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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이윤재목사

믿음의 길(7) 마20:1-16 은혜로 살고 은사로 일하고 2012.12.9(일)

믿음의 길(7) 20:1-16 2012.12.9()

은혜로 살고 은사로 일하고

오늘은 12월 둘째 주일, 올 해도 한 달이 안 남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욥9:25-26절 말씀과 같습니다.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같고 움킬 것을 날아 내리는 독수리같구나”. 얼마나 세월이 빠른지 시간은 달리는 우체부같고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에게 한 달밖에 시간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년전에 제가 추천사를 쓴 책이 있습니다. 김영사에서 나온 <내 생애 마지막 한 달>이라는 책입니다(사진1). 이 책은 미국 우드랜즈 펠로우윕 교회의 케리 슉 목사님이 쓴 책인데 사연이 있습니다. 교인중 하나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병으로 생각했는 데 결국 한 달만에 돌아갔습니다. 한 달동안 환자의 마지막을 보면서 쓴 책이 이 책입니다. 케이 슉 목사님은 그 교인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한달은 있다. 그러면 그 한 달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은 우리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이 있고 우리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에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지금 오라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그 앞에 갈 수 있는가? 초대교회 어느 수도원에서 평생을 기도하며 살았던 한 노인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그의 수의를 입히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뜨고 웃었습니다. 그나마 한번도 아니라 세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형제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바, 저희는 울고 있는데 왜 아바께서는 웃으십니까? 그나마 왜 세 번이나 웃으십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첫 번째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두번째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리고 세 번째 웃은 것은 내가 땅의 수고를 마치고 하늘의 안식을 얻으러 가기 때문이요”. 그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하나님께 웃고 갈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우리가 우리의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당신의 남은 생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답변이 달랐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의 남은 날동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포도를 수확할 때였습니다(사진2). 이스라엘에서 포도는 7-8월에 수확하는데, 이 시기는 우리 나라처럼 가장 무더울 때입니다. 모든 추수가 다 그렇지만, 포도는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일찍 따면 아직 안 익고 너무 늦게 따면 햇빛에 열매가 상합니다. 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땁니다. 그러면 커다란 광주리에 담습니다. 일꾼들이 광주리를 포도주 틀로 가져가 통째로 부으면 발로 밟습니다(사진3). 그래서 즙이 된 포도액은 항아리에 담아서 6주 정도 땅속 웅덩이에 저장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키부츠에서 3주 있었습니다. 그때 포도따는 일을 한번 도와 본 일이 있는 데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날씨는 덥죠. 포도따고 나르고 발로 밟고 찌꺼기 걸러내고 항아리에 담고 옮기고, 얼마나 일손이 많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때 제가 오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단시간에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시간을 늦추면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주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모두 5번 나가서 일꾼을 불렀습니다. 아침 6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포도원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남은 생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습니까? 특별히 새 해에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주는 가장 큰 것은 주인이 일꾼을 은혜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주인은 일꾼을 직접 불렀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지주들은 대개 세 종류의 일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은 아니지만 상당한 재량권을 가지고 주인의 일을 대신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매니저입니다. 다음은 종입니다. 종은 자유는 없었으나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가족처럼 주인과 함께 살았습니다. 청지기와 종은 정규노동자입니다. 그러나 바쁠 때는 주인이 품꾼도 불러 썻습니다. 품꾼은 요즘 말로 하면 일용직입니다. 정한 시간에 일하고 일한대로 보수를 받습니다. 지금 주인이 부르는 사람은 품꾼입니다. 만일 정규직으로 일할 청지기나 종을 부른다면 주인이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르는 사람은 품꾼입니다. 일용직인 품꾼까지 주인이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주인은 자신이 직접 나섭니다. 1절을 보실까요? 20: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직접 나갔습니다. 그나마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직접 부르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경의 하나님은 일꾼을 직접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직접 불렀습니다. “모세야”, 떨기나무 숲에서 하나님이 직접 불렀습니다. 사무엘아, 다윗아, 사울아, 하나님이 직접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직접 불렀습니다. 안드레야, 빌립아, 마리아야, 베드로는 두 번이나 직접 불렀습니다. 베드로야, “요한의 아들 시몬아“. 여러분도 하나님이 직접 부르신 것을 아십니까?

