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2) 요일5:11-21 2012.11.4.(일) 내안에 생명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머리로, 어떤 사람은 노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살아갑니다. 어느 시골에 양조장이 있었습니다. 이 양조장에 아들이 있었는 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맨날 놀기만 합니다. 여학생만 만나고 술도 마십니다. 그러니 대학입학시험에 붙을 리가 없습니다,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도전했는 데 막 시험을 보고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너 오늘 시험 문제 중에 제일 자신있게 쓴 문제가 무엇이냐?”. 그러자 아들이 말했습니다. “5대양 6대주 쓰는 문제요”. 그래서 어떻게 썻냐고 했더니 “5대양은 최양, 박양, 김양, 이양, 손양이고요, 6대주는 소주, 맥주, 포도주, 양주, 매실주까지는 썼는데 마지막 하나가 막걸리뿐인데 주자가 생각나지 않아서 못 썻어요” 했습니다. 이때 아빠가 탁자를 치며 말했습니다. “이놈아! 그 쉬운 문제도 쓰지 못했단 말이냐? 탁, 탁주도 몰라. 막걸리는 탁주야” 했습니다. 부전자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노는 재미로 살면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더 중요한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의 나이에 따라 질문이 달라진답니다. 10대는 “내가 누구인가”. 20대는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30대는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까”. 40대는 “어떻게 허면 돈을 잘 벌까?” 60대는 “누가 나를 쫓아올까?” 70대는 “내 친구중 누가 죽었는가?” 80대는 “내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우리 나이가 어떻든지 우리가 붙잡고 살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섬기던 교회에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젊고 부잣집 아들이고 돈도 많은 데 어느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 백혈병이었습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졌는 데 문제는 피였습니다. Rh- 혈액형, 누구나 찾을 수 없는 피였습니다. 그것은 돈이 있다고 젊다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급하니까 평소에 주일밖에 안 나오던 어머니가 새벽에 나와 기도합니다. 저도 기도 많이 하고 교인들에게 광고했습니다. “우리 이런 이런 사람이 있는 데 살립시다. 기도하고 혈액형이 Rh- 령이 분은 도와 주세요”. 많은 교인들이 동참했습니다. 백혈병 집사님 돕는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인중에 두명, 교인 가족중에 3명이 나타났습니다. 수혈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소리쳤습니다. “살았네. 우리 아들 살았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사람이 다 있어도 한 가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것이 생명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젊고 공부 많이 했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징 중요한 것이 생명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생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생명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생명은 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적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생명이 몸입니다. 여러분은 이 몸이 얼마나 신기한지 아십니까? 그 중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세포와 피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몸안에는 약 1백조개 이상의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 세포들이 5내지는 6쿼터 정도 되는 양의 다목적 유동체안에서 파이프 관을 통해 피를 운반합니다.그 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적혈구, 백혈구, 그리고 혈소판. 그런데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지극히 작은 한 방울의 피에 5백만개의 적혈구와 7천개 백혈구와 3십만개의 혈소판이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생명의 바다임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우리 몸은 분명 육체적인 조직인 데 하나님은 그 육체적인 조직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나타냅니다. 자, 피가 하는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먼저 적혈구입니다. 적혈구는 청결하게 합니다. 피속에 공급되는 산소를 통해서 몸안에 있는 나쁜 찌꺼기들을 제거합니다. 적혈구는 부지런히 산소를 공급하고 몸안의 쓸데없는 노폐물은 실어다가 없애줍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는 매일 3천억개의 적혈구들이 죽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런가 하면 백혈구는 병균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우리몸이 병에 감염되면 골수 깊은 곳에 숨어있던 1억개 백혈구들이 일시에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다른 데 있는 백혈구까지 불러 들여 싸움을 시작합니다. 백혈구의 활동은 병균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런가 하면 피에는 수혈의 기능이 있습니다. 같은 혈액형의 피를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서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를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레3:17,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같은 말이 성경에 5번 나옵니다. 또한 성경은 동물을 피채 먹지 말라고 합니다. 창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 채 머지 말것이니라”. 왜?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죽자 하나님이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벨의 피가 곧 아벨이요 가인은 아벨의 피를 흘림으로 아벨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세포와 피를 주셔서 생명을 유지시키고 계심을 믿습니까? 우리안에 있는 피는 첫째 청결, 몸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둘째 승리, 병균과 싸워 이겨내고, 셋째 수혈, 좋은 피로 바꿔주며 우리를 계속 살리고 있음을 믿습니까? 그래서 시139:14절에서 다윗이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기묘하심이라”. 이 “기묘하다”는 말을 다른 성경으로 보면 “신묘막측하다”입니다. 영어로는 원더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몸이 정말 기묘하고 신묘막측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육체적 생명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적혈구가 우리 몸안에서 나쁜 찌꺼기를 청소하고 백혈구 수 억개가 나와 우리 몸의 병균과 싸우고 아무리 좋은 피를 우리에게 공급한다 해도 우리는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생명은 신묘막측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 내가 지은 생명만으로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구나.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내 자신의 생명을 친히 주는 수 박에 없다”. 그래서 보낸 분이 누구예요?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요일1:1-2절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자, 여기에 세 종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나타난 생명”, 2절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나타난 생명은 본래적 생명인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생명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경험된 생명”, 이 생명을 사람들이 체험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체험합니까? 다시 1절,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듣고 보고, 만지고, 우리의 오관을 통해 체험합니다. 듣고, 예수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보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만지고, 예수님을 영적으로 느끼고 모심으로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인정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나타낸 생명이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두 가지를 다 믿습니까? 