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1-7, 요6:53-55 2012.12.23(일)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오신 성탄주간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이요 인류 최고의 날입니다. 어떤 경상도 할머니 한 분이 미국에 놀러 갔답니다. 오랫만에 외출해서 버스를 기다리는 데 버스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 할머니 한 분도 옆에서 차를 기다렸습니다. 이때 멀리서 버스 한 대가 왔습니다. 경상도 할머니가 너무 반가와 “왔데이” 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할머니가 그 말을 듣고 “What day? 무슨 요일이냐고?” 하면서 “먼데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경상도 할머니가 그 말을 듣고 “아니 버스왔는 데 버스도 모르나?”하면서 “뻐스데이”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미국 할머니가 듣고 “버스데이, 생일?” 그러면서 한국 할머니에게 생일축하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말합시다. “왓데이”, “먼데이”, “버스데이”. 성탄은 예수님의 버스테이, 생일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태어났고 그나마 구유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7절을 볼까요? 눅2: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어떻습니까?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하필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을까?”. 말구유는 나귀가 꼴을 먹는 곳 아닙니까? 왜 하필 방이 아니고 말구유입니까? 지금도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이 태어난 곳에 말구유가 있습니다(사진1). 물론 예수님 시대의 말구유는 아니고 후에 그 자리에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왜 말구유입니까?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 한 칸에 살았고 나귀는 바로 옆방에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노새와 나귀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생업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농부들은 나귀나 노새를 자기 방 옆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문만 열면 나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같은 방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나귀는 순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절 말씀대로 로마 황제가 모든 로마 영내에 사는 사람들은 호적하라 명하자 예수님의 부모도 자기들이 사는 나사렛을 떠나 선조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80킬로, 요즘같으면 차로 한 시간이면 갔겠으나 그때는 나귀를 타고 갔고 길도 험해서 아마 며칠은 걸렸을 것입니다. 겨우 베들레헴에 도착했으나 방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작은 여관이었고 그나마 방이 없어서 간신히 나귀가 매어 있는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잠시 몸을 쉬고 있었는 데 갑자기 마리아가 산기가 있어 급히 예수님을 낳았는 데 그곳이 구유입니다. 여러분, 구유가 무엇입니까? 말이나 나귀가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태어날 때 왜 하필 그 많은 장소중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그나마 구유입니까? 작년에 제가 베들레헴에 가서 소위 “보아스의 들판”을 가보았습니다. 베들레헴 근교에 위치한 이곳에 한국 선교사가 선교관을 짓고 있었는 데(사진2) 그 지역이 바로 유명한 보아스의 들판이었습니다(사진3). 과거 이 지역에는 많은 보리와 밀을 재배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룻이 보아스의 들에서 보리이삭을 줍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아곳이 경기도 이천처럼 좋은 쌀이 나서 왕에게 진상했던 곳입니다. 여기서 난 밀이나 보리는 이스라엘 최고의 곡식이었고 그것으로 만든 빵은 이스라엘 최고의 빵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름도 베들레헴인데 이 말은 “벧”=집, “레헴”=빵, 그래서 “빵집”이란 뜻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베들레헴에서 난 밀, 보리가 이스라엘 최고의 곡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태어날 곳으로 구약시대의 미가는 베들레헴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2:6,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여기에 “베들레헴 에브라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베들레헴은 지명이고 에브라다는 그 말을 수식하는 형용사입니다. “에브라다”란 말은 “프리”, “과일, 열매”란 말에서 나왔는 데 이 말이 형용사로 쓰이면 “풍성하다. 번성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베들레헴 에브라다”란 말은 “풍성한 베들레헴”이란 뜻입니다. 우리 나라도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분명해졌습니다. 에수님이 밀과 보리로 풍성한 베들레헴, “빵집”에서 태어난 것도, 나귀가 꼴을 먹는 구유에 태어난 것도 이 한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입니다.
