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8:1-10(송년주일) 2012.12.30(일)
난 꿈이 있어요
한 해를 마치는 송년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 어떻게 지내왔는지 꿈만 같습니다. 영국의 희곡작가 버나스 쇼의 무덤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줄 알았지”. 우물쭈물하다 보니 1년 지났습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지만 한 해동안 우리 삶을 지탱했던 가장 큰 힘이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희망”이요 “꿈”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의 원동력은 “꿈”이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으리라는 희망, 오늘은 안 됐지만 내일은 잘 되리라는 기대, 오늘 실패했지만 내일 성공하리라는 소망,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꿈”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한 해동안 여러분의 꿈을 이루셨습니까? 어느 만큼 꿈을 이루셨습니까? 100% 이루셨습니까? 50% 이루셨습니까? 아니면 거의 이루지 못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둘 있다. 하나는 소원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소원을 다 이룬 사람이다”. 소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불행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다 이루었다고 행복할까요? 다 이루었으니 더 이룰 소원이 없지 않습니까? 다 이루었으니 게으르고 나태하지 않겠습니까? 둘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불행하겠습니까? 다 이룬 사람이 더 불행합니다. 이루지 못한 사람은 이룰 꿈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 이루었으니 무슨 희망으로 살겠습니까? 개인이나 국가나 언제나 타락은 번영의 시대에 옵니다.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은 언제나 결핍과 이루지 못한 꿈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에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인간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인간이 오손도손 사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꿈이 깨진 사건이 생겼습니다. 죄였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꿈도 깨지고 에덴동산도 깨졌습니다. 꿈이 없는 땅은 가인과 아벨의 살인으로, 노아 홍수로, 바벨탑으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다시 한번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세계가 복을 받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창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꿈은 이삭, 야곱, 요셉, 4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꿈이 시련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린 것입니다. 시련은 길었습니다. 430년이나 애굽에서 종살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은 시련속에서 계속되었습니다. 그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꿈은 애굽의 바로도 홍해바다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호렙산 떨기나무에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불꽃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이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 말씀한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3: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꿈, 비록 400여년동안 지체되었지만 내가 다시 시작하려 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한 꿈, 너를 통해 이루려고 한다. 그러니 이제 백성들을 데리고 홍해를 건너라. 그리고 광야를 건너라.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라. 그곳은 내가 일찍이 아브라함을 통해 꿈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전수받은 모세는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났습니다. 길고 긴 광야를 거의 지나 이제 멀리 가나안땅이 보이는 요단강가에서 하나님은 다시 꿈을 말씀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도 하나님이 꿈꾸시는 위대한 꿈의 한 부분에 있다고 믿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도 그의 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2012년 마지막 주일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꿈의 한 중간지점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처럼 뒤로는 광야를 바라보고 앞으로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뒤를 보고 앞을 보고,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꿈을 이루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 머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꿈을 이루어야 하지 않습니까? 가나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2절입니다. 신8:2,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이 40년동안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남은 꿈은 이루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과거의 실수와 상처를 잘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를 은혜로 치유하라
40년동안 그 척박한 광야를 걸어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힘들고 지쳤겠습니까? 가장 크게 힘들었던 것은 아마도 먹고 사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남자만 60만이니 여자, 아이 합치면 2-3백만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먹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빵 공장이 있어야 했으며 얼마나 많은 음식 수송이 있어야 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물이 있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채소, 고기가 있어야 했습니까? 그런데 광야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고 가도 햇빛만 쨍쨍 비치는 곳, 광야는 정말 힘들고 피곤한 곳이었습니다. 한 해동안 우리가 겪은 고통의 대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의 고통입니다. 취업문제, 직장문제, 사업문제, 먹고 사는 문제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사람이 자살하겠습니까?
