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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6) 행2:42-47 2012.12.2(일)

믿음의 길(6) 2:42-47 2012.12.2()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

12월 첫 주일입니다. 지나간 열 한 달 하나님의 은혜에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감사합니까?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 누가 이런 글을 썻습니다. “주님, 제가 지난 한 해동안 꼬박꼬박 세금을 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게 직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며칠 전에 제가 사람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설거지 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은 제게 대접할 만한 마음과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며칠 전에는 제 차가 고장나서 공장으로 끌고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게 귀한 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어제 밤에는 제 몸이 너무 피곤하여 정신없이 자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게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난 주일 예배시간에 제 옆 자리에 앉아 음정이 틀린 교인의 노래를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은 제 귀가 아직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은혜로 받으면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제가 이번에 중국에 가서 가정교회 몇 군데를 방문했습니다. 나이가 40대 초반쯤 되는 젊은 목회자 하나는 매 주일 13군데의 작은 가정교회를 방문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다 보면 주일날 밤이 된답니다. 이 목회자의 소원은 이들이 한 군데에 모여 마음껏 예배하고 싶은 데 그럴 공간도 돈도 없고 또 당국이 허락해주지 않아서 못한답니다. 또 한 군데 가정교회는 자기 집 지하에서 예배드리고 있었는 데 한국에서 목회자가 와서 교육받을 때는 하나는 큰 거리에, 또 하나는 집앞에 서 있게 하고 공안이 오면 교육을 중단한답니다. 한국에서 마음껏 예배드리는 저에게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 나에게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그리고 우리 교회로 돌아왔는 데 넓은 예배실, 주차장, 아파트 숲으로 둘러쌓인 환경, 모든 것이 감사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아름다운 교회에서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까? 교회는 신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교회없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지만 교회없이는 하나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교회가 구원하지 않지만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무신론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남고 기독교는 가라”. 또 어떤 신자는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믿지 않는다”. 멋진 말이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예수없는 기독교도 없고 기독교 없는 예수님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도 믿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가르치는 집이요 기독교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믿음의 길을 가는 여러분, 반드시 이것을 기억합시다.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하여”. 이것은 사실 중세의 성 프란치스코의 말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교회가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랬어도 그는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를 위하여”.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가는 여러분,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길을 갑니까? 한손으로 예수님을 붙잡았다면 또 한 손으로는 교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 가야 합니까?

 