예수님이 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나? 예수님은 왜 하필 구유에서 태어나셨는가? 답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으로서 사람속에 오셨습니다. 말구유같은 냄새나는 죄인속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죄인속에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왜 빵이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빵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밥없이는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빵을 주식으로 먹습니다. 거리에서 가장 많이 파는 것이 빵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빵이 “피타 빵”입니다(사진4). 주머니처럼 생겨서 일명 “주머니 빵”이라고도 부릅니다. 주머니안에 올리브나 치즈, 과일조각을 넣고 그것을 빵과 함께 먹습니다. 보통 여행할 때도 빵 하나에 물 한병을 들고 갑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가장 큰 문제가 먹는 문제 아닙니까? 빵의 문제는 우리에게 심각하고도 중요합니다. 세상은 온통 밥달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남한동포들은 IMF보다 더 한 경제난 때문에, 북한동포들은 아예 먹을 것이 없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누가 이 굶주린 세상에 밥을 줄 수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이 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 가지 노력이 해왔습니다. 영어 M자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것을 3M이라고 합니다. 첫번째 M, 맬서스주의입니다. 맬서스주의는 식량증가를 막기 위해서 인구를 줄이는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구가 감소하면 식량은 조금 남지만 그렇다고 식량자체가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는 M. 마르크스주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모순때문에 가난이 생겼다고 하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없는 평등한 나라를 꿈꿉니다. 그러나 그들의 평등은 모두를 잘 먹고 사는 나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다 못먹고 사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세 번째 M은 mission.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밥이 되는 것입니다. 멜서스주의는 인구를 줄여 먹을 것을 아낍니다. 공산주의는 부자들 것 빼앗아서 가난한 자에게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밥으로 줍니다.
예수님은 밥이 되려고 성탄절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밥먹기를 좋아하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잡수셨고 사마리아 여자와 함께 드셨습니다. 그는 어부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먹는 밥상입니다. 함께 먹어야 구원이고 함께 먹어야 행복입니다. 지금 세계가 이토록 가난한 것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아니라 혼자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 토지의 60%를 6%의 재벌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국제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남미의 지주 1.3%가 전체 토지의 71.7%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경제민주화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12억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살고 16억이 2달러 미만으로 삽니다. 매일 3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고 1,300만 명이 예방 가능한 전염병과 질병으로 매년 죽습니다. 그렇다고 세계에 먹을 것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소위 “구명 보트의 윤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자 혹은 부자 나라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안된다는 이유를 제공하는 이상한 윤리입니다. 자, 여기에 구명 보트가 있습니다. 구명 보트는 바다 한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어갈 때도 이 구명보트는 살아야 합니다. 아무나 살리다가 구명보트마저 전복되면 다 죽습니다. 어차피 구명보트로 다 살리지 못한다면 구명보트는 살아야 합니다.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면 그나마 구명보트도 뒤집힐 것입니다. 이 그럴싸한 이론은 가진 자, 가진 나라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도와주지 말아야 하는 이론으로 작용했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 “구명보트” 이론에 대하여 물으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우선 나부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실까요? 아닙니다. 그는 단 한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자신부터 희생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요6:5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주기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과 살과 피는 우리를 위한 하늘의 만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물과 흘리며 죽었습니다.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성찬의 밥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고전12:23-2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여기에 예수님이 자기 몸을 주신 네 과정이 있습니다. “잡으시고(take)-축사하시고(bless)-떼어(break)-주시다(give)”. 예수님이 빵을 잡으시고 떼어 우리에게 성찬을 주신 과정은 곧 그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신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해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떼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잡으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성탄절에 베들레헴 떡집, 말구유의 밥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의 떡을 먹는 곳입니다.
자, 예수님이 생명이 떡이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 떡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았습니다. 왜 잡았습니까? 먹기 위해 잡은 것입니다, 출12장 8절 이하에 그 날 밤에 잡은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이 되기까지 불에 구어 굽히 먹어야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시내산 밑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출18:12절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다같이 “떡을 먹으니라”. 시내산앞에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앞에서 먹었습니다. 그때 먹은 사람들의 명단을 성경이 강조한 바를 따라 다시 보십시오. 12절,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앞에서 먹으니라”. 시내산에서 떡먹은 사람들은 주로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보다 지도자들이 시내산에서 먹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성경은 그때 떡을 먹은 사람들이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라고 강조하고 있을까요? 영적 능력은 먹는 데서 옵니다. 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먹어야 힘이 나고 먹어야 일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은 하나님앞에서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사사기에서 삼손이 낸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삿14:14,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답은 죽은 사자에게 있었던 벌꿀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교회안에서 더 큰 직분을 받은 분들, 여러분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먹습니까? 왜 교회에서 일하다 지치고 피곤하고 시험드는지 아십니까?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에 몰두하여 하나님을 멀리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직분받기 전과 직분 받은 후 언제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왔습니까? 작년하고 올해를 비교해 보십시오. 언제 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먹었습니까? 그런데 일은 그때보다 더 많이 하지 않습니까? 책임은 더 커지지 않았습니까? 먹지 않으면 무슨 힘으로 일합니까? 먹는 힘으로 일해야 합니다. 시내산 가까이 바짝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더 많이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고 그래야 일합니다.
