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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5:20-32 관계의 회복 2013.2.10.(일)

15:20-32 2013.2.10.()

관계의 회복

오늘은 민족의 명절 민속주일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과 땅 사이에 산, 구름, , 언덕이 있습니까? 해답은 였습니다. 하늘과 땅. “가 있지 않습니까? 는 관계입니다. 둘을 연결하는 관계,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있었느니라가 아니라 태초에 관계가 있었으니라”.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나와 너, 나와 우리, 부모와 자녀, 형과 아우, 나와 이웃, 우리와 자연, 나와 조국, 모든 것이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짧은 영상 하나 보겠습니다. 미국의 한 쌍둥이 이야기입니다(영상). 어떻습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쌍둥이, “동생이 아파 힘이 없을 때 언니가 팔을 뻗어 안아 주었더니 살았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자란다”.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관계입니다.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을 한번 안아 볼까요? “사랑합니다. 당신은 내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의 삶이 기본적으로 관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관계를 잘한 사람이 행복하고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미시간 대학교 사회 연구소에서 그런 통계를 보고했습니다. 5년간 423쌍의 노인부부의 관계를 추적했습니다. 그 기간중 134명이 죽었는데, 이 사람들이 평소 어떻게 살았나? 재미잇는 것은 남과 잘 지내고 잘 베푼 사람의 사망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반절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평소의 좋은 관계가 사망과 장수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교회 잘 나온 사람과 불신자의 건강에 대한 연구도 있습니다. 교회 잘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도 건강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났습니다. 교회 잘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은 심방병, 정신병, 치매등 발병율이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30% 이상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관계속에 삽니다.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믿음으로 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사랑하고 삽니다. 좋은 관계는 언제나 행복과 승리를 가져옵니다. 여러분도 좋은 관계안에서 행복하고 승리하기 바랍니까?

 

오늘 말씀은 흔히 말하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밖에 탕진하고 거지처럼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닌 사람은 아마 100번은 넘게 이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너무 쉽게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땅에 한 못된 아들이 아버지를 졸라 재산 빼돌려 나갔다가 패가 망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놈은 나쁜 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아들처럼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아들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리 막됐어도 아버지를 욱박질러 재산 빼 도망간 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 다행히 나는 아니네. 우리 아버지는 돈이 없어 나에게 줄 재산도 없어. 그리고 나도 그렇게 막 돼 먹진 않았어하고 빠집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돈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돈이 있고 아들이 못 돼 먹어야 이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속에 여러 종류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관계가 둘째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큰 아들과 아버지와 관계도 있습니다. 같은 아버지와의 관계인데 성격이 다릅니다. 형과 동생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있고 더 나아가 일, 노동과 관계도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이 모든 관계의 초점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잘살고 못살고 탕자가 술먹고 안먹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본질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성경에서도 가장 성경적인 비유중의 하나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1) 둘째 아들과 아버지

, 이야기의 시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면서 생겨납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 받은 탕자는 돈이 있는 한 좋았습니다. 그러나 돈 떨어지자 신발떨어져 친구떨어져 사귀던 여자까지 떨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아무 것도 없는 나를 있는 대로 받아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부모 말고는 거의 대부분이 나의 조건에 따라 나를 대합니다. 공부 많이 했으면 , 공부많이 했네. 대단해합니다. 직장이 좋고 인물이 괜찮으면 이 사람은 미래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내가 가진만큼 대우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조건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요즘 말로 그것을 스펙이라고 합니다. 자기 조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둘째 아들이 돈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돼지치는 곳으로 가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하루 하루 연명합니다. 정말 둘째 아들은 힘들었을 것입니다. 외로웠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 그런 외로운 날이 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외롭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예수믿는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로운 것과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 외로운 것은 종류가 다릅니다. 통계를 보면 미국인 열명 중 두 셋은 혼자 삽니다. 미국인중 1/4은 혼자 사는 가정입니다. 남편과 아내,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보다 11가구에 혼자 사는 미국인이 더 훨씬 많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지금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싱글청년, 혼자 사는 직장인, 가족과 떨어져 살거나 가족없이 사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파트를 지어도 원룸을 많이 짓습니다. 앞으로 교회도 싱글 교구가 생길지 모릅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답니다. “인류의 가장 큰 질병은 무엇입니까? 나병입니까 에이즈입니까 치매입니까?” 뜻밖에 테레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인류의 가장 큰 질병은 외로움입니다”.