먼저 교회는 집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성경이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교회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은 집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집에서 자랍니다. 그리고 집에서 죽습니다. 집은 건물이 있기 때문에 집이 아니라 가족이 있기 때문에 집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를 보실까요? 성령이 임하고 베드로가 설교해서 모인 처음 교회, 그 처음 교회가 건물이 아름다웠겠습니까? 지금처럼 콘크리트로 5, 10층 지었겠습니까? 처음 교회는 작고 초라한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자기 집을 교회로 내 주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이 집이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살던 그 집은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 마리아의 집은 무너지고 그 위에 십자군 시대에 다시 지은 집입니다. 100여명 들어가면 앉을 자리도 없습니다. 좁고 협착합니다. 지금 시리아에 가면 주후 232년 초대교회 사람들이 사용했던 교회가 하나 발굴되었습니다. “듀라 유로포스라고 합니다. 이것도 집 형태인데 두 개의 방을 헐어 70명 정도 들어가 예배드렸습니다. 역시 작고 좁았습니다. 그나마 이런 데서 에배드리면 좋은 형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은 예배드릴 데가 없어 작은 가정집에서, 지하에서, 심지어 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가 집이라는 것은 교회가 건물이란 뜻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house가 아니라 household입니다. 집이 아름답기 때문에 집이 아니라 거기 모여 사는 가족들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집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를 보실까요? 성도들이 모여 예배할 때 비록 크고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이유는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누구입니까? 46절입니다.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가족의 특징은 늘 같이 있는 것 아닙니까? 모이기를 힘쓰는 것 아닙니까? 만날 때마다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고락을 같이 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의 스티네트라는 가정학자가 미국 가정 3천 가정을 대상으로 행복한 가정이 어떤 가정인지 조사했습니다. 열 가지 특징이 나왔습니다. 첫째 서로 열등의식이 없으며 비교하지 않는다. 둘째. 규칙적이며 열린 대화가 있다. 셋째. 서로의 성숙에 관심이 있으며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도 노력한다. 넷째. 서로를 잘 이해하며 잘 참고 기다린다. 다섯째. 자기의 일을 사랑하며 삶을 즐길 줄 안다. 여섯째. 서로에 대해 비밀이 없으며 정직하다. 일곱째. 서로에 대하여 예절이 있으며 사랑과 함께 존경할 줄 안다. 여덟째. 남편의 목표를 아내가 돕고 아내의 꿈을 남편이 격려한다. 아홉째. 신앙관이 일치하며 인생의 한 방향을 바라본다. 열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긴다. 사도행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한 가족으로서 거기 모였기 때문에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사랑하며 정규적으로 대화하고 있는 것 없는 것 서로 나누면서 서로 격려했습니다. 이것이 집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족과 함께 사랑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재작년 미국 워싱톤에서 집회하고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미국의 목회 동역자 대 여섯명이 차를 렌트해서 워싱톤에서 뉴욕까지 직접 달렸는 데 가는 가운데 꼭 한 군데 들러야 한다고 해서 들렸습니다. 이름이 아미쉬마을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본래 16세기 스위스 개신교 신자들인데 미국으로 이민와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당시 신앙의 핍박을 받게 되자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에 온지 500년 되었는 데도 지금까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삽니다. 이들은 현대 기술 문명을 거부하고 경건한 신앙적 방식과 가족중심의 삶을 유지하고 삽니다. 이들은 TV나 전자레인지, 컴퓨터,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대신에 마차를 타고 다니고 단순하고 소박한 검은색 옷만을 입고 성경과 공동체생활 그리고 가족을 중요시합니다. 이들은 보험이 없습니다, 가족중 하나가 사고를 당하면 마을 전체가 돈을 모아 지원합니다. 우리는 가령 냉장고가 고장나면 서비스센터나 수리 전문가에게 부탁합니다. 집에 도둑이 들면 경찰에 신고하고 보험사 에 연락합니다. 부상을 당하면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가고 우울증을 앓으면 심리치료사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모든 일을 서로 서로 합니다. 이사할 때 이삿짐 센터 연락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나서서 이사합니다. 지붕을 수리해야 한다. 옆 집, 뒷 집 모두가 함께 합니다. 양로원도 없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든 마을 사람들이 섬기는 같은 아버지요, 어머니이기 때문에 양로원이 필요없습니다. 서로 서로 돌봅니다.

 

아이들이 학교 졸업하면 부모와 함께 농장에서 일합니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가정의 주인은 남성이며 여성은 결혼하면 자동적으로 주부가 됩니다. 이 사람들은 가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피임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많습니다. 평균 자녀가 7, 10, 그 이상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뉴옥 타임즈 기자가 이곳을 방문하고 글을 썻습니다. “아미쉬 사람들은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걱정도 없다”. 아미쉬 여성들도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자들이 물었습니다. “지난 4주 동안 좌절감이나 우울증 느낀 적이 있습니까?” 99%가 그렇지 않아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여성들보다 육체 노동도 많이 하고 아이도 많이 낳고 남편에게 복종도 더 많이 하는 데 다른 여성들보다 훨씬 행복합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보다 공동체를 더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성공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미쉬 사람들이라고 성공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공의 개념이 다릅니다. 성공과 행복과 거룩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행복은 얻은 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은 누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아미쉬 사람들은 자기 한 사람 성공하자고 남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나보다 가족이 먼저, 가족보다는 공동체가 먼저입니다. 나보다 가족이 그리고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 늘 자기의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성공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약 100년전에 5,000명이이었던 이들은 최근 25만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남들은 아기 키우기 어렵다고 나 혼자 편히 사는 데 아이들이 걸거친다고 아이도 안 낳는 데 이들은 가족중심, 공동체 중심, 믿음 중심으로 살다보니 인구도 매년 늘어납니다. 제가 그 아미쉬 마을을 방문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 지금도 성경적으로 살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구나. 성경적 진리가 없어서 우리가 잘못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대로 안 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 되는 것아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적으로 사는 것이 성경의 진리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가치는 나보다 가족, 가족보다 공동체, 자기성취에서 자기희생,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 그래서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고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것을 교회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집입니다. 누구나 이 집에 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를 떠날 때 세상에 집이 되어 돌아갑니다.

