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3:1-9 2013.2.3.(일)
마음의 밭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단어중에서 어떤 단어를 가장 좋아합니까? 저는 “은혜”란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성경의 모든 메시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은혜입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자, 우리가 어느날 어른에게 선물을 받았어요. 그럼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끝에 “다”자 들어가는 다섯 글자로 말해 보세요“. 맨 앞에 있던 경민이가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요“. 중간쯤 앉은 소라가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요“. 그러자 제일 뒷 자리에 앉았던 영구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영구 말해봐“. 영구가 벌떡 일어나 말했습니다. ”뭘 이런걸 다“. 우리가 사는동안 하나님의 은혜없이 사는 날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뭘 이런걸 다“. 다같이 ”뭘 이런걸 다“.
올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푸른 숲입니다(영상). 20년간 사막에 나무심은 중국 여인의 꿈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이 꿈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꿈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처럼 불타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다니엘처럼 거룩한 습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씨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안에 예수님의 생명의 씨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일서5:13은 우리가 점검해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은 여러분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은 살아 있는 생명의 씨입니다. 만일 우리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의 씨가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밭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가 있어도 밭이 없으면 씨가 자랄 수 없습니다. 밭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마음이 밭과 같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에는 마음을 설명하는 많은 은유가 있습니다. 우선 마음은 방과 같습니다. 방에는 안방, 건넛방, 현관, 마룻방등이 있고 큰 방, 작은 방, 깨끗한 방, 더러운 방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굿간, 나귀들이 먹고 자는 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면 우리는 성령이 거하는 방이 됩니다(고전6:19). 마음은 또 성과 같습니다. 성에는 외성, 내성이 있고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습니다. 파숫군은 밤에 성을 지킵니다. 파숫군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마음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성경적 은유가 밭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보실까요? 마13:1-2,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절, “큰무리가 그에게 몰려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있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닷가는 갈릴리의 어디쯤 될까? 제가 재작년 안식월 때 갈릴리호수를 갔습니다. 갈릴리를 두루 돌아보는 가운데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게네사렛에 갔습니다. 이곳이 바로 게네사렛입니다(사진1). 갈릴리 서북쪽에 위치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많이 활동하신 곳, 지금은 키부츠가 되었습니다(사진2). 이 지역은 갈릴리 지역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지역입니다. 바다에서 조금 육지로 나오면 이렇게 비옥한 땅을 볼 수 있습니다(사진3). 보기에도 흙이 검고 비옥해 보입니다. 예수님시대에 이곳에서 군대사령관을 지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지역에 대하여 이렇게 썻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천연적으로 아름답다. 바다의 물은 맑으며 22종의 물고기가 있다. 바다주변에는 호도, 너도, 종려, 감람, 포도, 무화과등 연중 열매를 맺고 풍부하고 깨끗한 샘도 많다. 갈릴리 땅은 노는 땅이 없으며 천하의 게으름뱅이라도 경작하고 싶을 정도이다”(요세푸스, 유대인전쟁사. 제3권, 3장, 1-2절).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밭에는 어떤 밭이 있습니까? 크게 네 종류의 밭이 있습니다. 길가밭, 돌작밭, 가시밭, 그리고 옥토입니다. 이 네 밭은 어떤 모양이고 왜 생겼을까? 이스라엘 가기 전에 저는 무척 궁금했습니다. “왜 밭이 넷일까? 만일 농부가 씨를 뿌려야 한다면 옥토에만 뿌리지 왜 길가에, 돌작밭에, 가시밭에 뿌렸을까? 만일 거기에도 씨를 뿌려야 한다면 길은 파고, 돌은 제거하고, 가시를 베고 씨를 뿌리면 되지 않을까? 왜 농부는 그냥 뿌렸을까?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이 질문은 이스라엘에 도착하자마자 곧 풀렸습니다.
