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5) (요21:15-19) 2012.11.25(일) 내 양을 먹이라
오늘은 11월 마지막 주일, 2012년도 한 달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해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한 해동안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묻게 됩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우리 교회 정덕연 집사님이 올린 글과 사진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은행에 갔더니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글사진). “대추,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가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그러면서 그가 찍은 사진 한 장을 올렸습니다(대추 사진). 늦가을에 붉게 익은 대추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작은 대추 한 알을 보면서 은행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아, 저 작은 대추 한 알이 봄, 여름의 수많은 벼락과 천둥과 태풍 이기고 저기 맺혔구나“. 그리고 보니 그 대추 한 알이 보통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대추뿐이겠습니까? 세상 모든 생명이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한동안 우리 교회 정문을 향기로 가득하게 했던 국화를 기억하십니까?(국화사진). 우리 교회 안중기 집사님이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지난 10월 초부터 약 2개월 우리 교회를 환하게 밝혔습니다. 이 국화가 우리 교회 처음 올 때는 꽃이 피려고 몽오리가 막 맺힐 때입니다, 그때까지 국화는 어디 있었을까요? 안집사님에 의하면 그 국화는 온실에서 약 3개월 자라고 있었답니다. 국화의 줄기를 잘라서 분토에 심고 물주고 온도를 맞춰주면 자랍니다. 그렇게 한 3개월 지나면 뾰족하게 봉오리가 나옵니다. 그때 우리 교회로 와 두 달동안 있다가 다시 온실로 가서 내년에 그 줄기를 잘라내 심으면 또 국화가 생겨납니다. 신비하지 않습니까? 한 알의 대추, 한 송이의 국화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어떨까요?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도 많은 돌봄과 보살핌과 정성을 통해 자라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냥 피는 꽃이 없듯이, 그냥 맺는 열매가 없듯이 우리의 인격과 믿음도 많은 천둥과 먹구름,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을 받고 자랍니다. 우리 믿음이 오늘 여기까지 오도록 누가 도왔는지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부모 말고 누구 떠오릅니까? 가장 떠 오르는 사람이 선생님들입니다. 그때는 몰랐는 데 시간이 지나도록 떠오릅니다. 초등학교때 율동과 노래를 가르쳐준 선생님, 기억 나시나요? 중고등부때 함께 수양회가서 키타치고 노래하며 캠파이어 했던 선생님들 기억하시나요? 자라서 결혼했습니다. 신혼에 바쁘기만 한 내 손을 꼭잡고 기도해주던 교회 권사님들 기억 나시나요? 아이들 키운다고 바쁠 때 구역장님이 대신 아기봐주고 친정 어머니 없을 때 어머니 역할 해주셨던 구역장님들, 기억나시나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아, 내가 혼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구나. 그때 누가 나를 도왔지. 누가 나를 위해 기도했지. 그래서 내가 여기 있지“. 성경은 이 사람들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양“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돕는 사람을 ”목자“라 부릅니다.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만큼 좋은 이름은 없습니다. 양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목자는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그것도 세 번이나 말씀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어떤 사명을 주신 것입니까? 목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첫 번째로 말씀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목자로 부르셨습니다“하면 이해가 되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이 생각할 것입니다. ”나를 목자로 불렀다고? 나는 목자가 아니라 성가대원인데. 목자, 교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기도도 많이 하고 시간도 많고 성경도 많이 알고 뭘 좀 아는 사람이 목자하는 것 아니야? 나는 목자 아니야“. 좋습니다. 여러분의 겸손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꼭 자격있는 사람들을 목자로, 교사로 부르셨습니까? 그 질문을 오늘의 말씀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베드로는 충분히 목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까?
