급원이 다릅니다. 바울은 13권의 서신에서 주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예수안에서라는 말을 무려 132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급원이 다릅니다. 주님이 공급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성가중 영국의 줄리안이 있습니다(사진). 줄리안은 1342, 영국에 노리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줄리안은 실제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가 평생 은둔하며 기도하며 살았던 교회 이름이 줄리안 교회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폄범한 이 여인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쓴 책이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만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도 기도하다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줄리안앞에 나타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고난을 당한 것에 만족하느냐?”. 이때 쥴리안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유일한 만족, 나의 참 기쁨, 나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때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그래. 너도 나의 유일한 만족, 기쁨, 그리고 사랑이다”. 그때 줄리안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주님이 만족이요 기쁨이요 사랑인 것은 주님이 나를 그의 만족, 기쁨, 사랑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주님은 여러분을 그의 유일한 만족으로, 참 기쁨으로, 영원한 사랑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입니다.

 

그런데 줄리안이 받은 계시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잘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것들은 다 잘 될 것이다” (All shall be well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 Julian of Norwich. 줄리안이 살았던 시대는 페스트병으로 유럽인구의 1/3이 죽고 십자군 전쟁, 백년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진 때입니다. 그 불안과 고난의 시대에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 줄리안에게 말했습니다.“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잘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것들은 다 잘 될 것이다”. 기쁨의 근원이 세상에 있다면 페스트병,십자군전쟁, 100년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시대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십시오. 대선을 앞두고 어수선하고, 온갖 부패와 사회악으로 시끄러운 시대에, 만일 밖에서 오는 기쁨만 기다리고 산다면 우리에게 언제 기쁨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셔야 진정한 기쁨입니다. 세상이 악하고 죄악이 관영해도 하나님은 영원한 행복과 기쁨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잘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것들은 다 잘 될 것이다”. 바로 그 은혜때문에 우리가 기쁘고 그 기쁨때문에 우리가 이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바울이 고난당했던 빌립볻교인에게 했던 말을 볼까요? 4: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멘. 이 기쁨 때문에 우리는 예수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예수믿음으로 생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간수의 변화입니다. , 간수에게는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 33-34절입니다. 16:33-34,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그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여러분, 이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아시겠습니까? 간수는 감옥에서 죄수를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켜야 할 감옥이 지진이 나서 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바드시 직무태만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파면될 수도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옥에 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간수가 33절 이하에서 보여준 행동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33, “간수가 죄수들을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썻어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차려주고 온 집이 기뻐하고”. 지금 간수는 한가할 때가 아닙니다. 죄수를 간수하지 못한 책임 때문에 징계를 받을 처지에 있습니다. 다른 죄수 때문에 자기가 죄수가 될 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죄수들을 씻기고 먹이고 함께 기뻐합니다. 이쯤되면 막가자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나요? 어떻게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딱 하나입니다. 전도입니다.

 

감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도망치려 하자 이 간수는 칼을 빼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살을 멈추고 전혀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31절입니다.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한 마디가 간수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운명은 살고 죽는 것입니다. 죽을 뻔한 사람이 다시 살았습니다. 운명만 바꾼 것이 아닙니다.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바꿨습니다. 그전까지는 먹고 사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직장과 일터와 월급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중요해졌습니다. 자기 때문에 갇힌 사람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과 삶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놀랍습니다. 무엇이 그 짧은 순간 사람을 달라지게 했을까? 딱 한 가지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믿음, 그 믿음이 사람을 달라지게 한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믿고 사람 달라지게 한 책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변화의 책입니다. 삭개오, 여리고의 탐관오리였습니다. 예수님 믿고 여리고의 성자가 되고 자선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상처입고 날개를 파닥거리는 가녀린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 믿고 내가 주를 보았다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성질급한 갈릴리 바다의 어부였습니다. 예수님 믿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경뿐 입니까? 한국교회의 생생한 역사입니다. 김익두, 평양 깡패였습니다. 예수믿고 위대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김창식, 가난한 머슴이었습니다. 선교사 집에서 일하다 예수믿고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자헌, 전북 김제 부농의 머슴이었습니다. 예수믿고 신학교에 가 한국장로교총회 세 번이나 총회장을 했습니다. 백낙준, 남자 무당인 박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믿고 박사되고 연세대 총장, 문교부장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믿으면 변화됩니다. 반드시 변화됩니다. 개인도 변화되고 사회도 변화됩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개인이 변화되고 다음 그가 속한 사회가 변화됩니다. 개인이 변화되면 누룩처럼 번져 그가 사는 사회 전체로 변화됩니다. 1907년 한국교회 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 해에 30만이 예수믿었습니다. 그 놀라운 개인적 변화가 사회적 변화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금주 금연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술주정뱅이는 60%나 감소했고, 죄수는 40%가 줄었습니다. 우상숭배, 점집, 귀신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을 섬기는 집은 교회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학교가 생겨났습니다. 평양 숭실학교에는 1907년 한 해에만 신입생이 255명이 늘어났고 로빈스여선교사가 운영하는 여학교에만 300, 교회에서 운영하는 여러 학교에 4,000명의 학생들이 입학했습니다. 여성의 인권은 향상되고 가정은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19, 삼일운동이 일어났는 데 그중 16명이 기독교 목사, 장로였습니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로 이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진정으로 변하면 세상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의 능력은 결코 개인의 변화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변화의 시작은 전도로 시작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한 마디의 전도가 결국 세상을 바꿉니다. 내가 전도한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느냐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안드레가 처음 베드로를 전도할 때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기둥이 될지 알았겠습니까? 빌립이 이티오피아 내시 한 사람 전도할 때 아프리카에 기독교 국가가 세워질 줄 알았겠습니까?

 

한 사람이 바닷가에서 밀물에 휩쓸려 온 불가사리를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물었습니다. “선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바다에 떠밀려 온 불가사리를 바다에 던지고 있습니다.”. 행인이 말했습니다. “그 몇 마리 던진다고 불가사리가 다 살아나겠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던진 불가사리는 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영혼을 다 구원할 수 없지만 우리가 건진 영혼은 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건진 그 영혼이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줄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믿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를 감옥에서 건져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줍니다. 우리를 통해, 그리고 우리가 전도한 그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간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