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8-25 2012.12.16(일)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성탄절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성탄절 선물을 받아 보았습니까? 선물은 아무 때나 좋지만 성탄절에 주고 받는 선물은 더 뜻깊고 좋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성탄절 꽃을 보냈습니다(사진1). 저는 아무 것도 못 보냈는 데 “참 부지런도 하다” 생각했습니다(사진1). “포인세티아”라 부르는 성탄절꽃이었습니다. 그 꽃에 “성탄의 기쁨이 목사님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교인중의 한 분이 최근에 좋은 성탄절 선물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무슨 선물이냐고 했더니 옛날 고등학교 선생님한테 온 선물이랍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때 담임선생님이 “너희들 20년후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니? 대학가는 데만 신경쓰지 말고 20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라. 그래서 숙제를 내는 데 20년 후에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쓰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썻는 데 며칠 전에 20년만에 그 편지가 도착해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그때 꿈꿨던 자신의 20년전의 모습에 비해 지금 제대로 못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반성하고 또 그 편지를 20년씩이나 간직했다가 보내준 선생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왔답니다. 그러면서 올 성탄절은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성탄절 선물 하면 또 생각 나는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김우수씨, 본명은 한윤학씨입니다. 이 사람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12년간 기부하는 삶을 실천하다가 작년에 하나님 나라 간 사람입니다(사진2). 그런데 그는 사실 기초생활수급자에 뇌졸중을 앓아 오른쪽 눈을 실명했고, 왼 팔과 다리는 마비되어 정부 보조금 월 23만원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고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다며 보조금의 1/10을 털어 매월 2만원씩 기부했습니다. 그 2만원도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전해 줍니다. 그의 선행이 알려져 최수종씨가 주인공인 <철가방 우수씨>로 영화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물을 받은 사람마다 그를 잊지 못하며 일생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면 감사했습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여러분은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선물을 주고 받든지 여러분이 이미 받은 최고의 선물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인류의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눅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다같이 “너희를 위하여”, 선물은 누구 누구를 위해 주는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준 하나님의 최고 선물이라고 믿습니까? 그 선물은 오늘 여러분을 위하여 주신 선물임을 믿습니까? 그러면 묻습니다. 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최고의 선물입니까? 왜 그 많은 선물중에서 예수님이 최고의 선물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보통 유대인은 두 가지 과정을 통해 결혼합니다. 하나는 약혼이고 다음은 결혼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약혼은 보통 신부집에서 했고 결혼식은 신랑집에서 했습니다. 약혼과 결혼 사이의 기간은 보통 1년쯤 됩니다. 약혼을 할 때 신랑은 신부에게 몸값을 줍니다. 성경에 보면 창34:12절에서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큰 빙물과 예물을 주고 결혼하자고 말합니다. 이것이 몸값입니다. 창29장에서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14년을 일합니다. 야곱은 돈이 없으니까 몸으로 때운 것입니다. 몸값을 지불하면 법적으로는 부부가 됩니다. 나머지 1년은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같이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식때까지는 각자 삽니다. 그러나 같이 살지 않아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약속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약혼만 해도 서로 남편이요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같이 살지 않았는 데 어느날부터 마리아의 배가 불러 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와 약혼한 여자가 어느날 자기와 상관없이 임신했다면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구나 유대사회는 엄격한 율법사회 아닙니까? 율법에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결혼전에 간음했다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지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요셉과 마리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얼마나 속으로 힘들었겠습니까? 요셉의 고통의 흔적을 19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그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지금도 나사렛에 가면 요셉교회가 있고 그 교회안에 작은 스테인그라스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사진3). 한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목을 보면 “요셉의 고민”입니다. 얼굴을 숙이고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무엇인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 율법에 의해 곧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의 결혼이 곧 파탄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 고통이 그를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다시 19절입니다. 마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조용히 해결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피차 떠들어 봐야 좋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물을 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은 붙잡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있습니다. “사랑은 놓아주는 것이다”. 