이스라엘 밭은 우리 밭과 다릅니다. 우리는 “논, 밭”하면 곧 김제벌판을 떠올립니다. 굳이 김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밭은 보통 평평합니다. 그래서 농부가 씨를 심을 때 먼저 쟁기질하고 손으로 다듭습니다. 그래야 씨가 유실되지 않고 밭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밭은 계단식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화전민같이 야산을 일궈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을 테라스식 농법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들이 없기 때문에 경사진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감람나무나 포도나무, 혹은 밀이나 보리를 재배합니다. 그래서 돌로 축대나 담을 쌓고 계단을 만듭니다. 돌로 쌓은 계단에는 대개 사람의 손이 가지 않기 때문에 가시덤불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대개 사람이 다니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 개의 밭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본래 돌이 많은 산이기 때문에 돌작밭입니다. 그 옆에 사람의 손이 가지 않기 때문에 가시가 자랍니다. 농사를 위해 사람이 다니기 때문에 길이 있습니다. 그래도 오래 농사를 짓다 보면 그 땅이 옥토가 됩니다. 그러니까 같은 장소에 네 밭이 함께 있습니다. 농부는 되도록 밭의 가운데를 향하여 씨를 뿌리지만 그 씨는 때로 길가에 떨어지고 돌작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밭에도 떨어집니다. 땅이 넓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땅이 좁고 산등성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4절 이하를 보실까요? 마13:4-8,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해하셨습니까?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계단식 밭입니다(사진4). 지형이 평평하지 않고 경사져 있습니다. 거기에 올리브, 무화과, 포도, 밀, 보리등을 재배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길가밭입니다(사진5), 이것이 돌작밭입니다(사진6). 이것이 가시밭입니다(사진7). 네 개가의 밭이 함께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네 개의 밭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개의 밭을 통하여 저는 두 가지를 먼저 배웁니다.
밭을 통해 배우는 것
우리는 모두 돌작밭입니다. 이스라엘 땅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돌산이라는 것입니다. 지질학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1억 2천만년에서 2억년 전에 형성된 중생대 시노매니안 지질에 속합니다. 이 지질의 특징은 거대한 석회암이 그 바닥을 이루어 땅이 단단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이루는 세겜,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이스라엘 지역은 파기만 하면 돌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마귀가 예수님께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한 것은 그만큼 돌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지역은 조금 낫고 어떤 지역은 조금 못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은 척박합니다. 그 이유는 견고한 돌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돌, 바위, 반석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저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깨닫습니까? “아, 인간은 누구나 돌이구나”. 조금 나은 사람도 있고 조금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은 돌입니다. 겉으로 볼 때 우아하게 보이고 법없이 살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파면 팔수록 돌이 나옵니다. 들어갈수록 완악하고 파헤칠수록 나쁜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앞에서 보면 실망, 옆에서 보면 낙망, 뒤에서 보면 낙망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멀리서 보면 그럴싸 합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누구도 실망입니다.
이번에 어떤 분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정도면 무난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가 살아왔던 인생 역정이 그것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파면 팔수록 나쁜 것이 나옵니다. 차라리 파지 않고 그냥 두었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거기다가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는 누구도 심지 않습니다. 봄철에 갈릴리에 가면 농사짓지 않은 땅마다 가시로 수북합니다(사진8). 누가 심었나 하면 아무도 심지 않았습니다. 어디선가 불어온 씨가 땅에 떨어지고 속에 있던 것이 때가 되니까 나온 것입니다. 없던 것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보기에도 끔찍합니다. 잘못 만지면 찔리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여러번 찔렸습니다. 본 바닥은 돌인데 거기에 가시까지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끔 성경이 지나치게 인간을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인간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존재라고 말한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합니까? 최근에 한 청년이 자기 여동생을 성폭행하다 붙잡혔습니다. 경찰이 그를 심문하다 놀라운 고백을 들었습니다.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했더니 말을 안합니다.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가 딸을 오랫동안 성폭행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낙태까지 시켰습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이러고도 인간이 심히 부패한 존재라고 말한 성경이 과장된 것입니까?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 뿐입니까?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어떻습니까?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조금 지나칩니까?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모두가 돌입니다. 모두가 가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밭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밭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런데 그 밭은 운명적인 밭이 아닙니다. “너는 본래 돌작밭이니 평생 돌작밭으로 살아가라“가 아닙니다. ”너는 타고난 가시밭이니 부질없이 다른 존재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가 아닙니다. 