 

문제는 왜 외로우냐입니다. 다만 둘째 아들이 잘못해서 고생한다가 아닙니다. 왜 둘째 아들이 고생하느냐입니다. 한마디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돈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있을 때는 좋지만 없을 때는 사람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돈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관계보다 돈을 택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본질적인 관계요 무조건적인 관계요 영원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 관계를 깨고 비본질적이고 조건적이고 일시적인 관계인 돈으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2) 큰 아들과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와 관계를 가진 것은 둘째 아들만이 아닙니다. 큰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큰 아들은 괜찮은 데 둘째가 문제야”. 둘중 누가 더 문제가 많으냐면 분명 둘째 아들일 것입니다. 큰 아들은 그래도 집에 있었는 데 둘째는 집을 나갔습니다. 큰 아들은 재산을 축내지 않았는 데 둘째는 재산을 축을 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행동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볼 때 더 큰 문제는 큰 아들에게 있습니다. 큰 아들은 둘째가 돌아오자 아버지에게 이렇게 쏘아 붙입니다. 29절입니다. 15:29-30,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은 거지신세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기는 커녕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전혀 남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위해 송아지를 잡는 아버지에게 자기는 그렇게 뼈빠지게 일했는 데도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준 적이 없었다고 불평합니다.

 

큰 아들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누구였을까요? 전형적인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입니다. 그는 탕자처럼 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섬겨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탕자처럼 재산을 축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잘못 설정했습니다. 그는 입술로는 아버지라 불렀지만 사실 아버지와 그와의 관계는 월급받고 일하는 노사관계였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한 것은 아버지였기 때문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보상도 많이 받는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유산을 준다면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동생을 볼 때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간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도 안한 놈이 자기가 일해서 모은 재산을 가지고 가고 그나마 그것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으니 형의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둘째 아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단절하고 큰 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설정했습니다. 하나는 아예 아버지를 떠나고 하나는 아들이 아니 노동자로 거기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돌아와야 하고 하나는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돌아오고 큰 아들은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성경은 돌아오는 것을 회개라고 말하고 마음 바꾸는 것을 변화라고 말합니다. 다행히도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20절 앞부분 보실래요?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그런데 문제는 큰 아들입니다. 밖에 있는 아들은 돌아왔는 데 집에 있는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겠습니까?(사진). 17세기 네델란드의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그린 탕자의 비유그림입니다. 거지신세로 돌아와 바짝 무릎을 꿇은 것은 둘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붉은 망토를 걸치고 거만하게 노려 보고 있는 것은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늙고 약하여 허리를 굽히고 있는 데 그것을 보는 형의 태도에는 오만함과 미움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더 어려울까요?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입니까? 하나님께 돌아왔음나 여전히 좋은 아들로 살지못하는 신자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는 교회밖에 있는 불신자, 하나님께 돌아왔으나 제대로 아들노릇 못하는 불신자는 교회안에 있는 불신자입니다. 어느 불신자가 더 어려운 불신자일까요?

 

그런데 어떤 경우든 두 아들을 회복시킨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20절 다시 볼까요?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스라엘의 집은 특이합니다. 우리는 보통 낮은 곳에 집을 짓습니다. 산과 골짜기가 있으면 골짜기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산에 집을 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산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들은 저 밑에 골짜기에서 위로 올라오고 아버지는 산에서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래서 거리가 먼저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 합니다. 그러나 회개보다 먼저 있는 것은 ‘’용서입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아버지가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예 집떠날 때부터 이미 용서한 것입니다. 돌아와서 용서한 것이 아니고 집나갈 때 용서했습니다. 돌아올 때 하나님이 용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가 효력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을 아십니까? 날이 서늘할 때 아담아, 어디 있느냐?” 물으시면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사랑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목사님이 탄광지역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하루는 탄광으로 심방을 가서 거기서 일하는 신자의 손을 잡고자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때 그 신자가 말했습니다. “제 손이 더러워서 목사님과 악수를 못하겠습니다.”그러자 이 목사님은 몸을 굽혀 양손에 석탄 가루를 가득 묻혔습니다. 그리고 새까매진 손을 내밀며 다시 말했습니다. “이제 괜찮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아담을 찾으러 에덴동산에 내려오신 하나님은 때가 되자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사람과 같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중 가장 좋은 일은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대상의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나 막론하고 같이 먹었습니다. 바리새인, 창기, 세리, 어부, 사마리아 여인, 하도 사람들과 함께 먹기를 좋아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7:34,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언제나 함께 먹음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마주 앉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초등학생 아들이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냈습니다. 마침 식사 시간이 되어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밤은 먹어”. 식탁에 둘러 앉자 아빠가 말했습니다. “오늘 네가 잘못한 것도 있고 하니 네가 기도해”. 아들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원수와 함께 식탁에 앉는 사람은 없습니다. 꼭 식사하려면 사과부터 하고 식사합니다.