우리는 붙잡은 사랑에만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놓아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요셉을 마리아를 놓아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그것을 요셉이 의로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의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통은 “옳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옳다고 믿는 생각이나 가치관, 그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의”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 볼 때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볼 때 의로운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적 의”라고도 합니다. 내가 볼 때 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볼 때 옳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의인들이 나옵니다. 욥도 동방의 의인이었고 노아도 의인, 세례요한도 의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한번도 실수하지 않고 죄가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훈련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훈련,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는 훈련, 사람의 눈, 율법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마리아는 불쌍하고 안됐고 한번 용서해주고 싶습니다. 차라리 내가 손해보고 말고 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하나님의 눈으로 마리아를 용서한 것은 잘했는 데 요셉에게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임신을 당연히 인간적으로 이해한 한계입니다. 요셉이 용서한 것은 마리아의 임신이었습니다. 임신이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요셉은 생각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면 당연히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죄악이지만 이번에 내가 모른 척 하고 지나가자. 그러면 둘이 다 산다“. 요셉은 마리아의 실수를 당연히 전제하며 그것을 용서한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 쉽지 않았지만 그때 요셉은 한번 더 물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왜 임신했으며 어떻게 임신했는가?“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요셉은 그날밤에 천사를 통해 듣습니다. 20절입니다. 마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그날 밤 전혀 상상하지 못할 말은 들었습니다. 자기는 “마리아가 어떤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실수로 임신할 줄로 알았는 데, 그래서 내가 힘들지만 거기까지는 용서하려고 했는 데, 뭐, 성령으로 잉태?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할 수 있는가? 임신은 남자와 여자로 되는 것인데, 성령? 이상하다. 무슨 말인가?“.
여러분, 여기에 인간적 사고의 한계가 여기 있습니다. 요셉은 잘못을 범한 마리아를 용서해주려고 했는 데 하나님은 마리아의 임신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임신이 인간적 결합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볼 단어는 “잉태”와 “출산”입니다. 20절에 “잉태”란 말이 나오고 21절에 “낳았다”, “출산“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두 단어는 우리 말로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르게 씁니다. “잉태했다”는 말은 “에쿠사”, 이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씨가 사람속에 들어갔다는 말이고, “낳았다”는 말은 “에테케”, 눈에 보이는 아기가 사람으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잉태했다”가 사람 몸속에 생명이 들어간 것이라면 “출산”은 속으로 들어간 생명으로 인해 아기가 나온 것입니다. “잉태”는 생명의 근원을 말하는 단어라면 “출산”은 생명의 탄생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어떤 탄생이 먼저입니까? 잉태가 먼저입니다. 먼저 “잉태되고”, 다음에 “낳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태어날 때 밖으로 낳는 상태만 봅니다. 그래서 “아들이다, 딸이다, 쌍둥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 몸에 들어갔느냐입니다. 보통은 여자 몸속에 남자의 생명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똑같은 사람이 태어났지만 들어간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몸속에 하늘의 생명이 들어간 것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생명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마리아에 대한 카톨릭과 개신교의 계속적인 논쟁이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녀라고 말하고 개신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만 동정녀였고 그 이후에는 보통 여자였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예수님 동생이름이 적어도 4명은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마리아가 평생 동정이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어떻게 낳았느냐가 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믿음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지 않고 보통 사람과 똑같이 태어났다면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을 수는 있지만 부활하지는 못합니다. 어쩌다 부활한다 해도 승천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시니 우리와 똑같은 인과율의 지배를 받습니다. 생노병사, 살고 죽고 병들고 늙는 것이 우리와 똑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시시니 우리 죄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부정모혈, 인간의 씨와 피를 받았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하늘의 생명을 받았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 선물이다”. 아멘.