네 개의 밭중에 옥토가 있습니다. 이 옥토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만일 우리가 돌작밭의 운명을 안고 가시밭처럼 살아가야 할 존재라면 예수께서 ”옥토“를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네 개의 밭중의 옥토밭이 있습니다. 분명히 좋은 밭도 있습니다. 네 개중의 하나는 옥토입니다. 그런데 네 개 중의 하나가 옥토라는 말은 비율로 볼 때 우리 중 3/4은 나쁜 땅이고 1/4은 좋은 땅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우리는 그렇게 사람을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영화 제목에 그런 제목이 있습니다.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그 영화에서 영화 배우 송강호는 좋은 놈, 이병헌은 나쁜 놈, 정우성은 이상한 놈으로 나옵니다. 영화처럼 실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따로 있을까요? 넷 중의 하나가 옥토라는 말은 인간의 3/4은 나쁜 놈이고 1/4은 괜찮은 놈이란 뜻이 아닙니다. 누구나 나쁜 놈이지만 누구나 좋은 놈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단단한 길가밭이요 무거운 돌작밭이요 남을 찌르는 가시밭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옥토밭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절대 변할 수 없는 존재라면 예수님이 옥토를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희망은 옥토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돌작밭이면서 누구나 옥토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영적 훈련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누구나 변화가 가능하다. 누구나 옥토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공부하고 순종하고 회개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죄인인데 변화될 가능성이 없다“ 하면 우리는 예배할 필요도 기도할 필요도 말씀대로 살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누구나 옥토가 될 수 있다“. ”옥토가 되어야 한다“가 아닙니다. ”옥토가 되어야 한다“는 율법입니다. ”옥토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비록 돌작밭이지만 옥토가 될 수 있다“.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옥토가 될 수 있다고 믿을 때 바로 잡아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은 다 이루어졌지만 내 안에서 이루시는 예수님은 사역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막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태어났다고 다 자란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라기 시작합니다. 낳은 것은 어머니 혼자 했지만 자라는 것은 부모와 자녀가 협력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후 우리는 하나님과 협력적 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혼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옥토가 되기 위해 우리가 가질 생각은 우리는 너무 비천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좋은 분들이 가끔 그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벌레같은 나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벌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자녀를 위해 죽었습니다. 우리는 벌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한번에 옥토가 안된다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성장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가끔 T.V를 보면 마술이 나옵니다. 깜짝할 사이에 비들기가 나오고 카드가 바뀝니다. 그러나 마술은 카드를 바꿀 수 있지만 10살 먹은 아이를 30살 어른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약1: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다같이 “이루라”. 이루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적 삶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실천의 과정입니다. 빌2:12-13,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다같이 “이루라”. 받는 구원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순간적으로 받지만 이루는 구원은 평생 무릎으로 이루어갑니다.
어떻게 옥토가 될까?
그러면 어떻게 옥토가 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세 가지 밭이 어떤 밭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먼저 길가밭입니다. 이 밭은 단단한 마음입니다. 4절을 보시겠습니까? 마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농부가 씨를 뿌렸으나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습니다. 왜 먹어 버렸습니까? 씨가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안들어갔습니까? 땅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단단해서 씨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마음은 완고한 마음입니다. 완악한 마음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주장으로 굳어 있습니다. 이 밭은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이 밭이 단단해진 이유는 기경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다같이 “묵은 땅을 기경하라”. 누구나 그냥두면 단단해 집니다. 기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돌작밭입니다. 돌작밭은 눌린 마음입니다. 5절 보시겠습니까? 마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농부가 이 밭에도 씨를 뿌렸으나 씨가 곧 말랐습니다. 그 이유는 땅에 돌이 가득하여 씨가 뿌리를 내릴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씨가 돌에 눌려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흙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돌만 있어서 씨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얕습니다. 보기에는 그럴싸 한데 속에는 온갖 돌맹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 돌대신에 흙이 있어야 하는 데 흙이 없으니까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오면 금방 말라 버립니다.
