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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20-26 한 알의 밀 2013.2.17.(일)

12:20-26 2013.2.17.()

한 알의 밀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부활전 40일간을 말합니다. 올해는 지난 213일부터 331일까지입니다. 사순절은 기독교 절기중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절기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경 최고의 진리는 죽고 사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죽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입니다.

 

이집트 수도원에서 나이많은 수도원 원장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그에게 수의를 입히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눈을 뜨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또 웃었습니다. 이를 보고 수도사들이 물었습니다. “아바,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울고 있는데 어찌하여 웃으십니까?”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처음에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두 번째로 웃은 것은 그대들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요. 그리고 세 번째로 웃은 것은 내가 수고를 마치고 안식을 누리러 천국으로 가기 때문이요”. 그렇게 말한 후 그가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 수도자처럼 죽음앞에 초연할 수 있습니까? 죽음을 두려워 하는 모습을 보고 웃고 죽음이 준비되지 않는 것을 보고 웃고 하늘 나라의 소망을 보고 웃으며 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이나 됩니까? 많지 않습니다.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란 책이 있습니다. 한 죄수가 어느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데 우연히 한 사형수가 사형장을 향해 끌려 가고 있었습니다. 사형수는 밧줄로 꽁꽁 묶이고 양옆에서 사람들에 의해 붙잡혀 가고 있었는 데 마침 비가 와서 땅이 질퍽 거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사형수가 조심 조심 걸어가다가 질퍽거리는 곳에서는 옆으로 살짝 돌아가고 웅덩이가 있는 곳은 팔짝 뛰어갑니다. 30분 후면 죽을 사람입니다. 그것을 간수도 알고 자신도 압니다. 그런데 그 앞에 놓인 웅덩이를 피해 갑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무서워 하고 싫어 합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둘째 오히려 죽어야 산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때 모든 자연은 살아 있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살기 위해서 매일 죽고 있습니다. 가을의 단풍을 보십니까?(사진1) 단풍은 겨울을 앞둔 나무가 자기 잎을 떨어뜨려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단풍은 낙옆을 쓰는 청소부에게는 귀찮은 존재이지만 나무에게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낙옆은 나무를 살리기 위해 때가 되면 땅에 떨어져 나무밑에 썩어 나무를 살립니다. 낙옆이 떨어져 1년쯤 되면 그 노폐물에서 질소, , 칼륨등이 생겨 나무의 뿌리에 스며들고 그것이 줄기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으며 나무를 살립니다. 나무는 죽어서 자기를 살리는 것입니다.

 

세포도 마찬가지입니다(사진2).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몸은 살아 남기 위해 끊임없이 죽습니다. 세포는 새로 생겨나기 위해 계속 죽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약 40조의 세포가 있는 데 그 중 하루에 100억개의 세포가 죽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손, 발가락을 보면 발과 손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이 간격도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세포들이 스스로 죽어서 생긴 공간이라고 합니다. 만일 세포가 적당한 때 죽지 않는다면 손가락 사의가 벌어지지 않아 결국 벙어리 장갑같은 손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세포는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죽지 않은 세포가 있으니 그 세포가 암세포입니다. 암세포는 스스로 죽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세포를 분열시켜 결국 몸 전체를 죽게 만듭니다. 죽지 않고 살기만 한 세포가 바로 암세포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세포는 때가 되면 죽어 결국 자기를 살립니다. 결국 죽어야 삽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에 예수님이 말씀한 생명의 원리를 듣기 원합니까? 오늘 말씀 요12장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적어도 엿새 전에 일어났습니다. 12:1을 보실까요? “유월절 엿새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그리고 요13:1을 보실까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13장은 유월절 전날 상황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 날을 중심으로 12장은 엿새전, 13장은 그 전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20절 이하는 언제 일어났을까요? 적어도 유월절 전날에서 엿새전 그 사이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20절을 보실까요?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 데”. 유월절은 유대인의 최고의 명절입니다. 옛날 자기 선조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념한 일종의 해방절인데 우리의 고난주간, 부활절쯤에 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8일간 절기를 지키는 데 그 주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올라와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20절에 이미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때는 유월절 며칠 앞둔 때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신 것은 헬라사람이었습니다. 헬라는 지금의 그리스입니다. 보통은 유월절에 유대인만 모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모이는지. 예수님 시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살던 시대 어느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유대인이 100만이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뿐 아니라 외국에 산 모든 유대인도 다 모인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날 헬라인이 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두 민족이 헬라인과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류를 대표할 때 유대인과 헬라인이라고 말합니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하나님 믿는 백성, 헬라인은 하나님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 헬라인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우연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의 때와 의미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는 며칠 후면 유월절에 죽는다. 하나님이 이를 위해 하나님이 헬라인을 보내셨구나. 그렇다. 나는 유대인만을 위해 십자가지지 않는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헬라인을 보내셨구나”. 예수님이 이 해석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월절에 헬라인이 온 것을 우연한 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어떤 일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일어난 일은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들의 백합화 하나가 피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기적을 행하여 위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3,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여기 영광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영광은 글자 그대로 사람앞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높힘받는 것입니다. 원래의 뜻은 빛이요 불입니다. 빛이 사람들앞에 환하게 비취듯 많은 사람에게 불처럼 빛나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가 영광입니까? 어떻게 죽는 것이 영광입니까? 영광은 연예인들이 연말에 화려한 무대에서 대상받는 것이 아닙니까? 대통령이 수천만 국민이 보는 앞에서 취임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영광이다

