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4) (롬5:1-5) 2012.11.18(일) 성장에는 고난도 따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까? 오츠 슈이치하는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 다섯가지>라는 책을 썻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죽어가면서 무엇을 후회하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내가 가고 싶은 여행을 했었더라면”,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더라면”. 그런데 그 중에서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 감사해요. 고맙습니다“. 이 말 못한 것이 후회 1번이랍니다.
여러분,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까? 어떤 집사님이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못하다가 부모님 돌아가시니까 감사할 사람이 없어 슬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에도 때가 있습니다. 때가 지나면 감사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T,V 개그 프로그램에 ”감사합니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나와서 박자에 맞춰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합니다. 참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감사가 없는 시대에 억지로 라도 감사하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박자를 맞춰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말할 때 여러분은 ”감사합니다“를 반복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부모님 주셔서, 우리에게 자녀를 주셔서, 믿음 주셔서, 건강주셔서, 일용할 양식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습니까? ”감사합니다“ 하니까 행복합니까? 최고의 행복은 감사에서 옵니다.
제가 이번 주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선택의 조건>이란 책입니다. 이 책은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를 연구한 책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하겠습니까? 하나 밖에 고를 수 없는 사람과 여러 개중의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사람, 누가 더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여러 개 중에 하나 고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잼으로 실험해 보았습니다. 자, 여기에 두 종류의 잼을 진열합니다. 하나는 세 종류의 잼을 놓고 하나를 고르라 했습니다. 또 하나는 23종류 잼을 놓고 선택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잼의 맛이 어떻냐 물었습니다. 잼은 똑같은 잼입니다. 가격도 같습니다. 셋중 하나 고르는 데서 하나 골랐습니다. 23개중에 하나 고르는 사람도 골랐습니다. 그리고 맛을 보게 했는 데 놀라운 것은 23게중 고른 사람의 10%정도만 잼이 맛있다. 세 개 중 하나 고른 사람은 90%가 맛있다 대답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왔을까요? 많은 잼중에 하나 고른 사람은 하나를 고른 대신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 고른 그것에 더 많은 기대를 갖습니다. “내가 너 하나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이 버렸는지 알아?” 그러다 보니 맛이 떨어집니다. 고를 게 별로 없는 데서 고른 사람은 상대적으로 버린 것이 적습니다. 그래서 별 기대를 안합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결론내렸습니다. “잼의 많을수록 식욕이 떨어진다”. 이 실험의 결과는 우리가 이렇게 부요하고 가진 것이 많고 고를 것이 많은 데도 행복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듯이 행복은 소유순도 아닙니다. 많이 가져야 행복이 아니라 꼭 가질 것을 가져야 행복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해 볼까요? 하나님을 소유해야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행복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합니다.
먼저 우리가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다같이 “화평을 누리자. 이 말씀은 로마서의 한복판,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맨 앞에 ”그러므로“가 나옵니다. 이 말은 앞에 나온 내용을 받는 말입니다. 그러면 롬1장부터 4장까지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한 마디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갚없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롬3:24절을 볼까요? 롬3:24,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작은 것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큰 것은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없애는 것은 우리가 못합니다. 죄를 이기는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셨습니다. 그것이 ”값없이“입니다. 옛날 노예들은 돈받고 팔렸습니다. 대개 노예 한 사람 값이 은 30입니다. 요셉도 은 30에 애굽에 팔렸고 예수님도 은30에 팔렸습니다. 그랬다가 팔린 노예를 다시 사올때는 더 많은 돈을 주고 사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줘야 하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량없는 은혜, 갚을 수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은혜로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값없이, 대가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은혜는 받는 것입니다.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achieve가 아니라 receive입니다.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2절에 또 나옵니다.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다같이 “얻었으며”. 은혜는 얻는 것입니다.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입니다. 그나마 완료형입니다. “얻었으며”, 이미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축복이 “화평”입니다. 화평은 평화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친밀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구와 화평은 누리는 것입니까? 1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화평하면 어떤 은혜를 받습니까? 세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2절, 롬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들어간다”는 말은 왕이 계시는 궁정에 왕을 알현하기 위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믿으면 상대하는 분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를 받습니다. 또 하나 2절, “우리가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여기서 “선다”는 말이 나옵니다. “서있다”는 군인이 “차렷” 자세 하고 서 있는 것입니다.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 흔들림이 없이 서는 것입니다. “서다”라는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고전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그 가운데 선 것이라”.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는 방황했습니다. 왔다 갔다 갈피를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평화를 얻으면 서게 됩니다. 인생관도 가치관도 삶의 자세와 생각도 반듯이 서게 됩니다. 고후1:24절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슴이라“. 하나님과 평화하면 믿음으로 섭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2절 뒷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하나님 믿으면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 믿으면 의로워 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믿음으로 서게 되고 그리고 기뻐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이것이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 받는 축복입니다. 이것을 도표로 볼까요?