성경이 쓰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나타났다”가 아니라 “나타냈다”고 말합니다. 요1:18절에도 나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왜 “나타났다”가 아니라 “나타내다” 입니까? “나타났다”는 능동형입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나타내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나타나면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기 전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 계셨습니다. 이것을 요1:18은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고 표현합니다. 사도 요한은 전형적인 이스라엘식 표현으로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시려고 그와 동일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 생명은 오직 예수님안에만 있는 것을 믿습니까?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한 아랍인이 예수믿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아랍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믿으면 많은 불이득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 있다가 집에 가서 가족들 앞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어떻게 전도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했답니다. “자, 내가 멀리 길을 가는 데 가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어느 길로 갈까 하고 고민하는 데 가운데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은 살아있고 또 한 사람은 죽어 있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에게 물어보겠는가?” 이때 가족들이 다 “그거야.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에게 아니냐”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아랍인이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나도 내 인생을 길을 가면서 길을 묻을 사람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호멧은 죽었지 않으냐? 그가 메카에서 죽고 아직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의 예수님은 살았다. 여러분도 예루살렘에 사시니까 아시지 않느냐? 예수님의 무덤은 지금 아무 것도 없지 않으냐? 이왕이면 살아있는 분에게 인생길을 물어야지 죽은 자에게 물어서야 되겠느냐?”. 그랬더니 가족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최고의 진리가 이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생명이다. 그런데 그 생명이 이 땅에 예수님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가 유일한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이 이것입니다.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 그것을 믿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언제 우리에게 왔느냐 그리고 그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의 생명이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왔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기상천외한 계획이 나타납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계획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자, 전혀 상관없는 두 존재가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사형당해 죽은 로마의 형틀입니다. 사형틀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나무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다만 죄수를 죽인 나무는 아니었습니다. 그 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한 막대기였습니다. 그래서 수직선과 수평성이 있습니다. 수직선은 위에 계신 하나님, 수평선은 땅에 있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창세이후 하나님, 인간, 그 두 존재 사이에 풀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죽음의 문제.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는가?“ 곧 ”영생의 문제“.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두 가지입니다. 죽음과 영생의 문제.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이 인간에게 없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해답이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직접 내려가 내 생명을 주겠다”. 그 생명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해서 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거의 죽어서 낳습니다. 그래서 “새 생명을 잉태한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죽어야 살고 살기 위해서 죽어야 삽니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오고 죽음은 또한 생명을 낳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고통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과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진 것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여러분은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가 강처럼 솟구칩니다(그림). 거기 있는 모든 군인들의 옷과 몸을 적실 정도로 솟구쳤습니다. 이 장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이 다한 순간, 하늘에서 무엇이 뚝 떨어집니다(그림). 물방울입니다. 물방울 하나가 하늘에서 십자가로 떨어졌고 예수님이 죽자 그것이 예수님의 몸에서 물과 피로 나옵니다. 영화이긴 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물방울은 인류가 그토록 바랬던 생명의 원천입니다. 생명은 언제나 물로 표현됩니다. 십자가의 물은 다시 죽지 않은 생명, 하늘에서 온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예수님이 죽는 순간, 예수님의 몸을 통해 물과 피로 흘렀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 점을 오늘 요일5:5-8절에서 확인합니다. 요일5:5-8,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길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여러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것을 본 제자는 요한밖에 없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다른 제자는 다 도망가고 유일하게 요한 사도만 거기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똑똑히 보았을 것입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온 것을. 요한은 그때의 광경을 지금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지금 요한일서를 쓴 시점은 몇 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때는 예수님 몸에서 물과 피만 보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요 세상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신 생명의 물, 그것을 성령님이 깨닫게 했습니다. 다만 물과 피만 흘린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진 화신이 11절, 12절입니다.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13절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1,12절 말씀은 예수님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은 나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11-12절은 우리가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이 좋아도 그것이 예수님에게만 있고 나에게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1-12절,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13절, ”나에게도 있다“. 요한복음, ”예수님안에 생명있다“. 요한1서, ”나에게도 있다“. 예수님 따로 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순간,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다 내게 오고 예수님의 것이 내 것이 됩니다.