왜 죽음이 영광일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이 말씀의 배경을 살퍼보면 좋겠습니다. 성경학자에 의하면 그 당시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은 헬라의 도시 에뎃사 왕국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왕의 아들이 문둥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 데 소문을 들으니 예수님이 문둥병 뿐 아니라 죽은 사람까지도 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뎃사 왕은 몇 사람의 관리들을 사신으로 보내 예수님의 도움을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뵙고 전할 내용은 이것입니다. “우리 왕의 아들의 병들었으니 고쳐 주십시오그리고 만일 그렇게 해주면 평생 예수님을 왕궁에 모시고 풍부하게 대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이 이 일이 사실이었다면 그들은 빌립을 통해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리고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말씀이 23절입니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다른 영광을 말씀합니다. 에뎃사 왕이 말하는 영광과는 전혀 다른 영광입니다. 아들을 살려주면 평생 왕궁에서 호의호식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게 하는 영광이 아닌 다른 영광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24절입니다.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 헬라의 에뎃사왕이 왔느냐 안 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사람들이 찾는 다른 영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영광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오는 영광과 같습니다. 우리는 대개 열매를 영광으로 압니다. 가을에 노랗게 익은 황금색 벌판은 우리에게 추수의 영광을 깨닫게 합니다. 가을에 빨갛게 익은 과일, 사과, , 포도, 감람, 무화과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농부의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열매만 봅니다. 그 열매가 익을 때까지 땅밑에서 눈물과 고통의 대가를 지불한 씨의 고통은 보지 않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이 피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먹구름과 천둥이 친 것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열매를 영광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씨를 영광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결과를 영광으로 보지만 예수님은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영광으로 봅니다. 이번에도 우리 청년가운데 중등학교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한 청년이 있습니다. 요즘 얼마나 교사되기 힘듭니까? 사람들은 그가 합격하니까 축하한다. 고생했다말하지만 사실 그의 영광은 지나간 4년간, 아무도 모르는 고통속에 있습니다. 그가 4년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를 죽이자 그에게 합격의 영광이 찾아온 것입니다. 열매가 영광이 아니라 씨가 영광이었습니다. 갑자기 열매가 생긴 것이 아니라 씨가 죽어서 열매가 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영광으로 여깁니까? 겉으로 나타난 성공의 열매입니까? 고난속에서 이룬 자기 희생입니까? 제가 이스라엘에서 포도즙을 만드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잘 익은 포도를 사람들이 발로 밟습니다. 그러자 순하고 향기로운 포도즙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 두 종류의 사람이 있구나. 다만 잘 익은 포도알이 되려는 사람과 그 포도알이 으깨져 향기로운 포도즙이 되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습니다. 잘 익은 포도알처럼 성공하려는 사람과 자기를 희생시켜 남을 살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사 교정에 가도 두 종류의 군인이 있습니다.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장군과 파월 장병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으로 슈류탄을 덮쳐 부하를 살려낸 강재구 소령이 있습니다. 같은 시기 유럽에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야망을 위해 전 국민을 전쟁에 몰아 넣고 마지막에 세인트 헬라네섬에서 죽은 나폴레옹과 박사 학위 네 개를 버리고 가난한 아프리카로 가서 흑인들과 함께 산 슈바이처가 있습니다. 세상은 두 종류 정치인, 두 종류 사업가, 두 종류 교회, 두 종류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행복은 얻은 것을 즐기는 것이다. 거룩은 얻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누구나 얻기만을 위해 살아갈 때 세상적 영광이 그의 삶의 목표가 됩니다. 얻은 것을 즐길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행복해도 남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것도 역시 이기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기 위해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죽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2:24을 다시 보십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죽음을 농부의 언어로 비유하셨습니다. 저는 농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주는 농사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경험은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늦가을에 아버지께서 밭에 보리 종자를 뿌리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씨앗들이 흙 속에 떨어지면 겨울이 되기 전에 파릇파릇 싹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겨울 추위와 함께 보리는 왕성하게 자랍니다. 어느날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잘 자랄까? 하며 보리를 뽑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보리씨가 뿌리째 딸려 올라왔습니다(사진3). 자세히 보니 그 뿌리에는 종자로 뿌려졌던 보리 껍질이 그대로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손으로 만졌는 데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속은 텅 비고 껍질만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속이 텅빈 이유는 씨속에 있는 알맹이가 새싹을 위하여 자신을 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깨뜨려 자기 것을 주고 껍질만 남은 보리,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은 밀의 생물학적 실체입니다. 