세 번째 가시밭은 상처받은 마음입니다. 7절입니다. 마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가시밭은 씨가 떨어졌으나 가시가 성장을 막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밭입니다. 가시는 두 가지로 식물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하나는 위로 자라지 못하도록 막고 또 하나는 땅속에서 영양을 빼앗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밑에서 막고 위에서 막고 그래서 씨를 질식시킵니다. 땅속에 있는 가시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쓴뿌리입니다. 히12:5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지 말고”. 쓴 뿌리는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 숨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가시와 돌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쁘겠습니까? 가시입니다. 돌은 씨가 땅속에서 들어갈 자리를 빼앗을 뿐, 영양분을 빼앗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가시는 뿌리가 먹어야 할 영양분을 빼앗습니다. 갈수록 나무가 시들 시들해서 왜 그런가 하고 땅을 파보면 땅속에서 가시뿌리가 정상적인 뿌리가 먹어야 할 영양분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시가 무서운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단한 길가밭이든 무거운 돌작밭이든 무서운 가시밭이든 이것들을 옥토로 바꾸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은혜의 비와 쉬지 않은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땅이 전체적으로 돌로 되어 있지만 예루살렘 지역과 갈릴리 지역은 다릅니다. 예루살렘 지역은 땅 색깔이 보기에도 히끄무레 하고 딱딱합니다. 갈릴리 지역은 거무스레하고 부드럽습니다. 그 차이가 무슨 차입니까? 비의 차입니다. 예루살렘 지역은 한 해에 200밀리리터에서 350밀리리터밖에 비가 오지 않습니다. 사해 근처는 한 해에 50미리밖에 오지 않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까 돌이 늘 굳어 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지역은 한 해에 700미리에서 1000미리까지 비가 옵니다. 그래서 돌이 부드러워지고 흙이 많습니다. 한번 비교해 보시겠습니까?(사진9). 이것이 예루살렘 지역입니다. 사방을 바라봐도 돌산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보십시오(사진10). 이곳이 앞에서 본 갈릴리 게네사렛 호수 근처의 땅입니다. 전혀 다릅니다. 처음부터 달랐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나 기본적인 바닥은 라임스톤, 석회암입니다. 문제는 비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입니다. 신11:11을 보시겠습니까?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지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가 얼마나 내리느냐에 따라 같은 땅이 단단하게 되기도 하 부드럽게 되기도 합니다. 비가 많이 오는 갈릴리 땅은 부드럽고 비가 적게 오는 예루살렘 지역은 딱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사역에서 하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것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마음 밭이 부드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는 항상 논쟁하고 다투다가 결국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는 이상한 일은 비만 오면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오면 좋아하는 데 이스라엘은 비만 오면 좋아합니다. 비가 오면 강아지들도 뛰어 다닙니다. 3월부터 11월, 9달동안 비가 오지 않다가 비가 오니까 얼마나 좋겠습니다. 찬183장은 그런 분위기속에서 쓰여졌습니다.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이 추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새 생명은 언제나 비에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할 일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 심령의 밭에 비를 내려 주옵소서.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우리의 존재는 타고난 운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 비로 사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타고난 존재로 두지 마시고 하늘의 비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반가운 빗소리 들려 우리 영혼이 살게 하옵소서”.
사람은 누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따로 없습니다. 비를 많이 받으면 좋은 놈, 안 받으면 나쁜 놈, 받아야 하는 데 안 받으면 이상한 놈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완악하던 마음 부드러워지고 무거운 마음 부숴지고 흉악한 가시 뽑히고 베어집니다. 그리고 옥토가 됩니다. 하늘의 은혜를 받으면 모세같은 살인자 온유한 사람 되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면 완악하던 사울은 큰 대자로 뻗어 무장을 해제하고, 억울한 다윗은 동굴같은 마음으로 원수를 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으면 평양 깡패 김익두는 은혜의 사도가 되고, 7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는 성녀가 되고 전도자가 됩니다. “주여,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옵소서”.