 

여러분,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혼자 먹는 사람입니다. 혼자 먹으면 맛도 없고 기분도 안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혼자 먹는 데 걸게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혼자 먹으면 바쁘기도 하고 누가 보기도 하기 때문에 대부분 패스트푸드를 먹습니다. 그러면 맛은 없으면서 오히려 살만 찝니다. 여럿이 함께 먹으면 잘 먹으면서 살은 오히려 안찝니다. 좋은 음식을 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음식이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먹는 음식입니다. 차리느라 수고는 되지만 사랑이 들어갔기 때문에 가장 좋은 음식이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먹기 때문에 행복한 식탁입니다. 며느리 여러분, 수고스럽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내가 만든 음식으로 가족들을 행복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일이다하면 나쁜 음식이 됩니다. 내가 아직 젊어서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대접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여자로 태어나 음식하고 또 가족이 행복하니 나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는 것은 집에 올 때 싸가지고 오지 않아요?

함께 먹는 식탁,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의 아버지도 아들이 돌아오자 살진 송아지를 잡지 않습니까? 사랑은 늘 같이 먹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오면 이렇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돌아왔어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 데 그것이 큰 아들의 경우입니다. 큰 아들의 문제는 몸은 집에 있고 이름은 아버지요 아들인데 관계가 잘못되어 불행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아버지는 아버지인 데 악덕 기업주 아버지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만 시키고 복은 안주고 힘들게 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서운 경찰이나 검사같은 분입니까?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옳자른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고 이미 돌아온 분은 좋으신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교회에서 잘못될 수 있는 사람은 일만 하고 하나님과 즐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큰 아들의 가정은 아버지와 갖는 해피 홈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 죽도록 일하는 살벌한 노동판이었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해피 홈입니까? 뼈빠지게 일만 하는 노동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릅니다. 15: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보십시오.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 그렇게 토라지고 불평해도 아버지가 나무란 적이 있습니까? “너는 형이 되어가지고 그게 무슨 짓이냐?” 말했습니까? 28절 보시겠습니까?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토러져서 집에 안들어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다정하게 다가와 집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하며 달래지 않습니까? 집나간 아들에게는 벗은 발로 달려가고 집밖에 삐진 아들에게는 부그럽게 달래는 아버지, “좋으신 하나님, 너무나 좋은 분,. 찬양하리. 영원히. 참 좋은 분”.

 

형과 아우의 관계

오늘의 말씀은 아버지와 두 아들간의 관계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형과 동생간의 관계도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형과 아우의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만일 형과 아우가 좋은 관계였다면 동생이 집 나간다고 했을 때 형이 말렸어야 합니다. 혹시 고집을 부리고 집을 나갔다 해도 형은 동생을 찾으러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형이 동생을 찾으러 나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찾으러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동생이 거지 모양으로 돌아왔는 데도 형은 빼쳐서 밖에 있습니다. 도대체 형이 삐질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생이 재산을 축냈어도 아버지 재산을 축내고 마음을 아프게 했어도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실수로 고생을 했지만 형이 고생한 것도 아닙니다. 동생이 고생할 때 형은 아무 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내가 만난 사람들과 내가 어떻한 관계를 가져왔나 반성합니다. 안도현이 쓴 연탄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너는 길가에 나뒹구는 연탄을 발로 차지 말라. 너는 언제 사람에게 따뜻한 연탄이었느냐?” 할 말이 없습니다. 하루 하루 우리가 먹고 사는 데 바쁘다고 우리 형제를 돌보지 못했습니다. 형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흔들거려도 타버린 연탄처럼 차겁게 대했습니다. 무정한 형이요 무심한 동생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진리는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요 우리는 한 피받아 한 몸된 형제요 자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삼성형제들 같은 싸움이 우리가운데 없어야 합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버지때문이요 아 버지의 진정한 소원은 형제간의 화목일텐데 내 돈이지 네 돈이 아니야하고 다투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 내려가서 음식만 먹지 말고 조용한 시간에 동생 얼굴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동생 머리가 많이 희었네”. 내 머리가 흰 것은 좋은 데 동생 머리 흰 것은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누나의 주름진 손 한번 잡아보면 어때요? 수술 때문에 몸이 야윈 언니 한번 안아보면 어때요? 옛날 어릴 때 철없이 뛰어놀던 형제가 늙어가니 마음이 아프지 않아요?