 

다음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가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집이라면 교회는 곧 어머니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어머니요 어머니가 없다면 가정이 아닙니다. 자식없는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와 안 사는 자식도 있지만 어머니없이 태어난 자녀는 없습니다.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식을 기릅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어머니로 많이 묘사합니다. 49:14-15 말씀입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성경의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아버지지만 동시에 세상을 낳고 양육하고 사랑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어머니입니다. 66:11-14,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여기에 하나님의 모성이 잘 나타납니다. “젖은 빠는 것 같이 그 품에서 만족하겠고”, 하나님은 그 백성을 먹이시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로하는 위로자입니다.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어머니의 자궁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라쿰자궁에서, 긍휼, “라카민이 나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를 말할 때 어머니만큼 좋은 은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니님은 어머니같은 하나님이다“. 인간이 가장 잘 이해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이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신자의 어머니였습니다. , 어머니는 자녀를 낳습니다. 영적으로 신자가 태어난 곳이 교회입니다. ,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먼저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본래 어머니의 영입니다. 성령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란 말은 대신 말해주는 분”, “옆에서 떠나지 않고 도와주고 들어주고 말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성령이 임하자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교회, 그 교회는 모성적 본성으로 그 자녀들을 돌봅니다. 2:41절을 볼까요?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1절은 성령이 임하자 막 태어난 영적 어린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교회가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의 씨가 심령에 떨어지자 영적 아이가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고 세례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어머니 교회는 자녀를 낳자 마자 양육을 시작합니다. 42절입니다.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1절은 영적 출산, 42절은 영적 양육 이야기입니다. 모두 어머니 교회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태어나고 양육하면 어떻게 됩니까? 돌보아야 합니다. 44-45절은 영적 아이를 돌보는 이야기입니다.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낳고 가르쳤으면 길러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기를 희생하며 자녀들을 돌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모두 어머니 교회 품에서 태어난 것을 아십니까? 그러면 지금 어머니 교회로부터 양육받고 있습니까? 부모는 자녀를 낳기만 하지 말고 가르쳐야 하고 자녀는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말고 배워야 합니다.

 

지난 여름, 제가 목회자들과 영국에 갔습니다. 함께 감리교의 창설자 존 웨슬리의 발자취를 더듬는 데 첫 번째로 갔던 곳이 웨슬리가 태어난 엡웟이란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웨슬리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가 목회하던 곳인데 웨슬리는 1703, 17번째 아들로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웨슬리가 5세가 된 1709, 갑자기 이 집이 불이 났습니다. 웨슬리에게는 당시 19형제가 있었는 데 불이 나자 모든 형제들이 용케 잘 피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만 피하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하도 자녀가 많아 다 나왔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는 데 자세히 보니까 웨슬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발을 동동 구르는 데 누가 용감하게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건져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는 자녀들을 너무 잘 가르친 어머니였습니다. 그는 19남매를 낳고 9을 잃고 10을 키웠습니다. 하도 자녀가 많다 보니까 학교를 보낼 수 없어서 집에서 직접 가르쳤습니다. 하루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6시간을 가르쳤습니다. 남자들 뿐 아니라 딸들도 다 가르쳤습니. 하루 6시간은 같이 모여 놓고 가르치고 일주일에 한번은 한 사람을 한 시간씩 시간을 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오후 5시가 되면 어머니는 한 시간 쉬면서 형이 동생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이것을 5살부터 대학 들어갈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수잔나가 가르친 교육은 오늘날 현대 교육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접 가르쳤습니다. 홈스쿨링입니다. 매일 모여 놓고 함께 가르쳤습니다. 그룹지도요 공동체 교육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개인지도를 했습니다. 일대일 양육이요 멘토링입니다. 형이 동생을 지도하게 했습니다. 중간 리더 교육이요 목자교육입니다. 공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성경과 품성도 가르쳤습니다. 불속에서 죽을 뻔한 웨슬리에게 어머니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가르쳤습니다. “웨슬리야, 너는 불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단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를 건져주셨다. 참새 한 마리도 먹이고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너를 불속에서 구원한 것은 반드시 너를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이 너를 살리셨고 너에게는 사명이 있다. 너는 타다 남은 불속에서 건져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다”. 훗날 웨슬리는 어머니의 이 말이 귀에 쟁쟁해서 결국 죄악의 불속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건진 위대한 전도자, 위대한 감리교 창설자,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어머니 교회에서 배우나요? 다시 42절 볼래요?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여러분은 교회에 세우신 사도들, 목회자들을 통해 배웁니까? 교회 오자 마자 새가족 과정, 그것마치며 제자훈련, 목자훈련, 모든 성경의 진리와 교훈으로 배우고 자라나요? “떡을 떼며 교제하며”, 여러분은 교회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통해, 행복한 만남 목장교회에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서로 배우나요?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여러분은 어머니 교회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배우나요? 무엇보다 어머니 교회가 주는 풍성한 하늘의 젖, 생명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자라나요?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불속에서 건지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뜻과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이 땅에서 사용하시길 원한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에게 교회는 영혼의 어머니다”.