베드로가 3년간 예수님 따라 다닌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잡아 뗀 사람이 예수님의 양을 칠 자격이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무덤에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을 때 예수님 무덤은 비어 있고 천사가 나타나 ”여기 있던 예수님은 살아 나셨다“고 선포한 것을 베드로가 직접 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갈릴리로 가지 않앗습니까? 왜 갈릴리에 갔겠습니까? 전도하러 갔겠습니까? 예수님 만나러 갔겠습니까? 3년동안 따라다닌 예수님 떠나 자기 옛날 생활로 돌아가려고 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세 번이나 말씀했으니 예수님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목자의 사명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한번도 예수님 떠난 적도 없고 매일 새벽기도하고 하루에 성경에 10장씩 읽고 천성이 좋고 오래 믿은 사람만 목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창1:28절을 읽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으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특별히 누구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받은 모든 인간이 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일을 하도록 허락하시고 그것을 할 능력은 주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허락과 함께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 일을 하라고 주신 축복을 “사명”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능력을 “지도력”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지도력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받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지도력은 조용기 목사나 이중표 목사같은 분이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에게는 지도력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에게는 많은 열등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창1:28절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이 나에게도 땅을 다스릴 권세와 함께 능력도 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05년, 한신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조용기 목사님께 인사를 갔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조목사님은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안수기도까지 해 주셨습니다. 그때 목사님 말씀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처럼, 타고난 지도력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매우 부족한 사람입니다. 여의도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어느 한 날 두렵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국민일보가 생기고 나서는 그 두려움은 더 커졌습니다. 재정 적자에 허덕이면서 매일 두려웠습니다. 지금도 저는 늘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하는 것은 매일 엎드리는 것입니다. 매일 2시간 3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외에 저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명과 지도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그의 위대한 사명과 지도력을 주신다“. 특별한 사람에게 보통의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십니다. 오래전 제가 인도네시아에 갔습니다. 거기 자바섬에 ”솔로“라는 도시가 있는 데 거기에 ”하나님의 가족교회“라는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오바자 라는 목사님이 그 교회를 담임했는 데 오바자 목사님은 늦게 목회를 시작한 데다 공부를 많이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교인이 13,000명이 모였습니다. 제가 더 놀란 것은 그 분에게 장모님이 있었는 데 80이 넘은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목장을 맡아 매년 배가를 거듭하여 500명이 넘는 교인을 목양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 할머니도 목자를 안한다고 못한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창1:28을 믿고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과 지도력을 주셨다” 고 믿자 그때부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공부를 많이 했거나 적게 했거나, 나이가 젊거나 80이 넘었거나 생육하고 번성할 사명과 능력을 주셨다. 놀라운 영적 지도력의 씨앗을 그들 에게 주셨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중국에 갔습니다. 소주에 사는 한 가정교회 목회자 집에서 잠을 잤습니다. 간증을 부탁했더니 자기는 목사님 아들이랍니다. 그런데 하도 아버지가 쫓겨다니고 힘들게 살아 자기는 목회 안하려고 일부러 장사를 했답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었답니다. 그러나 아내가 믿음이 좋아 목회를 권하고 자기 나이도 40을 넘으면서 하나님의 일밖에 소중한 것이 없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목회를 시작했는 데 자기는 제대로된 신학교를 다니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막상 목회를 시작했는 데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몇 년만에 교인이 800명이랍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게 능력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작하자 내게 능력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제 속에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죠. 저는 그 능력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 이론중에 “지도자는 타고 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특성화 리더쉽 이론”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태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후에 팔레토라는 사람은 소위 “팔레토 법칙”이란 것을 만들어 냈다. 지도력은 20%가 행사하고 80%는 그냥 따라간다. 소위 “20/80 법칙”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은 상위 20%에 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큰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적 리더쉽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사명과 능력과 리더쉽을 주셨다. 둘째 그 리더쉽은 사용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더쉽은 하나님의 양들을 치는 목양적 리더쉽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하신 것을 믿습니까? 세상에서 승리할 사명과 함께 그 능력도 함께 주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안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영적 리더쉽이 있는 것을 믿습니까? 그 리더쉽은 사용될 때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리더쉽을 주신 것을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목양의 목적으로 주신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목자다”. “나는 가수다”가 아닙니다. “나는 목자다”. “나는 리더다”. 아멘. 그러면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를 위해 15절을 봅니다. 