은혜의 단비와 함께 우리가 할 일은 회개입니다. 비를 하나님이 내리시지만 그 비를 흡수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회개는 우리가 합니다. 회개는 내가 옥토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길같은 완악한 마음과 돌같은 단단한 마음, 가시같은 찌르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갈멜산에 가면 엘리야가 바알과 싸웠던 곳이 있습니다. 한번은 그 곳에 갔다 내려오다가 돌작밭을 보았습니다(사진10). 언뜻 볼 때는 붉은 흙인데 자세히 보니까 온통 돌멩이였습니다. 제가 몇 개 뽑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돌이 또 나옵니다. 그래서 또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또 나옵니다. 아무리 뽑아내도 돌이 나옵니다. 그때 제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재가 바로 돌작밭입니다. 남들이 나를 볼 때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나도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님, 아니었습니다. 제 안에는 너무 많은 돌들, 너무 많은 가시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묵상했습니다.
우리속에 돌이 있고 가시가 있는 것은 어쩌면 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통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 내 안에 온갖 돌맹이가 있구나. 아, 내 안에 찌르는 가시가 있구나”. 그래서 그 돌멩이 때문에, 가시 때문에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본래 라틴어 “휴무스”, “흙”에서 나왔습니다. 낮아지고 낮아져 흙이 되는 것, 흙처럼 부숴지고 깨어져 부드러워 지는 것, 그래서 겸손을 “humility”라고 하지 않습니다. 라틴어 “humus”에서 온 것입니다. 흙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씨) 하늘의 비(은혜)
길가밭 - 완악한 마음
마음의 밭 돌작밭 - 눌리는 마음 겸손 옥토
가시밭 - 상처받은 마음
회개
새해 울창한 숲을 이루는 꿈을 꾸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푸른 꿈이 이루어지기 바랍니까? 모세처럼 불타는 열정을 가지십시오. 다니엘처럼 규치적인 습관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씨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옥토가 되십시오. 누구나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옥토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의 은혜의 소나기가 쏟아지게 하십시오. 매일 회개하여 마음이 부드럽게 하십시오. 겸손한 땅이 되십시오. 생명의 씨가 거기 떨어져야 숲이 됩니다.
마13:1-9 2013.2.3.(일)
마음의 밭
푸른 숲(영상).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마음은?
- 방과 같다
- 성과 같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 밭과 같다
마13:1-2,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무리가 그에게 몰려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있더니”.
게네사렛호수(사진1). 안식년사진-이스라엘2. 갈릴리 0273
키부츠(사진2). 안식년사진-이스라엘2-갈릴리 0258
갈릴리 땅(사진3). 안식년사진-이스라엘2-갈릴리 0275
“갈릴리 바다는 천연적으로 아름답다. 바다의 물은 맑으며 22종의 물고기가 있다. 바다주변에는 호도, 너도, 종려, 감람, 포도, 무화과등 연중 열매를 맺고 풍부하고 깨끗한 샘도 많다. 갈릴리 땅은 노는 땅이 없으며 천하의 게으름뱅이라도 경작하고 싶을 정도이다”(요세푸스, 유대인전쟁사. 제3권, 3장, 1-2절).
13:4-8,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계단식밭(사진4). 성지순례(4) 3087. 3088.
길가밭(사진5), 성지순례(5) 3451
돌작밭(사진6). 안식년. 이스라엘(1) 0314
가시밭(사진7). 안식년. 이스라엘(1) 0315
1. 밭을 통해 배우는 것
1) 우리는 모두 돌작밭입니다.
가시(사진8). 성지순례(5) 3453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2) 누구나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옥토가 되려면?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존 오웬, “하나님은 우리 없이 혼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 우리는 너무 비천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 우리가 한번에 옥토가 안된다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빌2:12-13,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 어떻게 옥토가 될까?
1) 세 가지 밭
(1) 길가밭-단단한 마음
마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다같이 “묵은 땅을 기경하라”.
(2) 돌작밭-눌린 마음
마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3) 가시밭-상처받은 마음
마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히12: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지 말고”.
2) 어떻게 하면 옥토가 될까?
(1) 은혜의 비
예루살렘땅(사진9). 안식년. 이스라엘(2) 유다광야 0480.
갈릴리땅(사진10). 성지순례(5) 3302
신11:11,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2) 회개
갈멜산 돌작밭(사진10). 성지순례(4) 3009. 3011
예수님의 생명(씨) 하늘의 비(은혜)
길가밭 - 완악한 마음
마음의 밭 돌작밭 - 눌리는 마음 겸손 옥토
가시밭 - 상처받은 마음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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