롬3:24 롬5:1 롬5:2
믿고 의로워지면 하나님과 평화 하나님께 나아감, 믿음에 굳게 섬,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함
그런데 하나님 믿는 사람이 받는 은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구마줄기를 아시나요? 고구마 줄기를 잡아다니면 고구마들이 줄줄이 따라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네 가지 은혜를 순서대로 받습니다. 자, 그림을 볼까요? 먼저 5장, 하나님과 평화를 이룹니다. 6장,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됩니다. 7장,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8장, 성령안에 살게 됩니다. 이 네 가지는 반드시 일어나고 그리고 순서대로 일어납니다.
롬1-4장 롬 5장 롬 6장 롬 7장 롬 8장
믿고 자녀가 되면 하나님과 평화 예수님과 연합 죄로부터 자유 성령안에서 삶
왜 우리가 이 추수감사절에 감사합니까? 추수때문만이 아닙니다. 먹이시고 입히신 은혜때문만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합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고난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볼까요?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갑자기 환란이 나옵니다. 자, 다 좋았습니다. 다시 볼까요?
롬3:24 롬5:1 롬5:2
믿고 자녀가 되면 하나님과 평화 하나님께 나아감, 믿음에 굳게 섬,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함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 왕이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믿음에 굳게 선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한다. 그래서 “할렐루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3절로 가면 “다만 이뿐만 아니라 환란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했습니다. 갑자기 “환란”이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환란을 좋아합니까? 여기서 “환란”은 박해입니다. 핍박입니다. 주로 밖에서 가해지는 고통입니다. 문자적으로 질병이나 슬픔, 마음의 아픔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밖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환란”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말합니다. 밖에든 오든 안에서 오든 인간에서 오는 모든 고통입니다. 여러분은 고통을 좋아합니까? 아마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고 선택할 겨를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어쩌다 끼어든 불청객같은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요소에 필수로 들어있는 요소입니다. 자, 보십시오. 환란이 어디 있습니까? 1절에서 4절의 내용을 순서대로 쓰면 이렇습니다.
화평 – 환란 - 인내 - 연단 - 소망
우리 신앙생활의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어쩌다 외부강사가 하는 특강이 아니라 정규 강좌입니다. 하나님 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반드시 수강하고 학점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환란이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환란이 옵니다. 믿음이 퇴보하는 과정에 환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 환란이 있습니다. 화평은 인내로 바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환란을 통과해야 인내로 갑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이 이것입니다.