유대인 이야기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상인이 있었는 데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상인이 종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는 데 갑자기 여행 중에 그가 죽으면서 유언 한 장을 남깁니다. “모든 재산은 종에게 주고 아들은 꼭 한 가지만 골라 가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모든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재산을 빼앗길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랍비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이야기했습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참으로 사려 깊으신 분이오. 죽어가면서 종에게 아무 것도 안 준다거나 아들에게 가서 복종하라고만 말했다면 아마 당신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하려고 했을 것이요. 이제 이렇게 하시오. 종을 데리고 재판관에게 가서 유언장을 보여주면서 말하십시오. 유언장대로 모든 재산은 종이 갖고 당신은 한 가지를 가질 수 있으니 종을 갖겠다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종과 함께 모든 재산이 당신 것이 될 것입니다”. 아들은 랍비가 시키는 대로 했고 종과 함께 모든 재산을 도로 찾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을 소유하면 예수님이 가진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예수님이 가진 것이 다 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의 부요, 에수님의 인격,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이 다 내 것이 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하면 어떻게 됩니까? 14절에서 21절에 크게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볼까요?
(1) 기도: 먼저 14-15절입니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로 또한 아느니라”. 가장 먼저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생기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우리 자녀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엄마, 아빠”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멈마,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아이가 철이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착하고 공부 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아프지 않기 때문에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로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엄마, 아빠”를 부릅니다. 이것이 자녀와 부모의 첫 번째 관계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 후 우리가 하는 첫 번째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착하고 죄 안짓고 거룩하고 믿음으로 산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 표시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도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종교에 있으며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도 법당에서 3천배, 만배하고, 미신 믿는 사람도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빌고 남묘효렝교믿는 사람은 호랭이, 사자를 외치며 기도합니다. 인간의 염원을 아뢴다는 점에서 모든 기도는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기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대상이 다릅니다. 마6:9,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지지 않는 기도는 성경적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께 기도하기 때문에 꼭 필요때문에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꼭 뭐 달라고만 전화합니까? 때로 “어머니, 아버지, 잘 계세요? 건강하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안부 전화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의 기도는 필요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기도는 관계적 기도입니다. 친밀함의 기도입니다. 예수믿으면 누구나 기도를 시작하고 기도하면서 자랍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녀의 증거요 기도할수록 우리는 더 자녀다운 자녀로 자랍니다. 그래서 “그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2) 죄. 18절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오랫동안 이 말씀 오해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예수믿기만 하면 그 시로 죄와 상관없이 살게 된다는 오해입니다. 예수믿으면 마치 최면이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자기도 모르게 죄와 멀어진다는 오해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믿어도 죄도 짓고 유혹도 받습니다. “죄를 범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죄를 범하지 않는다”입니다. “못한다”와 “않는다”는 다릅니다. “못하는 것”은 가능성에 대한 말이고 “안하는 것”은 의지에 대한 말입니다. 가능성은 있지만 의지적으로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 의지는 어디서 생길까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요일3:9절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슴이라”. 여기서 씨는 생명입니다. 씨가 밭에 떨어지면 자랍니다. “묻힌 것”과 “심긴 것”은 다릅니다. 죽은 것은 묻혀 있고 산 것은 심겨 있습니다. 우리안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이 심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씨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자랍니다. 처음에는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이번에도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책을 썻습니다. “천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이 자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라면서 죄에 대한 저항력, 유혹에 대한 공격력, 고난에 대한 인내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만일 그래도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18절이 적용됩니다. “그가 지키시매”. 그는 예수님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알브레이트 뒤러”가 쓴 동화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잘 조련된 기사가 어느날 어둡고 거친 골짜기를 달려갑니다. 그는 왕궁에 사는 공주를 향해 말을 달리는 중입니다. 그때 무시무시한 노인 하나가 소리칩니다. “모두는 다 늙어간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래도 기사는 앞으로 달립니다. 한참 가다가 또 한 사람이 소리칩니다. ”나를 잊지 말라. 나는 너의 미래다“. 힐끗 보니 ”죽음“입니다. 또 지나갔습니다. 이번엔 마지막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나를 잊지 말라. 나는 너의 죽지 않은 과거다“. 흘끗 보니 ”죄“입니다. 그래도 기사는 듣는 둥 마는둥 하고 앞만 향해 달립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공주가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는 길에 허무와 죽음과 죄가 유혹했지만 공주를 만나는 기대 때문에 그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그렇습니다. 예수믿는다고 우리에게 가끔 허무한 생각, 죽음에 대한 공포, 죄에 대한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할 때까지 그것들은우리를 계속 따라 붙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냥 가면 됩니다. 왕궁에서 공주만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다고 죄의 유혹을 안 받는 것 아닙니다. 어쩌다 유횩에 넘어져 멈춰설 수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달리면 됩니다. 거기 안주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왕궁까지 달려갈 것입니다.
3) 마지막이 20절입니다. 요일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남이요 영생이시라”. 자,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나? 첫째 기도하게 됩니다. 둘째 죄를 이기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만 죄만 짓지 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소극적 성화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적극적 성화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지켜주고 알게 합니다. 죄는 지켜주고 하나님은 알게 합니다. 소극적, 적극적 다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와 멀어지게 하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께 가까워 지게 하고, 그래서 점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합니다.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 주셨습니다. 육적, 영적 생명 주셨습니다. 육적 생명만 가지고 안됩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고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붙잡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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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6:11-15 루디아가 받은 은혜 2012.10.14(일) (0) | 2017.01.20 |
행14:19-28 믿음의 문을 열어 주소서 2012.10.7(일) (0) | 2017.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