 

예루살렘의 다마스커스 게이트에 가면 지금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품꾼의 비유와 비슷한 풍경이 벌어집니다. 다마스커스 게이트근처에는 주로 팔레스타인 아랍사람들이 몰려 삽니다. 아침 일찍 되면 일을 찾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몰려 듭니다(사진4). 하루 일거리를 찾아 몰려온 일용직 노동자들입니다. 그러면 고용주들이 봉고차를 몰고 와서 쓸 만한 사람들을 태우고 일터로 갑니다. 대부분의 고용주는 유대인이고 노동자는 아랍사람입니다. 고용주가 나타나면 일꾼들을 그 주변으로 몰립니다. 고용주가 자기를 선택해주기를 바라면서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갑니다. 고용주가 두리번 거리고 손가락으로 사람을 찍으면 그 사람은 환히 웃으면서 고용주를 따라갑니다. 남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러운 듯 쳐다 봅니다. 왜 주인은 어떤 사람은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안 부를까요? 그것은 주인의 자유입니다. 쓰고 안 쓰고는 주인이 알아서 합니다. 그러나 어쨓든 부름받은 사람에게는 주인의 부름이 은혜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키도 비슷하고 얼굴도 비슷하고 배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중에서 주인이 불렀으니 그는 참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인이 직접 불러준 은혜말고 또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받은 은혜가 또 있습니다. , 첫 번째 사람을 보시죠. 2, 한 데나리온 약속하고 불렀습니다. 이 사람은 약속받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한 데나리온 줄 것을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반드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일용직 노동자에게 주인이 무엇이 아쉬어서 약속까지 합니까? 여러분, 성경에 600회 이상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아십니까? 안주면 못받고 주면 다행인 피조물인 우리에게 하나님이 600번이나 약속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네게 주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그중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은 366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시킵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3-4절입니다. “내가 네게 상당하게 주리라”. 두 번째 사람에게는 정확한 액수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상당하게하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디카이오스입니다. 이 말은 공정하게, 정의롭게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보다 세 시간을 덜 일했습니다. 그래서 한 데나리온 주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네가 일한만큼은 공정하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 시간 덜 일했으니 불러주기만 해도 고마운 데 공정하게주겠다고 까지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주인 아닙니까?

 