요21:15, “그들이 조반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여기에 “사랑하라”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로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목자의 능력은 사랑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목자로서의 사명을 부탁할 때 무엇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것 요구한 것 없습니다. 학력, 외모, 말주변, 가정, 성경지식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딱 한 가지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이면 됩니다. 영상에서도 어떤 교사가 말했습니다. 교사를 시작할 때 두 가지를 두려워 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내 안에 은혜가 많아서 그것이 밖으로 흘러가야 할텐데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내가 성경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할텐데 하는 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사로 일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는 교사하면서 더 받고 성경은 가르치면서 배울 때 진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른 것은 묻지 않았습니다. 딱 한 가지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사랑도 세 번 질문이 다 다릅니다. 첫 번째 15절에서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더”가 들어갑니다. 최상급을 사용했습니다. “사랑”이란 말도 “아가페”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최고 아가페 사랑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그 질문을 받자 베드로가 부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필리야”였습니다. 필리아의 사랑은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또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더”라는 말을 빼고 묻습니다. 16절, “그러면 네가 나를 그냥 사랑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자 마지막 세 번째 주님이 어떻게 물으신 줄 아십니까? 아예 “아가페”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쓴 “필리야”를 똑같이 써서 묻습니다. “그래. 네가 나를 친구수준으로 사랑하느냐? 좋다.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과 제가 주님과 양을 섬길 때 최고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 누구와 비교가 되지 않는 최상급의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누가 이 기대에 보답하겠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은 최고의 사랑으로 예수님과 양들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래도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 데 까지 하면 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자랍니다. 처음부터 완전할 수 없습니다. 목자를 하거나 교사를 하거나 처음부터 예수님같은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만큼 하면 됩니다. 사랑은 자랍니다. 일단 시작하면 자랍니다. 그러나 시작하지 않으면 자라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한번 간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슨 병이 있어 수술실로 가는 데 갑자기 주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더랍니다. “네가 힘드냐?” 목사님은 즉시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주님. 힘들어요.” 그러자 주님이 또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고통스러우냐?” 목사님이 또 대답했답니다. “예, 주님,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물으셨답니다. “그래서 불행하냐?”. 이 질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습니다. “힘드냐?” 그래서 “예, ”고통스러우냐?“. 그래서 ”예“, 그래서 그 다음은 ”그럼 내가 고쳐줄까?“ 할 줄로 알았답니다. 그러면 또 ”예, 주님, 할렐루야“ 하려고 했는 데 ”그러면 너 불행하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한참 주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행복한지 불행한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위해 한 해 동안 일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 힘드셨죠?“ ”예“, ”때로 고통스러웠죠?“ ”예“. 한번 더 묻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요즘 경제가 안좋습니다. 밖에서 일하는 남편 분들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남편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힘듭니까? 가끔 고통스럽습니까? 묻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목자, 교사들에게 묻습니다. ”목자, 교사 여러분, 지금 힘드시죠? 가끔 고통스럽기도 하시죠?“ 묻습니다. ”그래서 지금 불행합니까?“ 장로님들께 묻습니다. ”장로님, 장로의 사역을 감당하시느라 힘드시죠? 가끔 고통스럽기도 하시죠?“ 묻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목회자 사모님들, 목회자 세미나때마다 가장 오랫동안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목회자 사모님들입니다. 묻습니다. ”사모님들, 힘드시죠? 자주 고통스러우시죠? 그래서 불행합니까?“
누구나 힘들 수 있습니다. 자주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누구나 여기까지는 ”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우리의 답변은 다릅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아니요. 불행하지는 않아요. 힘들어요.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불편해요.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아요. 불편과 불행은 달라요.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불편해요. 그러나 불행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예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는 행복해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요. 예수님 사랑 때문에 행복해요. 아멘”.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가질 가장 크고 유일한 은혜, 사랑, 예수님 사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양을 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함께 양을 사랑하는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목자로, 교사로, 장로로, 목회자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다보면 그 사랑이 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다른 사람들 때문에 힘들고 시험들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이 일본에서 일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다른 데는 몰라도 일본에는 가지 말아야 할 분입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죽었고 형도 탄광으로 끌려가 죽었습니다. 자라면서 일본사람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다 선교사로 서원했습니다. 어디로 갈까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그에게 일본으로 가라고 감동했습니다. 한번도 선교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본, 그래서 못간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우기다 어느날 두 손, 두 발들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주님의 단 한 마디 말씀때문이었습니다. 