다시 24절 보시겠습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말은 자기를 깨뜨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설명한 사람이 웟치만 니입니다. 그가 쓴 <자아가 죽을 때>(The release of the spirit)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를 씨로 비유했습니다(사진4). , 여기에 씨가 있습니다. 씨는 알맹이와 껍질로 되어 있습니다. 알맹이를 성경은 속사람이라고 부르고 껍질을 겉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속사람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육체에 의해 막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가지 못하는 것은 이것을 막고 있는 껍질때문입니다. 이 껍질이 깨져야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이 밖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두 가지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어떻게 내가 생명을 소유할까?.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어떻게 생명을 흘러가게 할까?”. 안 믿는 사람은 사실 깨질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다 죽어 있기 때문에 깨져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있는 데 껍데기 때문에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깨뜨려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말은 믿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이것을 보여준 사건이 요12:1-8 말씀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베다니에 갔는 데 그곳은 부활한 나사로와 두 자매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들어오더니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3절입니다. 12:3,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 옥합은 곧 인간존재의 모습입니다. 우리속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옥합에 의해 갇혀 있습니다. 향기로운 향유가 가득한 데 껍데기로 막혀 있습니다. 그래서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향유가 온 세상에 퍼집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무엇이 우리 껍데기를 깨뜨리게 할까요? 우리 껍데기는 우리의 육입니다. 육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속에 보이지 않는 지체, 육체적 소욕, 죄의 몸을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깨뜨립니까?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합니다. 영이 깨뜨립니다. 8:13절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이 죽입니다.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영이 살립니다. 영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이 일을 합니다. 성령은 늘 말씀과 함께 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입니다.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수술하는 칼처럼 우리 영과 혼을 둘러싼 육의 껍질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단단해서 잘 깨어지지 않습니다. 껍질이 잘 깨지지 않은 이유는 자기 사랑때문입니다. 나를 둘러싼 가장 강력한 껍질이 자기 사랑의 껍질입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200-300번씩 자기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나를 붙들면서 내 안에 있는 생명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자기사랑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 말씀을 보실까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프쉬케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목숨으로 번역되지만 또 자아’, ‘’, ‘의지’, 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은 , 내 뜻, 내 생각, 내 소원, 자기 사랑, 자기 교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의 영성가 잔느 귀용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 죽음을 주제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앞에서 죽을까? 자기 죽음이 해답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기 죽음을 정의했습니다. “자기 죽음이란 자기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이다. 과거의 나는 하나님앞에서 잊어 버리고 미래의 나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나는 하나님께 드려 버리라. 자기 죽음은 나의 육이 전적으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또 있습니다. 마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던 15세기의 독일 신비주의자 타울러가 있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님안에서 죽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를 죽인다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내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에 대해서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지금도 내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나 자신에게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을 둘러싼 껍질을 날마다 성령과 말씀으로 깨뜨립니까? 그래서 여러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밖으로 흘러가게 합니까? 이것을 바울은 내가 매일 죽노라라고 말합니다. 세포가 죽어야 우리 몸이 살고, 낙엽이 떨어져야 나무가 살고,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오고, 생명을 버려야 생명이 보전되고, 예수님이 죽어야 부활하고, 이것이 성경의 가장 큰 진리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죽어야 산다.