은혜는 고난도 포함합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보낸 선교사의 선교사역도 도울 겸 중국 목회자들 훈련할 겸 갔습니다. 그런데 상하이에 도착하자 웬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때마침 열린 중국 공산당 제18기 대회 때문에 열리기로 되어 있던 목회자 세미나가 취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신학생 3-40명이 있는 데 한 교인이 집을 내줘 시골집에서 가르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마중나온 선교사, 중국교회 지도자들과 시골마을로 향했습니다. 좁은 신작로를 따라 한참 갔더니 허름한 2층 짜리 집이 나왔습니다. 거기에 이미 우리 대학생쯤 되는 중국의 신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강의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낮이나 밤이나 그들과 성경을 펴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수업중 잠시 쉬고 있는 데 사람들이 막 동요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중국 공안들이 습격한 것입니다. 일곱 여덟 공안들은 여기 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고 물건을 뒤적거리고 그리고 취조를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도 와서 “공안입니다. 신분증을 보여 주십시오”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과 집을 빌려준 주인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취조합니다. 왜 이 집을 빌려 주었습니까? 누가 이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까? 누가 이 한국사람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까? 폭풍같은 몇 시간이 흘렀습니다. 분위기로 봐서는 선교사님 뿐 아니라 저도 붙잡혀 갈 분위기였습니다. 그때처럼 긴박하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고난이 기도를 낳고 기도가 고난을 이긴다는 말이 확실히 맞습니다. 공안앞에서 말도 안 통하고 다만 속으로 기도하는 데 사도행전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 관헌들에게 끌려가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지도 말라고 할 때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며 담대했던 사도들,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감옥을 나섰던 사람들, 2천년 교회사는 바로 고난을 통해 승리했던 역사였습니다.
다행히 공안들은 우리가 다른 나쁜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해산하면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는 말로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 장소에서 철수했습니다. 그 이후의 일정은 중국 가정교회 지도자들 집에서 지냈습니다.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간증을 들었고 눈물겨운 사랑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중국을 떠나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중국교회도 그냥 자란 것이 아니구나. 초대교회처럼 고난을 통해 성장한 교회, 그렇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없는 것이 고난이다. 고난이 없으니 기도가 없고 기도가 없으니 기적이 없고...”.
여러분, 지금 부흥하는 전 세계 교회는 고난받는 교회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체코, 항가리 교회들, 70년동안 공산주의에 의해 핍박받았습니다. 남미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교회들, 오랫동안 군부독재에 눌려 살았습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나라들, 그리고 중국교회, 모두가 가난과 고난과 핍박속에 성장했습니다. 나라도 그렇지만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불후의 명작 시편을 어디서 쓴지 아십니까? 사울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던 유다 광야 동굴입니다. 엘리야를 신앙으로 영웅으로 키운 것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악한 왕후 이세벨입니다. 세례요한을 순교자로 만든 것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헤롯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활하게 만든 것이 십자가입니다. 누가 고난을 두려워 해서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까? 고난없이 성숙한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에게 어떻게 미국의 영웅이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별 것 아니야. 우리 배를 누가 침몰시켰거든.” 소련의 후르시쵸프가 미국 배를 침몰시킨 사건 때문에 자기가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많으면 해답도 많습니다. 위기가 있으면 기회도 있습니다. 가시밭길이 있으면 왕의 길도 있습니다. 롬8:17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아멘. 은혜안에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을 이기면 소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고난이 우리에게 나쁜 것만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절, 4절을 다시 보십시오. 롬5:3-4, “다만 이뿐만 아니라 환란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환란은 인내를. 인내를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환란은 우리에게 상처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을 소망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도 그냥 소망이 아닙니다. 5절입니다. 롬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됨이니”. 우선 그 소망은 부끄러운 소망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부어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부어졌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여름에 소나기 붓듯 부어진 것입니다. 양동이로 붓듯이 비가 퍼붓는 것입니다. 하늘이 구멍이 난 것처럼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냥 “내일은 잘 될거야”가 아닙니다. “어떻게 되겠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진 소망입니다. 소망으로 꽉찬 것입니다. 소망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은 다만 낑낑거리고 이겨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 감속에 두 가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이 소망과 함께 어울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 구체적인 현장을 추수감사절을 시작한 청교도들에게서 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스턴 근교에 있는 메사츄세츠 주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그림). 거기에 가면 모형으로 만든 메이프라워배가 있는 데 생각보다 작고 불편했습니다. 어떻게 이 좁은 배에 102명이 탓을까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그 102명를 데리고 미국에 온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습니다. 기록에 보니 윌리엄 브래드포드라고 되어 있습니다(그림). 그가 30살에 미국에 와 33년이나 개척 초기의 미국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안식월 때 영국에서 이 사람을 발자취를 더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지역을 많이 다녔습니다. 그리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브래드 포드는 1578년 영국에서 어스터필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나서 얼마 안돼서 부모가 돌아갔습니다. 고아로 자란 브래드포드는 삼촌 밑에서 자랐는 데 그때 그가 청교도 신앙을 배웠습니다. 철저히 말씀대로 살고 구별되어 사는 법을 배운 그는 리쳐드 크리프톤 목사님에게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다닙니다. 그러다가 영국에서는 도저히 신앙생활을 못하겠다 판단하고 1608년 네델란드로 갑니다. 거기서 결혼도 아들도 낳는 데 편하긴 했지만 편하자고 청교도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철저히 하나님 믿는 신앙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함께 네델란드를 떠나 신대륙인 미국으로 가기로 하고 자기 사재를 털어 배 두척을 마련합니다. 하는 스피드웰이라는 배와 다른 하나는 메이플라워라는 배입니다(그림).