세 번째, 네 번째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20:5,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세 번째나 네 번째나 주인이 똑같이 대했다는 것입니다. 제 육시는 12시요, 9시는 오후 3시입니다. 처음 부른 사람에 비래 세 번째는 6시간 덜 일했고 네 번째는 9시간 덜 일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을 주인이 부른다 해도 똑같은 조건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보셨나요? 아르바이트는 시간대로 받습니다. 아무리 좋은 주인이라도 6시간 덜 일한 사람, 9시간 덜 일한 사람을 똑같이 주지 않습니다. 돈만이 아닙니다.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6시간, 9시간 덜 일한 사람을 부를 때는 사실 저자세일 필요도 없습니다. 굳이 사정하면서 꼭 오십시오. 부디 오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는 식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똑같이 대했습니다. 보수도 두 번째 사람처럼 상당하게 주겠다고 하고. 자세도 정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똑같이 대하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자세는 언제나 똑같다는 것을 아십니까?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나님은 변개함이 없습니다.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예수님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대하는 자세가 같고 같은 사람을 대할 때도 과거나 미래나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지나간 한 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대하지 않았습니까?우리가 하나님을 다르게 대했지 하나님은 우리를 똑같이 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한번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아멘.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마지막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은 일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꾼들을 은혜로 부르셨지만 그중에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마지막 부른 사람입니다. . 주인이 오후 5시에 밖에 나가보니 거기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여기 있느냐?”. 그랬더니 그가 말합니다. 7, “저를 품꾼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그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금 일을 시작한지 11시간이 지났는 데도 그는 아직 부름받지 못했습니다. 괜히 부름받지 못했겠습니까? 주인이 네 번이나 나왔는 데도 괜히 눈에 띄지 못했겠습니까? 뭔가 중대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입니다. 몸이 병들었다든지, 힘이 없다든지, 인상이 나쁘다든지, 그러면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를 씁니다. 7, “너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주인은 다 씁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일잘해서 쓰고 일못하는 사람은 불쌍해서 씁니다. 능력있는 사람은 자격때문에 쓰고 능력없는 사람은 은혜로 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제 친척 아주머니중에 아들을 둘 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에 가고, 다른 하나는 몸이 아파서 평생 데리고 삽니다. 어머니가 누구를 더 사랑합니까? 똑같이 사랑합니다. 공부잘한 아들은 기뻐서 사랑하고 아파서 집에 있는 아들은 불쌍해서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사람이 받은 은혜는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 지금 한 시간 남았습니다. 오후 6시에 일이 끝나는 데 지금 5시입니다.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해 봤자 한 시간 밖에 일 못합니다. 지금 들어가면 사람들이 저 것 왜 왓나?” 째려봅니다. 그리고 만일 돈을 준다면 무엇을 했다고 돈주나?” 사람들이 욕합니다. 그러면 왜 주인은 이 사람을 포도원으로 들어가라 했습니까? 불쌍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빠 하나 믿고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 그러면 간단합니다. 일시키지 않고 돈만 주면 됩니다. 들어가 일해봐야 한 시간, 괜히 걸거치기만 합니다. 그래서 화끈하게 이리 오세요. 지금 시간도 늦고 일도 끝나가니 내가 한 데나리온 주겠소. 그것을 가지고 가족에게 가세요. 다음 부터는 일찍 와서 일을 받으세요”. 그런데 이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7, “포도원에 들어가라”. 제가 이 부분을 묵상했습니다. 왜 주인은 굳이 그에게 일하라 했을까?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주인은 품꾼에게 값싼 동정은 베풀지 않았다. 그를 값싸게 동정함으로서 그의 자존감에 모멸감을 주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지만 그는 그 일을 함으로 정당한 보수를 받게 했다. 일보다 사람을 더 세워준 것이다”. 이것이 주인이 준 은혜였습니다. 공짜로 돈을 주는 것도 은혜지만 자신이 직접 일을 해서 보람있는 보수를 받게 하는 은혜, 일 안 시켜 공짜 인생을 살게 한 은혜보다 일하게 함으로 떳떳한 인생을 살게 한 은혜, 그것이 그가 받은 가장 큰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굳이 목수로 일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렇게 가난한 집에 보내셔서 요셉처럼 목수로 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일을 하면 얼마나 하고 집을 지으면 몇 채나 짓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목수로 태어나고 목수로 산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앞에 나타난 횟수가 모두 132회입니다. 그런데 그 중 10번을 제외하고 122회는 일상의 일터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현장은 누군가가 일하는 현장이었고 그 일터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비유가 모두 52개인데 그중 45개가 일과 관련된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12은 모두 일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이 만난 사람중에 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는 모두 40번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데 그 중 39번이 사람이 일하는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일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위에서 부채 붙이고 한가하게 노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멍에를 메고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멍에를 매고 따르라고 하시는가? 멍에는 무겁고 부자유한 짐인데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따르라 하시는가? 저는 오래 고민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믿으면 두 개의 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려놓는 짐이고 또 하나는 지는 짐입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짐이 내려 놓는 짐입니다, 예수믿으면 먼저 짐을 내려놓습니다. 이 짐은 죄의 짐이요 인생 짐입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앞에 나와”.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예수님앞에 나오면 모든 짐 내려놓습니다. 구원은 죄의 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 짐을 대신 져주시는 것입니다. 68:19절을 믿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 짊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아멘.