광야의 상처는 또한 인간관계에서 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은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이 매일 바뀌지 않습니까? 설령 매일 만나는 사람이라도 싫으면 안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광야는 어떻습니까? 2-3백만이 같이 움직이는 데 성경을 보면 지파별로 움직이고 지파 내에서도 문중별로, 가족별로 움직입니다. 싫은 사람은 매일 만나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리고 상처는 늘 가까운 사람에게서 옵니다. 사실 지난 한 해동안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받은 사람의 90%는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고슴도치의 사랑과 같습니다. 고슴도치는 가깝게 지낼수록 서로 찌릅니다. 추울수록 더 가깝게 다가가고 가깝게 다가 갈수록 더 찌릅니다. 가족이 그렇고 직원이 그렇고 친구가 그렇고 교인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받은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여러 족속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르비딤에서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요르단에서는 에돔족속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모압에서는 발람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대적자, 방해꾼들 때문에 여러번 그들의 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민21: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길로 좇아 에돔땅을 둘러 행하려 하다가 길로 인해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한 해동안 길로 인해 마음이 상했습니까? 가려는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데 갑자기 방해군이 나타나 길을 막았습니까? 대학의 문을 막고 사업의 문을 막고 건강의 문을 막았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상했습니까? 그것이 올 한 해 우리가 당한 고통과 상처입니다. 참 어떻게 이런 고통을 참고 여기까지 왔는지 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이 과거에서 떠나야 합니다. 과거에서 떠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과거는 우리 인생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것, 없어지라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싫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용감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잊어야 할 것은 잊어야 합니다. 그중에 제일 먼저가 잊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의 모든 상처와 아픔은 기억의 창고에서 나옵니다. 학자들은 사람의 기억력이 대략 모태에서 생명이 생긴지 6개월부터 생긴다고 합니다. 태중에 있을 어머니의 고통이 그대로 태아의 기억속에 저장됩니다. 어떤 책에서 마비스라는 여자의 글을 보았습니다. 이 여성은 남의 집에 입양된 대학생인데 그때까지도 자기가 입양된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릴 때부터 자기 아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엄마, 아빠가 잘 해주는 데 왜 아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엄마 태중에 있을 때 아빠가 암으로 죽습니다. 이때 엄마나 너무 너무 슬피 울었습니다. 결국 아빠는 죽고 엄마도 죽어 남의 집으로 입양되었는 데 태중에 있을 때 엄마가 아빠를 위해 슬퍼했던 기억이 태중에 있는 딸의 기억의 창고에 입력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과 고통의 상처를 기억의 창고에 저장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황이 오면 그 기억의 창고에서 상처가 재생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의 창고에 나쁜 것이 저장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태아교육, 유아교육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기억의 창고에 나쁜 것이 저장되지 않게 하거나 아니면 저장된 것을 잘 잊어 버리거나. 어차피 저장되었으면 잘 잊어 버려야 합니다. 컴퓨터에서 쓰레기 버리듯 자주 비워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잊어 버리신다고 말합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잊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처럼 깜빡 깜빡 하는 분입니까? 전능하신 분 아닙니까? 전능하신 분이 어떻게 잊어 버릴 수 있습니까? 컴퓨터에만 입력해도 자료가 사라지지 않는 데 전능하신 분이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그런데도 하나님은 잊어 버리십니다. 능력이 없고 기억력이 안 좋아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잊어 버립니다. 하나님도 잊어 버리시는 데 우리는 왜 잊어 버리지 못합니까? 왜 시어머니가 한 실수를 아들, 딸 장가 보낸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합니까? 왜 같은 교회 교인이 한 실수를 그렇게 오래 기억합니까? 그렇게 오래 기억해서 유익이 무엇입니까? 사43:18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장래 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잊어지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지가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 명령입니다. 잊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잘 잊어버리는 은혜를 받으십시오. 어제 당한 마음의 상처, 밤에 잠자고 나면 잊어 버리는 은혜를 받으십시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상처는 모래에 새기십시오”. 남이 나에게 잘 해준 것은 오래 오래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준 상처는 빨리 잊으십시오.
과거를 치료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용서입니다. 용서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오해는 한번 용서하면 끝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한번 용서했다고 영원히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득 문득 미운 마음이 생깁니다. 그때마다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오해는 내가 용서한 사람이 내 용서의 결과로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달라지건 안 달라지건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한 뒤에도 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 용서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과거가 있지만 과거가 나의 미래를 발목잡게 해서는 안됩니다. 과거를 잊고 용서해야 합니다.