그런데 이 성경적 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생의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가정생활, 우리의 직장생활, 인간관계, 사역, 선교, 목회, 정치, 경제, 역사, 모든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이 원리입니다. 일제시대때 평안도 어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하나님을 섬기던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전도하고 봉사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선교사가 동네에 들어와 전도합니다. 마침 그가 힘들게 교회를 짓는 것을 하고 내가 무엇을 할까 하다가 자기에게 있는 논 천평을 다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선교사가 자기 논을 다 바친 집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를 교회 사찰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 데 선교사가 보니 참 영리하고 공부도 잘해서 하고 미국 자기 고향으로 보내 장학금을 받게 하고 공부를 시켰습니다. 후에 이 아들이 잘되어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이 아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연세대학교 총장 백낙준 박사입니다. 그의 아버지 백사겸 집사가 논 1000평을 바칠 때는 그는 아무 것도 먹고 살 것이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는 자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30, 60, 100배의 열매로 축복하셨습니다.

 

황해도 어느 교회가 6.25때 폭격을 맞았습니다. 예배당이 폐허가 되자 예배드릴 데가 없게 된 교인들은 교회를 신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운 데 교회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에 열여덟 살의 처녀가 있었는데, 그가교회 때문에 하루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네가 교회를 지어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제가 무슨 힘으로 교회를 세웁니까?” 했는 데 한번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선데이 서울>이라는 잡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 뒷면에 이런 광고가 새겨 있었습니다. “안구를 삽니다”. 눈을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녀는 광고에 적힌 병원을 찾아가 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 눈을 사 주세요”. 의사는 깜짜 놀라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지으려고 한다고 하자 아직 믿지 않은 의사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이기에 멀쩡한 처녀가 자기 눈까지 팔려고 할까?” 그래서 가까운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나가보니까 너무 좋아서 계속 나가다가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처녀를 불렀습니다. “아가씨! 교회를 세우기 위해 눈을 팔려고 하다니 장합니다. 제가 미력하지만 돕겠습니다하고 눈을 사주는 대신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처녀를 자기 집 양녀로 삼아 공부시킨 후 자기 아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실화입니다. 자기를 희생한 사람에게 다시 사는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죽으면 사는 원리는 신앙의 세계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닙니다. 장사와 사업에도 해당됩니다. 일본에 우노 다카시라는 요식업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식당을 차리면 안되는 식당이 없습니다. 자신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배운 사람들도 다 잘됩니다. 아무리 불황이어도 그가 세운 식당은 다 잘됩니다. 그 비밀을 그가 <우노 다카시, 장사의 신>이란 책에서 말했습니다(사진5). 비밀은 이것입니다. “장사해서 이를 남기려고 하지 말고 손님을 기쁘게 하라”. 그가 한 말입니다. “접객이란 무조건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가게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득을 볼까가 아니라 어떻게 손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남는 강한 가게는 손님들에게 이득을 주는 가게다. 입지가 안좋아도 손해를 봐도 끝까지 되는 가게는 손님을 먼저 생각하는 가게다”. 결국 자기를 죽인 자가 사업에도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 달려 있습니다. “죽으면 산다”. “내가 죽으면 세상을 살린다”. “한 알의 밀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맨다”.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얻고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보존한다”. 전도는 무엇입니까? 나를 잃고 영혼을 얻는 것입니다. 구제는 무엇입니까? 돈을 잃고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은 무엇입니까? 내가 죽어 가족을 살리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무엇입니까? 큰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자기를 죽인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충남 부여에 가면 부여 동남교회가 있습니다. 부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세종시에 땅에 사고 교회를 지었습니다. 허허벌판 세종시에 들어올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작은 교회가 땅사고 교회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 전교인이 힘겹게 헌금하고 교회 예산을 줄이고 줄여 이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여기서 일할 목회자를 찾았습니다. 제가 그 소문을 듣고 감동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큰 교회도 아니고 지방의 작은 교회가 온 정성을 다해 교회지었다는 말에 감동받았습니다. 마치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붓는 것과 같았습니다. 분명 이 교회는 잘 될 것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유방기 목사를 소개해 결국 결정되었습니다(사진6). 다음 주에 이 교회 창립예배가 있습니다. 아직 교인은 없습니다. 다만 있는 것은 부여의 작은 성도들이 눈물과 땀으로 지은 영광스러운 자기 죽음의 건물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이 알음다운 일에 동참하기 위해 목회자 생활비도 대고 무엇인가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려운 시골 교회 교인들이 푼돈을 모아 지은 영광스러운 교회, 우리는 무엇을 이 교회에 버려야 하겠습니까? 헌금도 필요하고 기물도 필요하고 차도 필요합니다. 누구 자기를 버려 교회를 살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습니까? 다음 주에 예배후에 세종시에 갈 때 함께 가서 생각했으면 합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어야 삽니다. 현재를 잃고 미래를 얻는 것이 비전입니다.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살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름다운 사순절에 예수님처럼 자기를 잃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12:20-26 2013.2.17.()

한 알의 밀

단풍(사진1)

세포(사진2).

12:1, “유월절 엿새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 데”.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죽음이 영광이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성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행복은 얻은 것을 즐기는 것이다. 거룩은 얻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보리씨(사진3).

 

웟치만 니, <자아가 죽을 때>(사진4).

 

12:3,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잔느 귀용, “자기 죽음이란 자기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이다. 과거의 나는 하나님앞에서 잊어 버리고 미래의 나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현재의 나는 하나님께 드려 버리라. 자기 죽음은 나의 육이 전적으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타울러, “나를 죽인다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내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에 대해서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지금도 내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나 자신에게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

<우노 다카시, 장사의 신>(사진5).

세종장로교회(사진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