그래서 1619년 봄, 두 배를 타고 사람들과 함께 네델란드를 떠나 먼저 영국으로 갑니다. 그리고 영국 플리머스에서 사람들을 더 태워 102명이 대서양을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다 보니 스피드웰호가 고장이 납니다. 배에 물이 들어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항구로 돌아와 고장난 배를 고치려 했으나 고칠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스피드웰호를 포기하고 102명 전원이 메이플라워호로 옮겨 탔습니다. 1620년 9월 20일, 드디어 메이플라워호는 영국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풍랑치는 5000㎞의 긴 항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약 50일만에 배는 지금의 매사추세츠 케이프 콧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추위와 배고픔뿐이었습니다. 먹을 만한 음식도 머물 만한 숙소도 없었습니다. 간혹 인디언의 괴성으로 인한 공포가 그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브래드포드의 아내가 배에서 떨어져 익사했습니다.그러나 슬퍼할 틈도 없었습니다. 그 해 겨울 1월과 2월에 102명중 50명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가족을 언 땅에 묻고 3월이 되자 황량한 벌판에 영국에서 가져 온 완두콩, 콩, 보리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척박한 땅은 아무 것도 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굶어죽고 자포자기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가까스로 조금 심은 것이 났습니다. 영국, 네델란드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가족까지 잃고 낯선 땅에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 그들 마음에 넘쳤습니다. 그래 가을, 브래포드는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 감사 절기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사는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3일간 운동 경기와 무술 경연 등을 통해 그들과 사귀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남긴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 해 동안 박해 없이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다 잃었어도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만족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좋은 인디언 친구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비록 적은 양이지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기원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았던 브래드포드는 1657년, 79세의 나이로 죽었는 데 죽을 때 자신의 땅도 모든 이민자들에게 다 분배하고 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멋지지 않습니까?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아내와 자식을 잃으면서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험의 길을 떠난 102명의 필그림 화더, 그리고 윌리암 브래드 포드, 그들이 끝까지 품었던 믿음은 무엇일까요? 고난을 무릎쓰고 올바로 믿는 것,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모험을 향해 믿음으로 떠나는 것, 고난을 감사로 받고 위기를 기회로 받고 고통을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 영원을 위하여 순간의 것을 포기하는 것, 그래서 히11:1이 말한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믿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여러분에게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십시오.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과 평화하고 예수님과 하나되고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성령안에 살게 됩니다. 이 은혜, 여기에 고난이 따라 오지만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합시다. 감사가 최고의 행복입니다.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길(6) 행2:42-47 2012.12.2(일) (0) | 2017.01.25 |
---|---|
믿음의 길(5) (요21:15-19) 2012.11.25(일) 내 양을 먹이라 (0) | 2017.01.25 |
믿음의 길(3) 요일2:12-17 2012.11.11(일) 자라야 쓰임받는다 (0) | 2017.01.20 |
믿음의 길(2) 요일5:11-21 2012.11.4.(일) 내안에 생명이 있다 (0) | 2017.01.20 |
행16:16-34 예수믿는 이유 2012.10.21(일) (0) | 2017.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