하나님이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날 밤 천사는 요셉에게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말한 후에 한 가지를 더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천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과 함께 또 한 가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도 요셉은 이해하기 힙들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요셉이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말은 요셉이 유대인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하나님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신6:4절에 나옵니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아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니”. 유대인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만 세 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같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 다릅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유대인의 믿음입니다. 만일 사람이 될 수 있는 신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신의 본질이 바뀔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처럼 고통당하거나 죽지 않는다. 어떻습니까? 이 셋중에 우리와 공통된 것이 무엇입니까? 한 분 하나님 신앙, 유일신 신앙, “하나님은 한 분이다“. 그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거나 인간이 된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거나 십자가에 죽었다거나 하는 것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속에 들어오지 않고 인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지. 인간속에 들어오지 않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지.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신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이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은 하늘에만 있습니다.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입니다. 유대인이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5:2,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너는 땅에 있슴이니라”.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사람은 땅에 있고, 사람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하나님은 땅에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리스의 신화 제우스도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는 거기서 12주신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립니다. 그런데 이 세상 종교중 유일하게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신앙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땅에 오셨다”. 빌2:5절 이하를 아십니까? 빌2:5-7,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그가 본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비웠습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웠습니다. “본체”와 “형체”는 다릅니다. 본체는 그대로 있고 형체만 바꿧습니다. 이것을 “겸비,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를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이 말의 본래 “구부리다, 굽히다”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본래 구부리는 것입니다. 은혜는 은혜받은 자가 구부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 베푼 자가 구부립니다. 그래서 반하우스라는 성경학자가 말했습니다. “위를 향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 예배요, 옆을 향해 허리를 굽히는 것이 사랑이라면 아래를 향하여 허리를 굽힌 것이 은혜다”. 은혜는 아래를 향해 허리굽히는 것입니다. 은혜는 은혜받은 사람이 허리를 먼저 굽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베푼 사람이 먼저 허리를 굽히는 것입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다윗 왕에게 허리를 굽힌 것이 아니라 다윗이 먼저 원수의 손자에게 허리를 굽혔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허리굽히기 전에 아버지가 달려가 탕자를 허리 구부려 아들을 안았습니다(사진4). 이 그림은 네델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비유”그림입니다. 아버지를 보십시오. 온 몸을 구부려 아들을 안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누가 먼저 허리를 구부립니까? 언뜻 볼 때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허리를 구부립니다. 아침 마다 “아버지,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직장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인사합니다. 설날이 되면 자식들은 허리를 굽혀 부모님께 세배합니다. 그러나 제가 자라서 부모가 되어 보니까 허리를 굽히고 사는 자식이 아니라 부모였습니다. 누구의 말대로 세상에 못해 먹을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처럼 할 말 못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처럼 가슴 졸이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어쩌다 자식들에게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자식들을 토라져서 집을 나갑니다. 그러면 “명철아, 경숙아” 부르면서 찾으러 갑니다. 그래서 찾으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엄마가 잘못했다. 집으로 가자”하고 사정해서 집으로 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중에 누가 허리를 굽혀야 합니까? 사람입니다. 그런대 언제나 허리를 굽히는 쪽은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향해 돌로 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갑자기 몸을 굽혀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8:6,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몸을 굽히사”. 몸을 굽혀야 하는 것은 유대인들,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몸을 굽힌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만 몸을 굽힌 것이 아닙니다. 병자를 고치시려고 몸을 굽히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고 굽히셨습니다. 겟세마나 동산에서 기도하시려고 몸을 굽리셨습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를 지시려고 몸을 굽히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분이 이 성탄절 날 우리를 위해 몸을 굽히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여인의 태중에 몸을 굽히시고 베들레헴의 작은 말구유에 몸을 굽히셨습니다. 몸을 굽히고 우리가운데 오신 하나님, 그래서 그 분이 우리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셉이 천사의 말을 듣고 있을 때 천사가 마지막 말을 했습니다. 23절입니다.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임, “함께”, “누”, 우리와. “엘”,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God is with us”.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자기 몸을 굽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결국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온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I will be with you. 이 말이 366번 나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신다는 말이 몇 번 나온지 아십니까? 바울이 쓴 13권의 서신에 216번 나옵니다. 요한복음만 26번 나옵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안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미국의 어느 가정 이야기를 듣고 은혜받았습니다. 미국의 한 가정에 테일러라는 딸을 둔 엄마가 있었는 데 열 세살에 스키타다 사고나 죽었답니다. 너무 갑자기 죽어 믿을 수 없었지만 죽은 것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테일러의 반에 원터스란 친구가 있었는 데 이 아이는 심장이 안 좋아 급히 심장이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테일러 엄마는 어차피 딸이 죽었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심장을 주자 하고 그 친구에게 심장을 이식해 주었습니다. 드디어 수술이 마친 날, 엄마는 원터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청진기로 원터스의 심장 뛰는 소리 좀 들을 수 있어요?” 의사는 청진기를 원터스의 가슴에 댔습니다. 그 순간 심장 뛰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엄마가 소리쳤습니다. “아, 들려요. 선생님, 딸의 심장소리예요. 비록 원터스안에 태일러가 있어요. 몸은 원터스인데 심장은 테일러예요. 테일러가 살아 있어요”. 그렇습니다. 몸은 달라도 그것은 딸의 심장이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아,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를 믿는 자의 심장에 살아 계신다. 그를 따르는 자들의 삶속에 살아 계신다. 그는 안 계시지만 지금 살아 계신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깨달았습니다.