기도하는 데 “너 일본으로 가라”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주님, 그것은 못합니다. 일본 사람이 우리 가족에 얼마나 큰 죄가 행한지 아십니까?” 그랬더니 주님이 한참있다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나에게 행한 죄가 크냐? 일본 사람들이 너에게 행한 죄가 크냐?”. 아, 이 한 마디에 선교사는 답변을 못했답니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답니다. “제가 주님께 지은 죄가 크지요.” 그때 주님이 말씀했답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는 데 왜 너는 일본을 용서하지 못하느냐. 일본으로 가라”. 그래서 갔답니다. 어떻습니까? 교회 일꾼 여러분, 가끔 일하다 보면 사람 때문에 힘들지 않습니까? 제일 큰 방해꾼이 사람 아닙니까? 사랑은커녕 확 한번 뒤집어 엎고 싶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가 그가 나에게 한 행동이 용서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때 주님의 질문을 떠 올리세요. “네가 나에게 행한 죄가 크냐? 그가 너에게 행한 죄가 크냐?”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행한 그 어떤 죄보다 내가 주님께 범한 죄가 더 큽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받은 어떤 용서보다 내가 주님께 받은 용서가 더 큽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자 여러분, 교사 여러분, 봉사자 여러분, 이 은혜로, 이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양은 목자가 가르친대로 삽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이후의 교회 역사는 교회안에 목자와 교사가 신자들을 가르쳐 말씀으로 양육하던 역사였습니다. 엡4:11절을 보겠습니다.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으니”. 이 말씀은 사도 바울 시대, 그러니까 주후 1세기, 교회안에 있었던 직분을 소개합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종류로는 모두 5종류입니다만, 이 직분들이 “그리고”로 연결되지 않고 “혹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직분들은 어떤 서열이나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선지자, 그 다음이 복음전하는 자, 그 다음이 목사, 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교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혹은 혹은”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순서를 바꿔 놓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직분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직분은 목사와 교사라는 것입니다. 이 두 직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양을 치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교회사의 역사를 보면 이 두 직분이 계속 발전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라는 직분에서 교회를 감독, 치리하기 위한 목회자가 나오고 교사라는 직분에서 전문 신학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전문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분이 교회안에 평신도 직분으로 계속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라는 직분에서 장로, 집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장로, 집사 직분은 본질적으로 목양자입니다. 교회 계급이 아닙니다. 목회자로 전문화된 목회자를 도와 평신도로 함께 신자들을 목양하는 것입니다. 목양하라고 장로, 집사 세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로, 집사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에서 신학자가 빠져 나가 전문적인 신학 영역에서 교회를 섬기기도 했지만 여전히 교회안에 평신도 교사가 남아 신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봉사, 성가대라든가. 안내위원, 대접, 행정같은 일은 전문직인 목사와 신학자, 평신도직인 목자와 교사의 일을 잘 되기 위해 보조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이 말은 이 일들이 다른 일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중심사역이 무엇인지를 말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교사,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 그 일을 위해 그 후에 많은 봉사직들이 생겨났습니다. 한국에는 권찰, 권사 직분이 생겨났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다른 직분도 있습니다. 이 모든 직분은 딱 한 가지를 위하여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래서 교회안에서 목자로 교사로 봉사하는 것은 최고의 일입니다. 그것은 2천년 교회사의 중심에 있던 사역이며 성경의 핵심적 사역입니다. 그것이 신약을 통해 구약으로 가면 목자였던 모세, 다윗으로 갑니다. 목자는 성경 최초의 직분이요 그것으로부터 훗날 교회 모든 사역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모든 역사와 신앙을 오늘 예수님은 한 마디로 정리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여러분, 교회의 최고 사명은 양을 먹이고 치는 일임을 아십니까? 목자와 교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양을 가르치고 먹일 때 예수님의 일을 대리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 목자로 부르신 것을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 모든 신자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 목자거나 다음에 목자거나, 우리 교회 모든 신자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교사로 일하거나 다음에 교사로 일하거나, 영원히 목자, 교사 아닌 신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나 목자와 교사가 중요한지 전쟁에서 한 남자가 총을 맞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물, 물”하면서 물을 찾았습니다. 옆에 있는 전우가 입에 물을 댓더니 조금 정신이 들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 내가 죽거든 꼭 한 사람을 찾아가 주게.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철없이 뛰돌던 나를 전도한 교회 선생님이네. 그에게 가서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내가 그때 어렸지만 나를 전도해서 교회 나오게 하고 부족한 나를 사랑해준 선생님, 나는 그 뒤로 선생님이 가르친대로 살려고 정말 노력했네. 비록 전장터에서 죽지만 선생님이 전해준 예수님 믿고 오늘까지 살았고 지금 죽어서 천국에 간다고 꼭 감사의 말을 전해주게”. 친구의 유언을 듣고 친구의 고향을 찾았습니다. 물어 물어 옛날 친구를 전도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선생님은 지금 예수믿는 것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한때 잘 믿었지만 아무리 예수 믿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것에 실망하여 지금은 교회를 쉬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혹시 이런 친구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냈습니다. 어릴 때 전도하고 가르쳤던 교회학생 어린이였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유언을 다 전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너무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실망하여 교회를 쉬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러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전도하고 내가 가르친 어린이가 내가 가르친 살려고 노력했다니. 그리고 그렇게 용기 있게 죽다니. 이제야 나는 예수믿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전도한 친구를 나를 살릴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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