 

그러나 또 하나의 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져야 할 짐입니다.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내려놓는 짐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 위해 지는 짐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인생살이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 때문에 은혜입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늙으면 부모님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이 원리입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님 때문에 내려놓는 짐이 있고 예수님위해 지는 짊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은 예수님 때문에 짐을 내려놓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위해 짐을 질 때도 동일하게 행복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받는 위로 때문에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때문에 더 행복합니다. 희생을 배우지 않으니까 더 큰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최근 나온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의 경우입니다만, 기독교인 대 비기독교인의 이혼률이 27%24%랍니다. 기독교인이 더 많은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입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자료를 보면 전체 이혼상담자의 27%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불교인은 10%, 천주교는 8%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무종교인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이혼률이 월등하게 높습니다. 그러나 종교인중에서는 기독교가 가장 높습니다. 왜 그럴까? 제가 생각해 보았더니 이런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배우자로 인해 받을 유익만 바라고 그로 인해 받을 희생과 손해는 싫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마디로 사랑에 희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 감정이 되었습니다. 받기만 바랍니다. 주기는 싫어합니다. 조금만 고난이 와도 그만 두자고 말합니다. 상대방에게 짐을 떠 맡기면서도 상대방을 위하여 짐을 지기는 싫어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교인이 상대적으로 많이 교회를 떠날까요? 교회에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교인입니다. 교회안에서 봉사하고 섬기지 않은 교인입니다. 교회안에서 섬기고 봉사하지 않으면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선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은 받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줄 때 오고 섬길 때 옵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니까 기쁨이 자라지 않습니다. 둘째 봉사하지 않으니까 친구가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없습니다. 셋째 따라서 소속감이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정이 없습니다. 교회 여기 저기에 손때를 묻혀야 하는 데 손님처럼 왔다가 손님처럼 갑니다. 믿음도 안 자라고 내 교회라는 생각도 안듭니다. 그러다 어떤 일이 있으면 미련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봉사해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를 도우려고 지게를 지고 따라 나섰습니다. 냇가를 건너는 데 돌이 반질 반질합니다. 지게를 지고 건너면서 빠지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약간 무거운 짐을 졌더니 발에 힘이 생겨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인생을 가볍게 사는 것만이 안전한 것은 아니다”. 어떻습니까? 새해에는 봉사하지 않겠습니까? 새해에는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뿐 아니라 예수님께 드리는 은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받았으니 섬기고 봉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넌센스 퀴즈가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오래 하다가 드디어 빛을 본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은 심봉사입니다. 오래 봉사하면 심봉사처럼 빛을 본다는 말입니다. 은혜받으면 일합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은혜는 더 커집니다.

 

예수님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축복을 주실까요? 축복은 마지막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일꾼들이 일을 다 마치자 품삯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부르는 이름의 순서가 다릅니다. 보통은 먼저 온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주인은 어찌된 일인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부릅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은 오후 5시에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1데나리온을 줍니다. 순간, 먼저 온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우리가 먼저 왔는데 늦게 온 사람부터 돈을 주다니?, 그러면 일찍 온 우리에게는 돈을 더 주는가?”. 그런데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받아보니 똑같이 1데니리온입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20:12, “나중에 온 이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말은 거칠었고 감정은 상해 있었습니다. “왜 일을 적게 한 사람과 많이 한 사람을 똑같이 취급합니까? 맨 나중에 온 사람은 1시간 일하고 우리는 12시간 일했습니다. 어떻게 1시간 일한 사람과 12시간 일한 사람과 같습니까? 이것이 계산에 맞는 것입니까?” 먼저 온 사람들은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그때 주인이 말했습니다. 20:13,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인은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0:14-15,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일찍 온 사람은 늦게 온 사람이 자기와 똑같이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항의했지만 그것은 주인의 뜻을 대단히 오해해서 온 것입니다. 주인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게 주는 것, 그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시나요? “내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풍성하게 주는 것”, 일을 많이 했으면 많이 한 대로 적게 했으면 적게 한 대로 풍성하게 주는 것, 있는 대로, 있기만 하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일을 잘 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능력입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 그 힘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일, 그것만 하면 신나는 일, 둘째 그 일을 해도 잘하는 일, 나도 만족하고 남도 잘한다고 하는 일, 셋째 열매가 있는 일, 그 일을 하면 성과가 있고 열매가 있는 일, 그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누구나 은사가 있고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안에서 잘할 수 있는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내가 잘 못해도 사명이기 때문에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8:2를 말합니다. 내가 잘 할 일 80, 내가 잘 못해도 협력해서 할 일 20,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갑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은 소명의 사람입니다. “소명이란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일입니다. 교회안에서나, 교회밖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