 

오늘 말씀에 나타난 형과 동생은 피를 나눈 형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사는 모든 사람과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사실 이보다 더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까? 한 사람은 내 남편을 낳아준 여자요 또 하나는 내 아들과 살아주는 여자가 아닙니까? 아무리 내가 남편과 좋아해도 그 남편을 낳아준 사람이 없었다면, 아무리 내 아들이 귀해도 아내없이 혼자 산다면 어떻겠어요? 낳아줘서 감사, 살아줘서 감사. 둘은 얼마나 기가막힌 관계입니까? 정말 눈물없이는 못 만날 관계입니다. 재가 아들을 결혼시켰잖아요? 며느리 볼 때마다 너무 감사한 거예요. 내 아들의 장점과 단점 다 아는 데 그 아들과 살아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일 며느리 없었다면 지금도 내가 아들을 돌봐야 하지 않아요? 그래서 거짓말 시리즈가 있답니다. 먼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Best 5. 5: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 될래요. 4: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3: 어머니가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2: 용돈 적게 드려서 죄송해요. 1: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있다 가세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 Best5가 있습니다. 5: 좀 더 자라. 아침은 내가 할 테니. 4: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3: 내가 얼른 죽어야지. 2: 생일상은 뭘... 그냥 대충 먹자꾸나. 1: 아가야, 난 널 딸처럼 생각한단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보통 구약은 언약”, 신약은 구원그럽니다.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약속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세상사람이 예수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관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입니다. 믿음이 하나님과 옳바른 관계라면 믿음의 삶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입니다. 2차 대전때 유대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독일 친위대 장교중 20%이상이 카톨릭, 기독교, 예수님 믿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보고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도 주일날 교회가서 사도신경 외우고 신앙생활했겠지만 세상은 그들을 예수믿는 그리스도인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는 믿음의 고백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믿음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발전하면 형제와의 좋은 관계, 이웃과의 좋은 관계로 발전합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으로 형과 아우가 화해한 이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분명 동네 사람들에게도 사랑스러운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침마다 동네사람을 만나면 환한 얼굴로 힘차게 인사했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진 형제들은 어떻게 일했을까요?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했겠지만 돈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을 열심히 한 형제들은 그들이 사는 자연과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했을까요? 자연을 더 사랑하고 민족과 역사도 더 시랑했을 것입니다. 왜 지구가 환경파괴가 일어난지 아십니까? 왜 라니요, 온난화, 남극의 해빙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지구의 저쪽에서 자연을 파괴하면 지구의 이쪽이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섬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륙의 일부이며 관계의 한 조각입니다.

 

15:20-32 2013.2.10.()

관계의 회복

쌍둥이 이야기(영상).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1) 둘째 아들과 아버지

 

2) 큰 아들과 아버지

15:29-30,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관계의 도표

둘째 아들- 깨어진 관계- 돌아와야 한다-회개(교회밖)

큰 아들 잘못된 관계 마음을 바꿔야 한다- 변화(교회안)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렘브란트(탕자의 비유) (사진)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7:34,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15: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좋으신 하나님, 너무나 좋은 분,. 찬양하리. 영원히. 참 좋은 분”(찬양).

 

형과 아우의 관계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하는 거짓말 Best 5.

5: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 될래요.

4: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3: 어머니가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2: 용돈 적게 드려서 죄송해요.

1: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며칠 더 있다 가세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거짓말 Best5

5: 좀 더 자라. 아침은 내가 할 테니.

4: 내가 며느리 땐 그보다 더한 것도 했다.

3: 내가 얼른 죽어야지.

2: 생일상은 뭘... 그냥 대충 먹자꾸나.

1: 아가야, 난 널 딸처럼 생각한단다.