현재를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하라
꿈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 앞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현재입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현재는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40년 광야를 지나면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힘들고 굶주렸습니다. 4절에 보면 의복이 헤어지고 발도 부르텃습니다. 모든 백성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마치 사람이 징계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5절입니다.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을 마음에 생각하고”. 문제는 왜 이렇게 고난을 당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해석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왜 우리는 광야같은 세상에서 고난당하고 있습니까? 내 눈으로 보면 고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눈으로 보면 훈련입니다. “징계”는 곧 “훈련”입니다. 훈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제가 심방을 해 보면 어렵지 않은 가정이 없습니다. 경제가 어려운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는 과정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는 가난할 때 부요하게 사는 훈련이 어렵겠습니까? 풍요로울 때 가난해지는 훈련이 더 어렵겠습니까? 풍요로울 때 가난해지는 훈련이 더 어렵습니다. 차라리 가난할 때 부요하게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사는 훈련이 가난할 때 부요하게 사는 훈련입니다. 어려울 때 잘 참고 견디면 부요할 때 실족하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 인내하고 기도하면 잘 나갈 때 타락하지 않습니다. 훈련과 함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6절입니다. 신8:6, “네 하나님 여호아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경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게 하는 것이 고난의 최종목적입니다. 훈련과 경외,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의 이유입니다.
어떤 치매노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으로 살아온 한 노인이 어느날 성경 구절 하나를 암송했습니다. 딤전1:12절 말씀이었습니다. 딤전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 말씀이 너무 좋아 그는 여러번 읽고 또 읽어 암송했습니다. 몸이 아프고 연약해져도 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늙어가면서 점점 기억력도 사라지고 몸도 쇠약해지면서 이 말씀을 다 암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만 암송했습니다.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러다가 돌아가기 전 마지막 두 주 동안에는 몸과 정신이 모두 쇠약해져서 이 말씀은 다 잊어 버리고 딱 단어 하나만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가”.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부터 그는 그 단어만 거듭해서 중얼거렸습니다. “그가, 그가”. 그리고 그는 숨을 거뒀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 저것 욕심많게 관심하던 것, 고난을 통해 하나씩 둘씩 버리고 딱 하나만 붙들게 됩니다. “그가”. 그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오직 우리의 삶의 그 복잡한 것들, 다 가지쳐 없애고, 단 한 가지에 집중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오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만 붙듭니까? 오늘 말씀 신8:1-10에서 “하나님, 여호아”란 말이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초점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미래의 꿈에 집중하라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미래가 보입니다. 과거가 발목을 잡고 현재의 장애물이 미래를 가로막을 때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은혜로, 현재를 선물로 받으면,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이 됩니다. 7-8절을 보시겠습니까? 신8:7-8,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아름다운 땅”입니다. 여러분중에 이스라엘에 다녀오신 분이 얼마나 되신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에 다녀오신 분은 이 “아름답다”는 말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간 곳마다 바위와 돌이요 날씨마저 덥습니다. 호수라고 해야 갈릴리가 유일하고 숲으로 덮힌 산 하나 제대로 없습니다. 한국같이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살다 이스라엘 가면 절대 아름답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런데 거기 살면 달라집니다. 거기 살면서 오랫동안 바라보면 이스라엘 같이 아름다운 나라가 없습니다. 자연이 아름다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신앙의 발자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습니다. 꿈은 미래를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매사를 보면 아름답습니다. 똑같은 사물도 아름다워 집니다. 꿈은 생각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일치하면 아름다운 생각이 나옵니다. 지금은 돌아간 애플 사의 스티브 쟙스가 애플사가 어려울 때 경영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고민하다가 떠오른 사람이 펩시 콜라의 존 스컬리였습니다. 그를 설득하여 어려운 회사를 맡기려고 뉴욕으로 갔습니다. 맨해튼에서 만나 식사하면서 애플사 경영을 맡아 달라고 스컬리에게 부탁했습니다. 스컬리가 그 제안을 거절할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백만 달러의 연봉과 백만 달러의 보너스와 백만 달러의 퇴직금을 지불하면 하겠소”. 이것은 안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잡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스컬리가 캘리포니아로 온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스컬리는 하더라도 뉴욕에 있으면서 컨설팅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스컬리의 거부의 마음을 안 스티브 쟙스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스컬리, 남은 평생, 설탕물만 팔다가 인생을 마치고 싶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함께 하겠습니까?” 이 말에 스컬 리가 큰 충격을 받습니다. 평생 펩시 콜라 회장으로 설탕물만 팔던 스컬리였습니다. “평생 설탕물만 팔다가 인생을 마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겠는가?” 이 질문은 펴생 그가 하고 있었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펩시를 버리고 애플행을 선택했습니다.