금주에 나온 책중에 제 눈을 끄는 책이 있습니다. “미아리 서신”이라는 책입니다(사진5). 이 책은 소위 “택사스”라고 불리우는 미아리 집창촌에서 20년째 약국을 하는 한 성도가 쓴 책입니다. 자기가 어릴 때 태어난 그곳에 약사가 되어 들어온 이미선씨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일어나면 싸우고 먹고 마시고 소란한 그곳에서 그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동네 중심에 있는 약국에 하루에도 수없는 사람들이 찾아 오는 데 이미선씨는 거기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 중에 유난히도 빨갛게 바른 입술과 진하게 바른 무지갯빛 아이새도가 반짝이는 여성이 하나 있었습니다. 언제나 스팽글이 많은 옷을 입고 다녀서 별명을 반짝이 이모라고 붙였습니다. 그가 술에 취해서 약국에 오면 늘 술 깨는 약을 달라면서 이렇게 푸념합니다.
“나 집에 가면 누워 있는 엄마 기저귀도 갈고 목욕도 시켜야 해. 내가 가야 요양보호사가 퇴근하거든. 예쁜 내 새끼 사진 보여줄까? 딸꾹. 나는 이렇게 쓰레기같이 살아도 우리 딸은 약사언니가 나왔다는 그 대학 다니고 있어. 딸꾹. 예전엔 쫙 깔렸었지. 내가 나이트에 떴다 하면 내 손 한번 잡아보려고 줄 선 사내들이”. 가난이 죄라고 가난 때문에 병든 어머니 때문에, 대학 다니는 딸때문에 미아리에서 일해야 하는 자신을 향해 그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하도 안돼서 이미선씨가 교회 다니라고 말하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나도 제발 교회라는 데를 가보고 싶어요. 하나님도 만나고 싶어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면 평안해지고, 교회 노래를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져요. 근데 아무도 나에게 교회 가자고 한 사람이 없어요. 머쓱하게 혼자 가기는 좀 그렇잖아요? 약사 이모가 나 좀 교회로 데려가 줄래요? 그럼 정말 좋겠어”.
그래서 정말 약속했습니다. 같이 교회가기로. 같이 교회에 가기로 한 날, 반짝이 이모는 예배시간보다 훨씬 먼저 나와 이미선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옷차림도 얌전하고 화장도 평소보다 약하게 한 그녀의 얼굴에서 어떤 기대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둘이 꾸준히 교회 다니다 몇 달 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받은 날, 둘은 서로 끌어 안고 울었습니다. 지나간 인생이 슬퍼서 울고, 자기같은 죄인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울고, 나같은 죄인이 작은 약국을 하면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남을 도울 수 있슴에 감사해서 울고, 임마누엘, 그것이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미아리 반짝이 이모 하나 일까요? 이 세상에 사는 누가 하나님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사람 누가 외롭지 않으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 누가 고통스럽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약하기 때문에 강한 분이 필요합니다. 아프기 때문에 강건한 분이 필요합니다. 슬프기 때문에 기쁘게 하실 분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는 임마누엘입니다. 그 분이 이번 성탄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찬송을 좋아합니다.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오 주여 오소서”. 본래 이 노래는 흑인 영가입니다. 흑인들의 애환과 함께 임마누엘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같이 해 보겠습니다. (여기 오소서. 내 주여).
'추천 설교 > 이윤재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8:1-10(송년주일) 난 꿈이 있어요 2012.12.30(일) (0) | 2017.01.25 |
---|---|
눅2:1-7, 요6:53-55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2012.12.23(일) (0) | 2017.01.25 |
믿음의 길(7) 마20:1-16 은혜로 살고 은사로 일하고 2012.12.9(일) (0) | 2017.01.25 |
믿음의 길(6) 행2:42-47 2012.12.2(일) (0) | 2017.01.25 |
믿음의 길(5) (요21:15-19) 2012.11.25(일) 내 양을 먹이라 (0) | 2017.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