그러다가 성막이 지어지고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성전에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양이나 소를 잡고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번제, 속죄제, 소제 이런 제사는 그것을 드린 사람과 제사장이 함께 먹습니다. 화목제는 동물을 잡은 후 모든 백성이 함께 먹습니다. 동물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소제는 고운 밀가루입니다. 밀가루도 먹었습니다. 레위기에 자주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먹고, 먹으라, 먹을찌니”. 먹는 말입니다. 제사는 동물을 잡고 먹는 것입니다. 먹어야 제사요 함께 먹는 것이 곧 예배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상21장에 나옵니다. 다윗이 불레셋에게 추격받을 때 이야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사울에게 쫓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불레셋에게 쫓기고, 이것을 “내우 외란”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고민하다가 결국 놉땅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로 피신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놉땅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곳에 도착했는 데 아히멜렉 재사장이 나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말했습니다. “제사장님, 제가 너무 시장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저에게 먹을 것 좀 주세요”. 그런데 성소에는 하나님께 드릴 진설병밖에는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한 떡 12덩를 매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을 “진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제사장은 그것을 다윗에게 주었고 다윗은 그것을 먹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소에 있는 떡을 진열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있다는 말입니다. 성전에 떡이 있다는 사실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목사님 설교가 참 좋아”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참 많아” 그것이 충분치 않습니다. 먹어야 합니다. 쇼윈도우에 진열된 떡은 그림의 떡입니다., 먹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윗이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의 떡을 먹는 곳입니다.
말씀 보시겠습니까? 요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다같이 “먹으면”, 요6장 49절에서 59절까지, 10절사이에 “먹는다”는 말이 무려 10번이나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먹으라. 먹고, 먹으면”, 53절을 또 보십시오. 요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교회는 한마디로 먹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먹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설교요 성경공부요 큐티요 훈련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성찬이요 미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들리는 예수님의 생명이요 예수님의 몸은 보이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개신교는 예수님의 말씀을 더 좋아하고 카톨릭은 보이는 예수님의 몸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하나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계10:9-10이 중요합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달리라 하거늘”.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가운데 하나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갖다 먹어버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면 머리에 남지만 먹으면 배에 남습니다. 요7:38절에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 했습니다. 머리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지 않습니다. 배에서 흐릅니다.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머리는 키우지만 생명은 되지 못합니다. 성경을 “사용”하는 것과 성경을 “수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용은 나를 위하여 성경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대부분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습니까? 시내산에서 아론과 장로들처럼, 놉에 있는 성소에서 다윗처럼,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몸을 생명으로 먹습니까?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난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이 매일 여러분의 생명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떡을 공급하십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메시지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떡을 공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한 해동안 힘 많이 드셨죠? 직장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새로 시작한 사업의 부진으로, 예전과 같지 않은 경기침체로 힘드셨죠? 베들레헴이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레헴”이 “떡”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은 “라함”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싸우다, 전투하다”라는 뜻입니다. 왜 “떡”이 “싸우다”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까? 빵을 얻으려면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워야 빵을 얻습니다. 빵을 얻기 위해서 싸우고 그것을 또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이 “싸우다”라는 말이 명사가 되면 “밀하마”가 됩니다. 이 말은 ”전쟁“이란 뜻이 됩니다. 왜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사실 빵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이런 저런 이유가 있지만 사실은 빵 때문에 전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전쟁하듯이 살아야 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망하는 길입니다. 살후3:11-12절입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가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앙식을 먹으라 하노라”. 정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일한다고만 물질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물질과 무관한 분이 아닙니다. 시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아의 것이로다”.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이실 때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요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다같이 “원대로 주시니라”. 여기서 “원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대로 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세상은 능력대로 주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주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필요한 만큼 공급받은 것을 아십니까? 출16: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 마다 거둘 것이라”. 다같이 “비같이”. 비는 하늘에서 내립니다. 비는 하나님이 주고 싶을 때 주십니다. 가끔 장마도 지고 가물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하나님은 필요한 만큼 주십니다. 비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사람이 매일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만큼 그마나 선물로 주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에게 말했습니다. 마20:14-15,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풍족하게 주는 것, 안주시는 것이 그의 뜻이 아니라 주시는 것이 그의 뜻입니다. 그나마 풍족하게 필요한 만큼 주시는 것이 그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풍족하게 주실 것을 믿습니까? 이 성탄절에 베들레헴, 떡집 말구유에 동물의 밥으로 오신 주님, 예수님이 생명의 밥입니다. 그의 생명을 날마다 먹으십시오. 영적인 양식뿐 아니라 육적인 양식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2천년 전,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영적, 육적 생명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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