펩시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비전, 어떤 꿈을 가졌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돈을 번다는 것 자체는 비전이 아닙니다. 돈을 어떻게 벌며 어떻게 쓸 것인가가 비전입니다. 7절,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하나님이 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가치가 있습니다. 평생 돈이나 벌다 천국가는 인생이라면 불쌍하지 않습니까? 조금 더 높은 꿈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잘 한다는 것 자체는 비전이 아닙니다. 공부해서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가 비전입니다. 보다 아름다운 꿈이 필요합니다.
꿈은 기적을 낳습니다. 9절입니다. 신8: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은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꿈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꿈은 또 다른 꿈을 낳고 꿈은 우리속에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합니다. 9절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돌과 산의 땅입니다. 쓸만한 지하자원도 없습니다. 그런데 약 100년전에 미국 해군 잠수정이 사해바다를 들어갔습니다. 평소에 소금바다인 이 바다를 사람들은 “사해”, 죽음의 바다, 쓸모없는 바다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잠수정이 들어가 보니까 온갖 보화가 거기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소금, 마그네슘, 철분등으로 온갖 화장품, 의학품 다 만듭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사해바다만 가지고 50년은 먹고 산다고 합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가지면 그 안에 잠재력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히브리어로 “꿈꾸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예체르”라고 하는 데 이 말은 “생각하다. 꿈꾸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야차르”와 같은 단어인데 이 말은 “창조하다. 짓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는 생각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곧 창조입니다. 꿈꾸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예체르가 야챠르입니다.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할 때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그 결과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꿈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창조를 일으킵니다. 비행기를 보십시오. 새처럼 날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있었습니다. 백열전구를 보십시오. 꺼지지 않은 빛은 없을까 하는 우스꽝스런 생각이 먼저 있었습니다. 전화, 누군가 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 자동차, 말이 끌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다닐 수 없을까? 고속도로, 신호등이나 건널목 없이 빨리 달릴 수 없을까? 텔레비전, 편안히 앉아서 세상을 볼 수 없을까? 인터넷, 집에 앉아서 세상과 소통할 수 없을까? 생각이 창조를 낳습니다. 9절, “네가 먹는 것에 모자람이 없고”. 꿈속에 기적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신8: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로다”. 꿈의 특징은 반드시 하나님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이루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이도 하나님입니다. 꿈의 마지막 특징은 “마침내”입니다. 16절입니다. 신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여기에 “마침내”가 나옵니다. 왜 “마침내”입니까? 모든 꿈은 마땅히 대가 필요하며 대가를 지불한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꿈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고 마지막에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실패도 하고 실수도 합니다. 그러나 꿈을 이룬 사람은 실패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첫째 꿈이 있는 사람은 실수는 받아들이나 실패는 거절합니다. 실수와 실패는 다릅니다. 실수는 내가 잘못한 것이고 실패는 잘못한 채로 넘어져 있는 것입니다. 둘째 실패를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원한 실패는 없습니다. 셋째. 실패를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실패는 꿈을 위한 과정입니다. 넷째. 꿈이 있는 사람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 시도합니다. 그래서 시인 바이런은 시집 한 권을 출판하기 전에 99번이나 자기 시를 고쳐 썼답니다. 에디슨도 전구 하나를 만드는 데 110,000번이나 실험을 했답니다. 다섯째 꿈이 있는 사람은 결코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박국2:2-3절입니다. 현대 번역으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 꿈을 새기라. 종이에 적어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알려라. 그 꿈은 내게만 주는 게 아니라 장차 많은 사람들을 위한 꿈임을 기억하라.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목도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잠시 기다려야 할 지라도 포기하지 말라. 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며칠 전 인순이가 부른 노래를 듣고 문득 제 속에 꿈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목은 “거위의 꿈”입니다. 둔탁한 날개를 가진 거위가 파란 하늘을 보고 자기도 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노래입니다.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으로 시작된 이 노래는 후렴에서 이렇게 외칩니다(인순이 노래. 자막).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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