 

셋째. 교회는 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헤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예수님의 몸으로 설명한 이야기가 성경에 30번 나오고 교회는 몸이다라고 딱 잘라 말한 구절도 24절이나 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의 몸의 한 부분이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지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교회안에 서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안에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몸안에 있는 모든 지체는 우열의 차이가 없습니다. 다리는 허리에 연결되어 있고 허리는 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픕니다. 시력은 청력에 의존되어 있고 발은 손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맹인들은 청력이 뛰어 납니다. 눈대신 귀가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44-45절 볼까요?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사도행전 시대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개인이 모이면서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나만 문제없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대방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픔도 크지만 다른 사람의 아픔이 더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도 그런 질문이 있습니다. 머리가 둘이고 몸이 하나인 기형아는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냐? 답은 이것입니다. 만일 머리 하나를 쳐서 다른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한 사람이고 머리 하나를 쳤는데도 다른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으면 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교인들은 서로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교회 생활하면서 서로 의지합니까? 목회자는 장로님을 의지하고 장로님은 목회자를 의지합니까? 새가족은 먼저 온 신자를 의지하고 먼저 온 신자는 새로 온 신자를 의지합니까? 교회학교 어린이는 어른을 의지하고 어른은 교회학교청년들을 의지합니까? 몸의 특징은 모든 지체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서로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지선아 사랑해에서 이지선 양은 교통사고로 얼굴과 두 손을 잃었습니다. 손가락이 없으니까 손목으로 글을 씁니다. 그가 손가락이 없다고 손목이 나를 비웃지 않았습니다. 손가락이 없으니 손바닥이 글을 쓰고 손등이 다쳤으니 손목이 대신 일했습니다. 스웨덴의 복음가수 레나 마리아는 어렸을 때 사고로 두발과 두 손을 잃었습니다. 몸에 아무 것도 없이 짐승처럼 기어다녀야 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찬양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발과 두 손이 없는 데도 세계적인 찬양가수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두 발이 없다고 입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두 손이 없다고 눈이 그를 째려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기 몸은 자기가 책임집니다. 몸은 없는 것을 탓하지 않고 내가 대신 짐을 집니다. 언제나 미성숙한 교회는 서로 대해 책임을 묻고 성숙한 교회는 서로 대해 책임을 집니다. 책임을 묻는 교회와 책임을 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한 몸끼리는 절대 서로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만일 책임을 묻는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일하고 한 다리가 다치면 다른 다리가 일합니다. 성숙한 교회는 서로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신자가 잘못되면 목회자가 자기가 잘못 해서 그렇다고 회개하고 목회자가 잘못되면 신자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회개합니다. 교회에 아픈 사람이 많으면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기도하고 시험든 사람이 있으면 내가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교회재정이 부족하면 내가 헌금 안해서 그렇다고 말하고 교회 분쟁이 생기면 내가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고 회개합니다. 한 몸끼리는 책임을 묻지 않고 책임을 집니다. 한 몸끼리는 아픔을 공유합니다. 고전12:26절 말씀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한 몸이냐 아니냐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지체가 아플 때 나도 아프냐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바로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 평생 교회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집입니다. 그 집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행복을 경험합니다. 교회는 어머니입니다. 그 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양육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한 몸안에서 사랑하고 돕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교회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교회와 함께 합니다. “교회안에서, 교회와 함께”. 끝까지 승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